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로 끌어다 일 시키더니 결혼도 강제로..

박유리 2017. 1. 15.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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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2017 광장의 노래]
2부 우리안의 박정희들④-강요된 낙오의 이름, 배제
깡패·노숙인·성매매 여성 '개척단' 이름씌워 강제이주

[한겨레]

장애인, 성매매 여성, 노숙인. 몸이 성하지 않거나, 몸을 팔거나, 몸은 성한데 노동력으로서의 구실을 못하는 사람들이다. 한국이 비정상의 최전선 범주에 두는 사람들이다. 국가는 줄곧 ‘복지’라는 이름으로 이들을 길에서 치우고는 시설에 가두었다. 자신을 ‘정상’이라 인식하는 다수는 노숙인, 장애인, 성매매 여성을 치우는 것으로 깨끗하고 발전된 사회에 산다는 안도감과 소속감을 갖게 됐다. ‘복지’라는 이름은 정상인들의 죄책감을 덜어줬다.

세계사를 봐도 정통성 없는 정권들은 사회 불안을 취약 계층에 떠넘겼다. 나치 독일은 부랑인, 매춘부, 집시, 알코올 중독자, 전염병·성병 보균자 등을 반사회적 존재로 분류하고 2만명 이상 강제수용소에 가뒀다. 불행하게도 이 조처는 다수의 환영을 받았다.

한국 역사도 별반 다르지 않다. 감금, 살인, 강제노역, 폭행 등으로 1975~1987년 513명이 숨진 형제복지원. 2002~2014년 연속 6회 우수시설로 선정됐음에도 2014년부터 2년8개월간 거주 인원의 10.6%인 129명이 숨져 지난해부터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대구시립희망원(희망원). 그리고 전두환 정권의 삼청교육대.

취약 계층 강제 수용의 한국적 기원을 찾아나선 길의 끝에서 ‘박정희’를 만났다. 1961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노숙인, 깡패, 성매매 여성 수천명을 총으로 위협해 ‘대한청소년개척단’을 만들었다. 이들은 충남 서산군 인지면 모월리 막사에 강제 수용돼 아침부터 밤까지 폐염전을 개간했다. 국가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남녀를 ‘깡패와 창녀의 새 출발’이라는 이름 아래 강제 결혼시켰다. 부산 남포동 건달이었던 정영철(74)씨 등 개척단원 11명은 여전히 모월리에 살고 있다.

박정희 5·16 쿠데타 직후
‘부패와 구악의 일소’ 내세워
수천여명 총으로 위협해 소집

부산 깡패였던 정영철씨
해병대에 붙잡혀 서산으로 이송
자유없이 움막서 단체생활 하며
새벽부터 맨손으로 바닷물 막아
붙잡힌 성매매여성과 강제결혼도

서산 대한청소년개척단만 1700명
강원·경상 등 전국에 비슷한 개척단
‘전두환 삼청교육대 모태’ 만들어

박정희 정권은 사회적 약자를 강제로 끌어다 노동을 시키면서 결혼까지 강제로 시켰다.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제공

# 양아치 히라이 똘만이 윤락여성

“사정없이 퍼붓는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허허한 갯벌을 다지고 있는 800여명의 청소년들의 알찬 함성이 황해의 물결에 메아리치고 있다. ‘양아치’ ‘히라이(부랑인)’ ‘똘만이’ ‘왕초’ ‘폭행치사’를 비롯한 ‘전과 9범’ 등 어마어마한 대명사로 불리는 뒷골목의 왕자(문제아)들과, 사창가를 전전하던 윤락여성들이 지금 한창 지난날의 오명을 씻어버리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서산 해안의 기적을 빚어내고 있다.”(<경향신문> 1963년 7월22일치)

언론은 인지면 모월리 개척지에 강제 수용돼 일하는 풍경을 미화했다. 누구도 불편한 진실을 파헤치려 하지 않았다. 거리에서 치워진 깡패, 노숙인이 사정없이 퍼붓는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새 삶을 시작한다고 믿었다.

“사정없이 퍼붓는 햇살”과 함께, 사정없이 두드려 패는 주먹을 맞고서 정영철씨는 1961년 12월 부산에서 전남 장흥으로 옮겨졌다. 5·16 쿠데타가 일어나고 7개월이 지난 뒤였다.

부산 자갈치시장 옆 완월동 다리 아래 마약쟁이들이 살았다. 다리 옆 ‘하꼬방’이 정씨의 집이었다. 잠을 자는데 탕탕, 총소리가 울려퍼졌다. “손을 올리고 당장 내려오라.” 집 밖으로 나가니 주먹 쓰고, 근본 없고, 돌아다니고, 꺼떡거리는 놈들이 줄줄이 잡혀와 있었다. 똥물이 흘러내리는 다리를 건너는데 해병대원이 허공에 대고 위협사격을 했다. 정씨 앞에 선 사람이 총에 맞아 쓰러졌다. 덜덜 떨려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수십명을 마구 두드려 패더니 버스 두 대에 나눠 실었다. 부산의 수용소에 갇혀 사흘간 지냈다. “개척단에 가면 땅을 주니까 도망갈 생각 마라”고 했다. 창문을 차단한 차를 타고 장흥 수용소에 도착해 2개월을 살았다. 다시 서산으로 넘겨졌다. 62년 2월이었다.

충남 서산시 인지면에 만들어진 희망공원. 일하다 숨진 개척단원들이 이곳에 묻혀 있다. 서산/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옷 입히면 도망가니께, 빨가벗겨서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있는데, 그 추운 물에 잡아넣고 ‘어머니 사랑 정신 보신탕’이라고 쓰인 몽둥이로 마구 때리는 거여.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잘잘못을 떠나서, 정신없게 막. 대가리 숙여 해서….”

한국전쟁 때 고아가 된 그는 부산에서 ‘21세기’‘태풍’ 등 건달 조직에서 활동했다. “깡패가 됐든, 건달이 됐든, 먹고살려고 남의 등을 쳐야 했던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다. 1960년 4·19 당시 폭력으로 서부산경찰서에 잡혀갔다. 시위를 하다 붙잡힌 대학생들이 너무 많아 건물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마당에 수십명이 앉아 있었다. 대학생들에게 물었다.

“공부는 안 하고 여기 와 있노?”

대학생들은 독재 이승만 정권을 타도해야 한다고 했다. 한참 설명을 들으니 대학생들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두드려 부수는 건 내가 전문이니 같이 하자.” 그날 경찰서에서 함께 도망친 대학생들과 일주일간 거리를 헤맸다. “이승만은 물러가라!” 목청껏 외쳤다. 그들처럼 정씨도 대학생이 된 것 같았다. “시민들이 주먹밥 만들어서 주고 그랬다고, 그때는. 물 떠다 주고. 버스 위에 올라가서 태극기 흔들고….”

이듬해 박정희가 5·16 쿠데타를 일으켰다. 군사정권은 명분으로 ‘부패와 구악의 일소’를 내세웠다. 깡패, 불량배, 부정선거 관련자, 부정축재자, 용공분자 등을 사회에서 격리했다. 삼성의 이병철 등 다수의 대기업 사장들도 부정축재로 구금됐다. 그러나 이내 풀려났다. 깡패는 관용의 대상이 아니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자신들의 업적을 처음 정리해서 발표한 <혁명정부 7개월간의 업적>을 보면, 우범지대 단속이 사회 분야의 첫 번째 업적으로 꼽힌다. 1962년 쿠데타 1년의 시정 비판에서 국민들의 이목을 끈 공적으로 ‘사회 전반에 걸친 시정’을 거론하며 ‘소매치기, 부랑아, 강력범의 강력단속과 소년 걸인 등의 수용으로 사회가 질서를 유지해 간다’고 했다. 1961년 말까지 용공분자 3000여명, 폭력배 4000여명을 체포했다. 부랑인 단속 수치를 보면 1962년 9115명, 1963년 1만7025명, 1964년 3만4619명, 1965년 4만5077명, 1966년 4만651명으로 급격히 증가했다. 늘어가는 인원에 대처하기 위해 부랑인들을 모아 작업시키는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5·16 군정기 사회정책’, <역사와 현실>, 김아람)

# 007가방 들고 찾아온 첫번째 아내

발밑으로 바닷물이 들어오는 척박한 땅이었다. 1952년 염전을 만들려 제방만 축조한, 폐염전 263만8884㎡에 던져졌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폐염전에 흙과 돌을 들이부어 바닷물을 막았다. 장비 같은 것도 없었다. 외출도 할 수 없었다. 움막에서 군대처럼 단체생활을 했다. 그들을 감시하는 간부들도 전직 깡패 출신들이었다. 단원들이 ‘인간 철조망’을 이뤄 서로를 감시했다. 10여미터마다 1명이 감시조로 배치돼 도망갈 수도 없었다. 개척단은 61년 11월 68명으로 시작해 63년 712명, 64년 1771명으로 불어났다.

당시 군정은 대한청소년개척단과 비슷한 사업을 전국에서 진행했다. 1961년 5월1일 한국합심자활개척단 단원 200명이 강원도 대관령으로 떠났다. 단장은 ‘거지왕’으로 알려진 김춘삼이다. 보건사회부 장덕승 장관이 직접 걸인과 부랑아를 국토건설 사업에 동원하겠다고 했다. 경남 창원군 북면 외감리의 3만평 황무지 개간도 시작됐다. 15살~20대 남성 30명이 재건소년개척단이라는 이름으로 61년 8월 조직됐다.

작업량에 비해 먹을거리는 턱없이 부족했다. 쌀 5작(1작은 1홉의 10분의 1), 보리 1홉으로 하루를 버텼다. 일하다 죽는 이들은 태극기를 덮어 뒷산에 묻었다. 단장은 민간인 민아무개씨였지만, 정부 주도 아래 이뤄진 사업이었다.

“개척단 1주년인가, 2주년인 11월14일에 기념행사를 하는데, 경찰서장이 왔어. 개척단 단장하고 귀빈석에 둘이 앉았는데 친구같이 굴더라고. 저것들 패서 죽였으면 했어.”

정부는 이들을 서산에 정착시키려 강제 결혼을 시켰다. 전국 부녀보호소에 잡혀온 성매매 여성을 서산에 이주시켰다. 처음 보는 남녀가 강제 부부를 이뤘다. 1963년 9월26일에 이어 이듬해 11월24일에도 225쌍의 합동결혼식이 서울 광진구 워커힐호텔에서 열렸다. 모월리 간척지에서 서울로 가려면 대형 버스를 타야 했는데 버스가 지나갈 만한 도로가 없었다. 개척단원들은 자신들의 결혼식을 위해 직접 길을 닦았다. 그곳에 정씨도 포함됐다. 윤치영 당시 서울시장이 합동결혼식에 참석했다.

하얀옷 입은 여성들이 신부, 검은 옷 입은 남성들이 신랑이다. 그 옆에 군복 같은 것을 입고 있는 사내들은 다른 개척단원들이다.

“처음 보는 여자와 정 같은 게 어딨어? 그 여자들도 여기서 자유가 없다고. 먼지 폴폴 날리는데 흙 날라야 하고 여기 있어봤자 뭐 하겠어. 고생만 하지. 몇 개월 살다가 여자가 임신을 했어. 너 여기 있어봐야 고생하니까 가라고 했어. 임신한 여자한테는 외출증을 끊어주니까. 아이는 고아원에 맡기든지 하라고. 그 여자, 가버렸어. 다시는 안 오나 보다 했지.”

정확한 연도는 기억나지 않지만 1965~1966년 사이 개척단에도 ‘민주화’가 일어났다.

“이렇게는 못 살겠다, 우리가 막 덤볐어. 우리도 민주주의로 살자, 자유를 달라고. 내가 그때 소대장이었는데 친구들하고 몇 명이 뭉쳤고, 앞장을 섰어. 윗사람들이 나를 단본부(사무동) 안으로 끌고 들어갔어. 밖에 있던 (개척)단원들이 와 하고 함성 지르고 일어난 거야. 사람 죽이지 말라고 난리난 거지. 내가 몇 대 맞기는 했어. 그날서부터 중간간부들 중에서도 내 편 들어주는 사람이 있었다고. 밤에 간부들끼리 싸우고 난리가 나. 자기들도 개척단 출신이니까 서로 의견이 엇갈렸겠지. 간부들 몇십명이 밤에 도망을 갔어. 맞아 죽게 생겼으니까. 점잖은 것들만 남고.”

강제수용 생활은 와해됐다. 자고 일어나면 몇십명씩 사라졌다. 1700여명 가운데 수백명만 남았다. 개척단이라는 이름은 있었지만, 계급이나 감시는 사라졌다. 정씨는 도망치지 않고 간척지에 남기로 했다.

“내가 배운 게 뭐가 있어? 하는 거라곤 개간해서 농사짓는 것밖에 없는데. 밖에 나가서 살 자신이 없었어. 그리고 땅 준다고 했으니까, 땅도 받아야 했어.”

공식적으로는 1966년 9월1일 개척단이 해체됐다. 1968년 1월 1세대당 토지 3000평 가분배에 합의했다. 1968~71년 5차례에 걸쳐 335세대에 가분배됐다. 권리금을 받고 땅을 팔아 도시로 나간 사람들도 117세대나 됐다. 정씨는 1970년 이웃 동네에 살던 시골 아가씨와 연애를 했다. 아내 될 사람 배 속에 아이가 들어섰다. 결혼을 앞둔 때, 사라졌던 과거 아내가 007가방을 들고 찾아왔다. 일곱살 된 아들과 함께였다. 첫번째 아내는 007가방 열어 보였다. 돈이 한가득이었다. 이제 자신과 함께 모월리를 떠나 살자고 했다. 정씨는 한사코 거절했다. 과거 아내는 읍에 나가 사진 한 장만 같이 찍어 달라는 마지막 부탁을 했다. 첫번째 아내가 떠나고 한참 뒤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이 우편으로 도착했다. 그 뒤로 소식이 끊겼다. “지금도 아주 가끔 생각이 나지. 소식이 없는 것으로 미뤄 외국에 나간 것 같어.”

사회와 격리시킨 채 서산 폐염전에 가둔 박정희 정권

개척단 합숙소로 쓰였던 구옥. 처음엔 아무것도 없어 움막을 짓고 살았다. 서산/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 내가 개간한 땅을 돈 주고 사라니…

최순실·박근혜 게이트가 한창이던 지난해 12월 어느 날, 정씨는 수확한 쌀을 팔러 서울에 갔다. 3000평에 1년 꼬박 쌀농사를 지으면 65~70가마니를 수확한다. 80㎏ 쌀 한가마니 값은 약 10만원. 이것저것 제하고 손에 떨어지는 금액은 300만~400만원이다. 시골에선 돈 쓸 일이 없으니 몇 년 전까진 먹고살 만했다. 그러나 지난해는 빚을 갚으려 키우던 소 두마리를 팔았다. 1년에 약 800만원을 정부에 내야 하기 때문이다. 정씨는 2013년 과거 자신이 개간한 땅 3000평을 20년 상환 조건으로 샀다. 평당 5만원으로 시세와 비슷했다.

“서울 가는 길에 항의 팻말이라도 들자 싶어서 국회에 갔어. 어느 날인지는 기억하지 못하는데 국회 앞에, 박근혜 나가라는 사람이 너무 많은 거야. 광화문에도 경찰이 쫙 깔리고. 사람이 너무 많아 포기했어. 서산으로 내려온 다음날인가 촛불집회가 시작되더만.”

정씨처럼 1968년 당시 땅을 가분배받은 주민들은 22년의 탄원과 5년에 걸친 정부와의 소송에서 패소했다. 68년부터 순차적으로 개척단원들에게 땅을 주면서 국가는 ‘가분배’라는 용어를 썼다. 국가는 영장도 없이 전국 각지에서 잡혀 들어와 이 땅을 개간한 노동력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반면 비슷한 시기 전남 장흥에서 땅을 개척한 단원들은 무상 분배를 받았다. “개척하면 땅을 준다고 했다”는 정씨 주장을 뒷받침한다. 1968년 7월23일 ‘자활지도 사업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따르면, 대통령이 정하는 바에 의해 ‘근로구호의 대상자에게 우선적으로 무상 분배할 수 있다’고 돼 있다. 그러나 시행령 미제정으로 82년 12월 이 법은 폐지됐다. 서산시도 1969, 1970년 두차례에 걸쳐 홍성세무서에 무상 불하 또는 무상 대부를 건의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1992년 국무회의는 유상 매각을 결정했다. 기획재정부는 그해 국유재산 관리계획에 따라 신청인들에게 매각하기로 결정하고 매수를 촉구했으나 신청인들 대다수가 불응했다. 소송으로 전환했다. 2002년 대법원까지 이어졌지만 정씨 등은 패소했다.

1966년 개척단에도 저항의 바람
“우리가 막 덤볐어, 자유 달라고”
개척단 9월에 공식적으로 해체

68년 땅 가분배 받은 주민들
서산은 무상 불하대상서 빠져
20여년간 탄원과 소송에도 패소
납치·감금에 대한 피해보상과
강제노역 인건비조차 받지 못해

“박정희 정권은 깡패지 뭐여
내 젊은 시절 그렇게 뺏겼는데”
정씨, 간척땅 바라보면 눈물만

개척단으로 토지개간사업에 강제동원됐던 정영철씨가 11일 오전 충남 서산시 인지면 모월리의 자신이 개간한 논에서 개간 당시 척박했던 삶에 대해 토로하고 있다. 서산/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주민 김아무개씨가 2010년 국민권익위원회에서 청원을 넣어 소위원회 심의가 열렸다. 기획재정부는 무상 불하해줄 수 없다고 했다. 서산시와 충남도 의견은 달랐다. “민원인들이 폐염전 부지였던 땅을 개간하여 우량 농지로 조성하였기에, 무상 양여가 되도록 특별법을 제정하거나, 요구를 수용할 수 없을 경우 개량비를 공제하여 매각할 수 있도록 승인해 달라”는 것. 2013년 주민들은 10~20년 상환 조건으로 평당 5만원에 땅을 매입하라는 정부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주변 시세와 비슷했다. 납치, 강제 감금에 따른 피해 보상, 강제 노역에 따른 인건비조차 인정받지 못했다.

건달이었던 정씨에게 박정희 정권이 어떤 존재인지 물었다. “깡패지, 뭐여. 내 젊은 시절 다 그렇게 뺏겼는데.”

정씨는 요즘 자신을 탓한다고 했다. 끊었던 담배가 간절하다. “농사꾼이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내 땅을 포기할 수도 없어서 정부 땅을 결국 산 거여. 근데 농사지어도 빚을 지고. 부산에 살면서 깡패 생활할 때 참 몹쓸 짓을 많이 했어. 내가 살아온 것을 다 쓰자면 비참하고 사람들이 곧이듣지 않을 거여. 우리 마누라 교회 집사인데 나는 교회 안 가. 죄 많은 놈이라. 내가 죄가 많아서, 그 죄를 내가 지금 이렇게 받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어.”

# 2017 ‘정글’의 기원, 1961 ‘명랑사회’

“우리 정부가 주로 대재벌이나 대기업만 키우고 중소기업 같은 것은 전연 돌보지 않는다, 공업에만 치중한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 우리나라의 가장 뒤떨어진 농촌을 빨리 발전을 시켜야 되겠다, 이것이 정부가 말하는 중농정책입니다.”

1967년 4월17일 박정희 공화당 대통령 후보는 대전 연설에서 농촌 진흥을 통해 양극화를 해소하겠다고 밝혔다. 땅값이 폭등하고 대한민국 최초의 양극화가 벌어지던 시대였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양극화가 시작됐다고 생각하지만, 그 기원은 대기업, 서울, 강남 중심으로 개발이 이뤄지던 박정희 시대에서 찾을 수 있다.

급속한 성장 시대에 농촌은 급속히 위축됐다. 1956~81년 전체 산업이 연평균 7.4% 성장한 반면 농업은 3.1% 성장에 그쳤다. 전체 인구는 1.9배로 커졌지만 농업 인구는 25% 줄어들었다. 급속한 인구 성장의 시대였음에도 농촌은 사람들이 떠나는 공간이었다. 급속히 비워진 농촌에 대한민국 3등 국민, 전직 깡패 정영철씨가 1961년 강제 이주됐다. 그는 지금껏 연 소득 300만~400만원의 농민으로 산다.

건달, 성매매 여성, 노숙인에서 시작된 ‘배제 국민’은 농촌, 청년, 저소득, 비정규직 등으로 확대됐다. 그들을 길에서 치워야 ‘명랑사회’가 도래한다는 1961년 첫 단추를 줄줄이 끼우다 2017년 지금, 여기에 도착했다. 누구나 배제 국민이 될 수 있는 정글에.

서산/박유리 기자 nopimul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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