[민주주의는 목소리다]③서열·경쟁사회서 뒤처질까 두려워..오늘도 '침묵' 합니다

허남설·고희진·정대연 기자 2017. 1. 16.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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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ㆍ1부 ③ 나는 나를 검열한다

일러스트 | 김번

‘나는 오늘도 나를 검열한다. 내 생각대로 말할 수 없었다. 모두가 틀렸다고, 튀어 보이려고 한다고 할까봐, 낙오자로 찍힐까봐 스스로 입을 막는다. 괜히 나서기보다는 내 옆자리 동료처럼 잠자코 있는 게 살아남는 길이 아닐까.’

경향신문은 다양한 세대·지역의 시민 1000명을 대상으로 가정·학교·직장 등 일상에서 자신의 의견을 얼마나 표출하고 있는지를 묻는 온라인 설문을 실시했다. 설문 결과 시민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정해진 서열과 치열한 경쟁 속에서 ‘말’을 억누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진학·취업·승진 같은 삶의 경로에서 자칫 말 한마디로 뒤처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사람들을 짓눌렀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관념적 처세가 강력한 자기검열 기제로 작동했다.

■ 둘 중 한 명은 ‘내 의견’을 꺼린다

설문은 강의, 직장 내 회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 일상적인 상황 8가지를 예로 들어 평소 자신의 의견을 얘기할 수 있는지 물었다. 강한 긍정부터 강한 부정까지 4단계로 된 보기를 제시한 결과 2명 중 1명(50.3%)이 부정적인 답을 골랐다.

특히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질문할 때 눈치를 본다’와 ‘윗사람이 나의 평소 생각과 다른 말을 할 경우 일단 내가 틀렸는지부터 살펴본다’에 ‘그렇다’와 ‘매우 그렇다’란 응답 비율이 69.4%와 64.3%로 가장 높았다. 많은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질문을 주저하고, 윗사람과 논쟁하기를 껄끄러워하는 것이다.

말의 물꼬를 틔울 대안도 물었다. 자유로운 문제제기와 의견제시에 필요한 조건을 묻는 질문엔 ‘다름을 인정하는 사회적 분위기’(23.9%)와 ‘자신의 논리에 대한 확신’(23.7)이 가장 많이 꼽혔다. 이어 ‘문제제기에 법적·제도적 불이익을 묻지 않는 문화’(17.5), ‘경제적 안정’(14.0), ‘긍정적 변화가 이뤄질 수 있다는 기대감’(13.4), ‘내게 동조해 줄 사람’(7.3) 등의 순이었다.

응답자 각각에게 보기를 고른 이유를 묻자 다수가 ‘튀는’ 의견을 곱지 않게 보는 분위기에 당황했던 경험을 털어놓았다. 특히 서열과 경쟁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도태·배제·낙인과 같은 ‘주홍글씨’를 두려워하는 감정이 말을 검열하고 있다.

■ 감정이 말을 검열한다

말을 주저하는 이유엔 우선 개인적인 걱정이 앞섰다. “내가 틀렸으면 어떡하지” “성격이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면…” “욕먹거나 비판받을까봐” 등이었다.

직장인 송모씨(35)는 대학 시절 수업시간에 ‘망신’당한 경험을 털어놨다. 교수에게 질문을 했는데, 설명은커녕 “그 질문은 오늘 얘기하는 초점에서 벗어났다” “요즘 학생들 독해능력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네” 같은 말로 받아친 것이다. 송씨는 “순간 모두가 나만 쳐다보는 것 같았다. ‘내가 정말로 수준이 좀 떨어지나’란 생각도 했다”고 말했다.

광고기획을 하는 최현아씨(29·가명)는 “광고 작업이 원래 다양한 의견을 주고받는 과정이 필요한데, 너무 튀는 아이디어라면서 눈치를 주고 ‘회의를 딜레이(지연)시키지 말라’며 압박을 받으니 ‘이걸 얘기해도 되나’ 하고 망설이게 된다”고 했다.

김모씨(35)는 이런 모습이 영국 유학 시절 경험과는 참 다르다고 느꼈다. 김씨는 “유학하면서 만난 친구들은 ‘팩트’(사실)가 틀린다는 지적을 받아도 ‘아, 내가 몰랐구나’ 하며 그냥 넘어가더라”며 “반면 한국 사람들은 (사실관계가 아니라) 의견에 대한 반론인데도 부끄러워한다”고 말했다.

■ 서열이 말을 검열한다

자기검열을 하게 되는 걱정을 더 파고들면 “다른 의견을 들어주기보다는 정답을 원하는 문화” “나의 권위를 위해 남을 깔아뭉개는 분위기” 같은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떠올랐다. 특히 각종 서열은 불가침 영역이란 인식이 도드라졌다.

디자인업체 근무 3년차인 박세희씨(27·가명)는 디자인은 취향의 문제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정답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실제 일을 할 때는 상사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못한다고 했다. 입사 초기 시안에 대한 의견을 가감 없이 얘기하다가 팀장에게서 “네가 아직 어려서 잘 모르나 본데” “네 취향이 아직 ‘마이너’구나” 같은 말을 종종 들었기 때문이다.

서열은 말의 장벽이 됐다. 나이, 입학연도, 직장 내 근속연수 등 노력과는 무관한 서열들이 ‘말할 자격’을 제약했다. 시쳇말로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 되는 걸 겁냈다. 이는 공고한 서열 집단에서 배제될 수 있다는 공포로 이어졌다. 김모씨(20)는 대학 동아리 고학번 선배들이 전통이라며 술을 강권하고 술집에서 동아리 구호 선창을 강요하는 게 싫지만 말하지 못했다. 김씨는 “선배들한테 반발하면 동아리 활동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지 않겠나”라고 했다.

“높은 사람에게는 질문 자체가 어렵다” “자신 있게 얘기하기엔 연차도, 경험도 부족해서” “솔직하게 말하면 예의 없어 보이지 않을까” 같은 토로에선 강요된 서열에 따라 말의 서열조차도 나뉜 일상이 드러났다.

■ 경쟁이 말을 검열한다

말 한마디로 집단에서 열외될 수 있다는 두려움은 경쟁 생태계를 만날 때 더욱 심각해졌다. 입시 관문, 취업 전선, 승진 문턱에서 낙오할 수 있다는 공포가 자리하는 것이다. 실은 침묵하는 잠재적 경쟁자에게 밀릴 수 있다는 걱정이 더 컸다.

영화 촬영장에서 프리랜서로 일하는 김완수씨(45·가명)는 “촉박한 일정, 끼니·추위 등 열악한 환경에 대한 불만을 꺼냈을 때 ‘이 바닥에서 내 입지가 어떻게 될까’ 같은 걱정을 안 할 수 없다”며 “불만을 얘기하지 않는 다른 경쟁자들이 많으니까”라고 했다. 한 사립대학 장학금 관리 업무를 하는 김모씨(43)는 장학금 제도 개선 관련 건의를 여러 차례 했다가 상사에게 “찍혔다”고 했다. 사학의 이익과 어긋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후 김씨는 ‘낙오자가 된 느낌’에 괴로웠다. 인사고과에서 불이익을 당했고 동료들까지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동료들은 김씨에게 ‘어차피 당신은 찍혔다’ ‘잠자코 있는 게 좋지 않으냐’고 대놓고 말하기도 했다.

시민들은 ‘말의 검열’이 함께 풀어야 할 공동체의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설문에서 개인적 해결책으로 보이는 ‘자신의 논리에 대한 확신’을 꼽은 응답자 427명 중 119명(27.9%)은 ‘다름을 인정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69명(16.2)은 ‘문제제기에 법적·제도적 불이익을 묻지 않는 문화’를 함께 꼽았다. 41명(9.6)은 ‘내게 동조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대학생 송모씨(25)는 이미 이 사회가 지닌 말의 검열 논리를 체득하고 있었다. 송씨는 “다수 집단 혹은 침묵하는 사람들과 내가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줘야 생존확률이 높아진다는 절박함”이라고 표현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못 가면 사회적으로 패배자 낙인이 찍히잖아요. 남과 달리 자신의 의견을 내는 사람일수록 불이익을 받아 실패자로 전락할 수 있다는 두려운 마음이 있죠.” 서열과 경쟁 논리가 어떻게 자기검열을 강화시키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특별취재팀

송윤경 김지원 정대연 허남설 고희진 기자

<허남설·고희진·정대연 기자 nshe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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