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목소리다]③"어휴, 여기가 회사야? 군대야?"..정답은 '월급 더 받는 군대'

고희진·허남설·송윤경 기자 2017. 1. 16.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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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ㆍ한국사회 전반에 뿌리 내린 ‘군대식 문화’

일러스트 | 김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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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에 뉴발란스 운동화를 신고 있음.’ 물 위로 떠오른 학생들을 묘사하는 말들이 선박 통신(TRS)을 타고 오갔다. 귀를 막고 싶었다. 밤에는 주황색 조명탄이 검고 차가운 4월 바다를 온통 뒤덮었다. 빨갛게 물들어가는 밤하늘을 보며 세월호 참사 당시 해경 일경 조타수였던 강성민씨(27·가명)는 ‘전쟁이 나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견디기 힘들 만큼 괴로웠지만 슬픈 티도 낼 수 없었다. 텔레비전을 시청하며 유가족을 향해 막말을 하는 선임들을 볼 때는 “머리가 멍해질 만큼 구역질이 느껴졌지만” 그에겐 “채널을 돌릴 권력”조차 없었다. 강씨에게 군대는 “강자에게 불편한 소리를 겁내게 되는 공간”이었다. 그는 군대에서 “겁을 배웠고”, 자신이 “깎여나갔다”고 했다.

■ “여기는 군대 같아서…”

군대는 ‘힘의 세계’다. 인간은 존엄하며 누구나 ‘표현할 권리’를 가진다는 민주주의 원리는 이곳에서만큼은 예외가 되기도 한다. 그런 ‘군대’가 일상을 묘사하는 단어로 시민들 사이에 거론되고 있다.

경향신문은 온라인 설문조사를 통해 시민 1000명에게 ‘윗사람(선생님, 직장 상사 등)이 내린 지시가 부당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 자리에서 거부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과반수 이상이 ‘거부할 수 없다’(54.9%)고 답했다. 이들이 자신의 경험을 설명하며 덧붙인 표현이 있다. 바로 “여기는 군대 같아서…”였다. 이 같은 토로는 공무원, 대기업 사원, 변호사 등 직종을 가리지 않았다.

3년차 변호사인 김지연씨(29·가명)는 “매일같이 자정까지 일해야 하는 삶”에 지쳐 문제를 제기했다가 상사로부터 ‘그러면 변호사 하면 안된다’는 말을 들었다. 진보 색채의 법무법인에서 일하는 그는 “조직 문제에 있어서는 이곳도 결국 똑같다. 군대처럼 무조건적인 복종을 좋아하는 곳”이라고 토로했다. 대기업 영업사원인 김현민씨(29·가명)는 자신의 일터가 “상명하복의 결정체”라고 했다. 김씨는 “고객사나 하청업체를 협박해야만 달성할 수 있는 무리한 목표가 내려왔을 때 ‘아니요’라고 해봤자 바뀔 건 없다. 그냥 따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병원은 군대문화가 강해서 양말 색깔, 머리모양까지 일일이 지적받는다”(34·간호사), “공무원 사회에선 ‘까라면 까’ 식으로 위에서 시키면 다 해야 한다”(58·공무원). ‘군대’ 혹은 ‘까라면 까’처럼 군대문화를 가리키는 표현은 부당한 지시를 군말없이 따라야만 하는 처지를 묘사할 때 주로 쓰였다. 사회학자 오찬호씨는 “한국 사람들이 부당한 상황을 설명함에 있어서 군대라는 단어를 가장 적합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며 “타인을 수평적 존재로 여기지 않고 명령의 하달만이 중요한 사회가 군대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 군대와 사회는 데칼코마니

상명하복과 서열 문화를 겪으며 사람들이 군대를 떠올리는 것은 군대에서 통용되는 원칙과 규제의 언어가 학교·직장 등 사회의 언어와 닮아 있기 때문이다. 군대가 전쟁 영웅을 받드는 것처럼 직장도 회장의 성공담을 통해 공동목표를 강조한다. 지난해 대기업 신입 공채에 합격한 정윤호씨(30·가명)는 신입사원 연수과정에서 창업주의 기업정신을 공부하고 시험까지 치렀다. 정씨는 “창업자 기업정신을 다섯 가지로 나눠 공부하고 한 명씩 답하는 연습을 하기도 했다”며 “교육 담당자가 ‘(직원들이) 똑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데 필요하다’며 가르쳤다”고 전했다. 이 같은 성공담 강조는 주요 대학에 진학한 학생 명단을 플래카드에 적어 교문에 걸어놓는 행위로 변주되기도 한다.

체육대회와 회식, 일과 시간 외 행사를 통한 수시 소집 문화도 군대와 사회가 닮아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조직 목표를 위해 개인은 상시 동원될 수 있는 자원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으로 행사에 불참한 사람에겐 낙오의 감정을 심어주기도 한다. 군대와 학교는 건물 배치 양식도 비슷하다. 군대의 연병장과 연단, 건물의 위치는 학교의 운동장, 조회대, 교실 배치와 유사하다. 연단에 선 사람이 운동장의 군중을, 건물 안 권력자가 연단의 조교를 쉽게 감시할 수 있는 구조로 명령 하달의 효율성을 중요시한 모습이다.

노명우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는 “군사주의가 팽배하던 1960~1970년대 성장한 한국기업이 조직 운영에 있어 군대를 롤모델로 삼았다”며 “군대라는 조직은 특수성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한국은 그 경향이 사회 전반에 과도하게 퍼져 있다”고 지적했다.

■ “불합리를 지적하느니…”

군대는 종종 ‘사회생활의 지혜’를 배우는 곳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회사원 박준우씨(30·가명)는 동료가 상사의 차에 생활용품을 일일이 날라주는 것을 보며 “군대에서 졸병이 선임들 간식을 하나하나 관물대마다 갖다놓아야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상사가 잘못됐다고 느끼지만 그렇다고 반발한 적도 없다. 박씨는 “선임의 불합리함을 지적하느니 그걸 따름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을 취하는 것이 낫다고 배운 곳이 군대”라고 말했다.

한국갤럽은 지난해 9월 성인 남녀 1004명에게 ‘군대 생활이 살아가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를 물었다. 설문조사 결과 ‘도움이 된다’고 응답한 비율은 72%였다. 이처럼 상명하복의 군대식 문화가 삶에 유용했다는 답변은 거꾸로 군대와 사회생활의 유사성을 보여주는 방증으로 읽힌다.

“실컷 맞다가 나중에 속 시원하게 실컷 때리고, 그러면서 조직사회의 원리를 제대로 터득하였다. 이제 시키는 대로 할 줄도 알고 시킬 줄도 안다.” 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가 2000년 발표한 글 ‘인간성을 파괴시키는 한국 군사주의’에 담긴 한 젊은 회사원의 고백이다.

민주화 이후 군대에서 물리적 폭력은 점차 잦아들었다. 그러나 힘의 질서를 내면화하는 ‘부정적 사회화’ 공간으로서 군대의 기능은 여전하다.

독립영화를 찍는 박효선씨(26)는 영화업계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지적할 때면 남자 동료들이 으레 보이는 반응을 떠올렸다. 박씨는 “그들은 어느 순간 어른으로서 조언하는 위치에 서더니 ‘원래 그런 거야’ ‘이래 가지고 사회생활 어떻게 할 거냐’고 한다”며 “강자에 대한 복종을 배운 남성들은 자기가 조금만 참으면 저 자리(강자의 자리)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송윤경 김지원 정대연 허남설 고희진 기자

<고희진·허남설·송윤경 기자 go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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