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고문사' 밝힌 검사와 의사, 30년 만에 만났다

김종철 입력 2017. 1. 13. 21:36 수정 2017. 1. 13.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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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
박종철 30주기, 최환과 황적준

[한겨레]

박종철이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한 지 30주기를 맞아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장이었던 최환 변호사(오른쪽)와 당시 부검의였던 황적준 박사(왼쪽)가 서울 용산구 갈월동 박종철기념관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30년 전인 1987년 1월14일, 21살 꽃다운 나이의 대학생이 경찰에서 수사받다가 숨졌다. 숱한 의문이 제기됐지만,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고 발표했다. 쇼크사로 위장해서 덮으려던 경찰의 의도는 권력과 상부의 압박에 굽히지 않은 한 검사와 부검의에 의해 꺾였다. 물고문으로 숨졌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불의한 정권에 대한 시민의 저항이 불붙기 시작해, 6월29일 마침내 권력을 무릎 꿇리고 민주화를 이뤄냈다. 세계사에 유례가 드문 시민 승리였다. 그때 검사가 한밤중의 시신 화장을 허락했다면, 부검의가 경찰 요구대로 심장 쇼크사로 사인을 바꿔줬더라면 역사가 어떻게 진행됐을까. 민주주의는 더디게 왔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더 많은 피를 흘려야 했을지도 모른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30주기를 맞아, 공직자가 자기 위치에서 원칙을 지키고 양심을 따를 때 사회 발전이 이뤄진다는 교훈을 새겨본다. 30년 전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장이었던 최환 변호사(오른쪽)와 당시 부검의였던 황적준 고려대 의대 명예교수(왼쪽)가 서울 용산구 갈월동 박종철기념관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검사 양심과 의사 직업윤리를 따랐을 뿐이죠”

“반갑습니다. 최환입니다.”

“진작부터 뵙고 싶었습니다. 황적준입니다.”

지난 10일 오후 서울 용산구 남영동의 경찰청 인권센터 앞마당에서 만난 두 사람은 오랜 친구처럼 손을 맞잡고 반가워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이곳에 올 때마다 마음이 무겁고 애통합니다. 공권력이 박종철을 살해한 거잖아요. 당시 공직자의 한 사람으로서 사전에 그의 죽음을 막지 못해서 부끄럽기도 하고요.”

4층에 마련된 박종철기념관을 둘러보던 최환(73) 변호사가 말문을 열었다. 외투를 벗은 그의 목에는 검은 넥타이가 단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박종철은 우리 역사의 증인이죠. 비극적 증인 말입니다. 그가 억울하게 숨진 이곳을 교육현장으로 남겨서 후세에게 잘 알려주어야 할 거 같아요.”

이곳을 처음 찾았다는 황적준(70) 명예교수가 화답했다.

박종철 30주기를 맞아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장이었던 최환 변호사(오른쪽)와 당시 부검의였던 황적준 박사(왼쪽)가 서울 용산구 갈월동 박종철기념관에서 당시 박종철 열사가 고문 치사당한 취조실 욕조 앞 박 열사의 영정 사진 앞에 묵념을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앞서 두 사람은 서울대생 박종철(당시 나이 21·언어학과 3학년)이 1987년 1월14일 경찰의 물고문으로 숨진 건물 5층의 9호실에 들렀다. 3평 정도의 작은 방은 물고문에 사용됐던 욕조를 비롯해 세면대와 변기, 작은 책상과 의자, 간이 침대 등 30년 전 당시 모습대로 보존돼 있다. 세면대 위 벽에 걸린 박종철의 영정에 두 사람은 오랫동안 고개 숙여 묵념했다.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합니다.

최환(최)“1999년 부산고검 검사장을 그만둔 뒤에 개인 변호사 사무실을 열어 지금도 매일 출근하고 있어요. 일할 수 있다는 게 행복하지요.”

최 변호사는 원래 대표적인 공안통 출신으로, 서울지검 공안부장과 대검 공안부장을 지냈다. 1985년 민정당 연수원을 점거한 대학생 119명 전원의 구속을 주도하는 등 1980~90년대 민주화운동을 하던 대학생 및 재야인사들을 탄압하는 역할을 주로 했다. 그가 박종철 치사사건의 진실이 밝혀지는 데 밑거름이 된 건 묘한 운명이다. 그는 문민정부 이후에는 정의파 공안통으로 활약했다. 서울지검장 시절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했으며,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사건(1987년·용팔이 사건)의 정치적 배후를 끈질기게 파헤쳐 장세동 전 안기부장도 구속시켰다.

박종철 30주기를 맞아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의 황적준 박사와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장 최환 변호사가 서울 용산구 갈월동 박종철기념관에서 대담을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공안부장이 안 봐주면 누가 봐주나”라고 항의

황적준(황)“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으면서 보내고 있습니다. 간서치가 됐어요.”

황 명예교수는 1988년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를 관둔 뒤 이듬해부터 모교인 고려대 의대 교수로 일했다. 고려대 법의학연구소장과 의대 학장 등을 지낸 뒤 2013년 정년 퇴임했다.

1987년의 민주화는 박종철의 희생에서 싹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월 그의 죽음이 도화선이 돼 시민들의 민주항쟁이 시작됐다. 그 과정에서 6월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의 희생이 더해지면서 결국 시민들이 승리했다. 하지만 박종철의 죽음은 자칫 그냥 묻힐 수도 있었다. 억울한 죽음으로 끝나지 않도록 진상규명의 첫 단추를 끼운 사람이 바로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장으로 있던 최 변호사였다.

“그날 당직 검사가 퇴근한 뒤인 저녁 7시40분쯤이었어요. 당직이 없으니 사무실에 있던 저한테 치안본부(경찰청의 옛 이름)의 대공 수사관 2명이 찾아왔어요. 이들은 A4 용지 2장짜리 ‘변사사건 발생보고 및 지휘품신서’를 들이밀고는 ‘수사받다가 학생 한 명이 죽었는데 화장 처리를 하려고 하니 허락해달라’는 거예요. 직감적으로 고문받다가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젊은 사람이 갑자기 죽을 리가 없잖아요. 그래 놓고는 이 사람들이 증거를 없애려는구나 짐작했지요. 그러나 속생각은 묻어놓고 ‘고문한 것 아니냐’고 떠봤더니 예상대로 ‘절대 아니다’라고 펄쩍 뛰더군요. 그래서 고문을 안 했으면 아무 문제 없는 것 아니냐, 내일 아침에 정식으로 변사 사건으로 처리할 테니 내일 오라고 했지요.”

-그들이 순순히 돌아갔을 것 같지 않은데요?

서울지검 공안부장 최환
국과수 부검의 황적준
박종철 진상규명의 밑거름
87년 6월항쟁의 뿌리 역할

연행해온 서울대생 박종철
경찰 물고문 도중 숨지자
심장 쇼크사로 은폐 시도
검사·의사 직업양심에 막혀

“2시간 동안 매달리더군요. 부모도 동의를 했는데 화장을 왜 허락하지 않느냐고 떼를 씁디다. 내가 그랬죠. 당신들도 아이들이 있을 텐데 입장 바꿔놓고 생각해봐라, 서울로 유학 보낸 아들이 하루아침에 숨졌는데 어느 부모가 자식 얼굴도 안 본 채 화장해도 좋다고 하겠느냐고 말했죠. 그랬더니 고개를 떨구더군요. 이들을 보내놓고 혹시 싶어서 시신 보존 명령을 내렸죠.”

경찰은 14일 오전 10시40분쯤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9호실에서 박종철에게 학교 선배인 박종운(54·전 한나라당 부천·오정 당협위원장)의 소재지를 밝힐 것을 요구하면서 물고문을 시작했다. 박종철의 옷을 모두 벗기고는 손과 발을 수건으로 묶었다. 이어 그의 왼쪽 팔과 어깨는 황정웅, 오른쪽은 반금곤, 다리는 이정호가 각각 잡았다. 박종철이 꼼짝 못하게 된 상황에서 강진규가 그의 머리를 욕조에 수차례 담갔다. 이 상황을 조한경이 현장에서 지휘했다. 물고문 도중 11시쯤 박종철은 욕조 턱에 목이 눌려 숨졌다. 그러나 경찰은 그가 수사받다가 갑자기 졸도해서 사망한 것으로 사건을 꾸미기로 했다. 축소 조작에는 치안감인 5처장 박처원 등 경찰 고위층도 가담했다. 조작이 성공하려면 시신부터 없애야 했다. 대공 수사관 2명이 밤늦게 검찰에 나타난 것은 이를 위해서였다.

1987년 5월18일 오후 6시30분 서울 명동성당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주최로 열린 ‘광주민중항쟁 7주기 미사’에서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군 고문치사 경관 3명이 더 있다’는 성명서를 낭독하고 있다. 6월항쟁에 기름을 부은 순간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경찰은 공안부장이 내용을 자세히 캐지 않고 모른 척 눈감아줄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 같습니다.

“경찰관 2명이 그러더군요. 우리가 열심히 업무를 하다가 생긴 일인데 공안부장이 우리를 안 봐주면 누가 봐주느냐고 말입니다. 그들은 화장장 직원이 대기 중이라면서 서명을 재촉했어요. 경찰은 화장만 하면 이 사건은 숱한 의문사 중의 하나로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학생운동을 주로 담당하던 검찰 공안부장이 왜 경찰에 협조하기를 한사코 거부했나요?

“저는 이번 기회에 고문이라는 악행은 뿌리뽑아야겠다고 속으로 결심했어요. 부천경찰서의 문귀동 성고문 사건(1986년)과 김근태 전기고문 사건(1986년)에도 불구하고 고문 풍토가 여전했거든요. 앞으로는 경찰에서든 검찰에서든 국민들이 고문으로 목숨 잃는 일은 이제 끝내게 하겠다고 다짐했어요. 또 88년 올림픽을 앞둔 상황에서 이런 일을 눈감고 지나가면 전세계가 우리나라를 얼마나 야만적인 국가로 평가하겠느냐는 걱정도 있었고요. 아무리 공안부장이지만 후배 대학생의 억울한 죽음을 덮고 넘어가는 것은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어요.”

경찰 발목잡은 부검장의 메모

이튿날 15일에도 고비가 많았다. 경찰은 막강한 파워를 이용해 여전히 사건을 덮으려 했다. 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경찰의 힘이 검찰보다 더 셌다. 검찰 지휘부가 최환 공안부장의 부검 결정에 동의한 배경에는 경찰의 독주에 제동을 걸겠다는 검찰의 셈법도 있었다. 검찰이 부검 영장을 법원으로부터 받아냈지만, 경찰은 오후 5시가 넘도록 시신 인도를 거부했다.

-부검을 하지 말라는 압력이 당시 무척 강했을 텐데요.

“누구라고 얘기는 할 수 없지만, 여러 사람한테 회유와 압박을 받았지요. 물론 청와대에서도 전화가 왔고요. 이들은 저한테 법대 출신이 아닌(서울대 정치학과) 놈을 공안부장에 앉힌 것은 시키는 대로 하라는 건데 그렇게 고집부리면 사표는 물론이고 신변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협박까지 했어요. 상관이던 서울지검장(정구영)이 제 편을 들어줘서 큰 힘이 됐지요.”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직접 전화해서 부검을 하지 말라고 했지요?

“강민창과 전화로 1시간 이상을 다퉜어요. 그는 경찰병원 의사들도 쇼크사라고 하는데 왜 굳이 부검을 하려고 하느냐, 이렇게 하면 경찰이 앞으로 일을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시신을 절대로 안 내주겠다고 말했어요. 그가 무력으로라도 부검을 막겠다고 하길래 저는 시신을 인도하지 않으면 특수공무집행방해 현행범으로 당신을 체포하러 가겠다고 강하게 얘기했어요. 그랬더니 마지못해 동의하더군요. 하지만 부검을 하더라도 경찰병원에서 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입디다. 그래서 제가 그랬지요. 경찰 수사 과정에서 죽었는데 경찰병원에서 경찰 소속 의사들이 부검을 하면 그 결과를 국민들이 믿겠느냐면서 민간병원에서 해야 한다고 설득했지요. 결국 한양대병원에서 하기로 겨우 타협이 됐어요.”

박종철 30주기, 서울 용산구 갈월동 ‘남영동 대공분실' 5층 9호 취조실. 1987년 1월14일 오전 이곳에서 조사를 받던 서울대 학생 박종철군이 물고문에 사망했다. 현재는 박종철기념관으로 바뀌어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최환은 경찰의 태도를 봐서는 부검 결과를 조작하려 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앞서 경찰은 15일 오후 3시 “심문 도중에 수사관이 책상을 탁 치니 박군이 억 하고 죽었다”며 심장 쇼크사 주장을 공식 브리핑에서 밝혔다. 최환은 경찰이 부검 결과도 이런 논리에 맞출 것을 우려했다. 당시의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경찰의 입김에 놀아나기 일쑤여서 믿을 수가 없었다. 이에 최환은 한양대병원장한테 전화를 걸어 한양대병원 의사 한 명(박동호)을 부검에 동참하게 조치하고, 가족 한 명(박종철의 삼촌 박월길)도 참관하게 했다. 부검을 현장에서 지휘하게 될 안상수 검사에게는 또 하나의 안전장치를 마련하도록 주문했다. 즉, 부검에 관한 내용을 상세하게 수첩에 메모할 것이며, 끝난 뒤에는 부검 의사들의 서명을 반드시 받도록 지시했다. 이렇게 긴 실랑이 뒤에야 부검은 15일 밤 8시쯤 국과수의 부검의인 황적준 법의1과장의 집도로 시작됐다. 14일 밤부터 15일 밤 8시까지 만 하루는 부검을 관철한 최환의 시간이었다면 이제부터는 부검의 진실을 밝히는 황적준의 시간이다.

-국과수에서는 부검을 언제 준비했는지요?

“그날 부검은 제 차례가 아니었어요. 오후 4시반쯤이었는데 치안본부에서 급하게 부검팀을 만들라고 국과수로 연락이 왔어요. 4시 퇴근버스가 떠난 뒤여서 사무실에는 집도의가 저밖에 없었어요. 저는 공부를 하거나 뒷정리를 하느라고 보통 퇴근이 늦었어요. 그래서 제가 맡게 됐지요. 먼저 서대문 치안본부로 데리고 가더니 강민창 본부장과 박처원 처장을 만나게 하더군요. 경찰 고위층이 국과수의 일개 과장을 직접 만나는 것으로 봐서 무척 중요한 사안이구나고 짐작했지요.”

“말이 바뀌지 않아야 합니다”

-그때 부검 결과를 어떻게 하라는 요구는 없었나요?

“그때는 그런 요구는 없었어요. 심문받다가 학생이 숨졌다고 박 처장이 얘기했어요. 경찰병원에서 부검을 한다길래 거기 가서 기다렸지요. 그러다가 장소가 한양대병원으로 바뀌었고, 거기서 부검에 들어갔지요. 그때까지는 검찰과 경찰 간에 부검을 둘러싸고 실랑이가 있었는지 전혀 몰랐어요.”

-부검은 순조로웠습니까?

“시신을 보고는 처음에는 속으로 무척 당황했어요. 겉모습이 너무 깨끗했거든요. 그래서 이거 정말 급성 심장마비로 숨졌을지도 모르겠구나 싶었어요. 외부로는 고문 흔적이 전혀 없었어요. 심장 쇼크사는 부검을 해도 사인을 밝히기가 힘든데 그럴 경우 국민들이 믿겠는가 싶어서 걱정이 됐습니다. 그런데 몸을 열고는 마음이 오히려 편안해졌습니다. 목과 가슴 부근에 난 피멍을 보고는 원인을 밝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다음부터는 있는 그대로 임했지요.”

부검이 끝난 뒤 황적준은 현장에서 안상수 검사에게 자세하게 설명하면서 사인에 대해 “경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목이 욕조 턱에 눌려 숨 막혀 죽음)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저도 치안본부에 가서 설명을 해야 할 텐데 안 검사도 검찰청에 가서 사실대로 보고하세요. 말이 바뀌지 않아야 합니다”고 다짐을 받으면서 안 검사의 수첩 메모에 서명했다. 부검에 동석했던 한양대병원 의사 박동호도 서명했다. 의사 2명이 서명한 이 메모는 나중에 경찰의 사인 조작을 막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부검이 끝나자마자 경찰은 황적준 과장을 박처원 치안감의 차에 태우고 치안본부장실로 데려갔다. 황적준은 사실대로 부검 소견서를 적어냈지만, 경찰 수뇌부는 경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라는 부검의의 문서를 거듭 퇴짜놓았다. 그래도 황적준이 소신을 굽히지 않자, 경찰은 분석에 시간이 걸리는 최종적인 부검 결과 발표는 며칠 뒤로 미룰 테니 우선 시신에 대한 외부 소견만 적어내라고 요구했다.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결국 16일 기자회견에서 “외표상으로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고 발표했다.

-그후 경찰의 압박이 더 심하지 않았는지요?

“그랬어요. 16일 오후 내내 시달렸어요. 강민창 본부장과 박처원 5처장 등 경찰 간부들이 저한테 공식 부검서에는 심장 쇼크사로 적으라고 압박했지요. 저는 질식사라는 것을 검찰에서 이미 적어 갔기 때문에 거짓말할 수가 없다고 버텼지요. 그래도 이들은 막무가내였어요. 강 본부장은 국과수 소장한테 둘이 목욕이나 하라면서 100만원이 든 봉투를 건넸어요. 문을 나가는 저한테 ‘당신 은혜는 잊지 않겠다’고 말하더군요. 저녁 먹는 자리에까지 치안본부장의 한 참모가 와서 정권이 무너질 수 있다면서 또 쇼크사로 하자고 요구하더군요.”

16일 밤늦게 귀가한 황적준은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밤을 새우다시피 한 그는 17일 아침 아이들을 스케이트장에 데려다 주면서 아내에게 “정의의 편에 서서 감정서를 작성하겠다”고 자신의 결심을 밝혔다. 그날 오후에 만난 형도 그의 고민을 듣고는 “사실대로 알리는 것이 좋겠다”고 격려해줬다. 그는 마침내 18일 새벽 신길동의 경찰 특수수사대에서 “사실대로” 부검서를 적었다.

-사실대로 적겠다고 결심한 계기나 동기가 있었습니까?

“의사로서의 양심이자 직업윤리였던 거 같아요. 학교에서 공부할 때 스승(고려대 문국진 교수)이 늘 그랬지요. 부검 잘못해서 사인을 틀리게 하면 부검의를 그만둬야 한다고 말입니다. 또 언젠가는 학교로 돌아가겠다는 계획이 있었는데, 명백한 사실을 바꾸는 불명예스런 일을 해서는 학생들을 가르칠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박종철이 1987년 숨진 서울 용산구 갈월동의 옛 ‘남영동 대공분실'. 현재는 박종철기념관으로 바뀌어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건물로 가늘고 긴 세로 창(밖이 보이지 않도록)이 있는 5층에 10여개의 취조실이 있으며, 건물 내부에는 달팽이관처럼 생긴 철제 계단이 있어 이 계단을 따라 1층부터 5층까지 올라가도록 만들어져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6·10 국민대회’ 전날 쓰러진 이한열

“심적 고통이 많았을 겁니다. 저한테도 그때 압박이 심했어요. 관계기관대책회의에 참석하면 참석자들이 의사도 아닌 당신이 뭘 안다고 자꾸 고문에 의한 질식사라고 얘기하느냐, 그렇게 되면 정권이 흔들린다면서 쇼크사로 가자고 주장했거든요. 강민창씨도 거기 대책회의 멤버였어요. 아마 그때 황 박사가 쇼크사라는 상부의 요구에 굴복했으면 검찰에도 거기에 맞추라고 틀림없이 요구했을 겁니다. 압박에 굴하지 않고 결정적인 버티기를 해준 황 박사님이 참 고맙습니다.”

“저보다 최 변호사님께서 처음부터 원칙을 지켜주셨기에 진상이 밝혀질 수 있었죠. 사람들이 안상수 검사가 박종철 사건을 다 한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데 최 변호사님이 시신 훼손을 막고 부검을 관철하셨기에 그 이후 모든 게 가능했죠.”

황적준의 양심에 가로막힌 경찰은 이번에는 사건 축소에 나섰다. 5명 중 조한경과 강진규 2명이 뒤집어쓰고 끝내는 것으로 조작했다. 18일 오전 박처원 처장은 이들 2명을 만나 “대공요원은 사상전이나 접선공작 중에 총에 맞아 죽기도 한다. 다른 관련자가 더 있다 해도 다른 대공요원을 희생시키지 말고 둘이서 책임지고 가라”고 말했다. 대신 경찰은 이들 2명에게 조기 석방과 남은 가족들을 돌보겠다는 약속을 했다. 박처원은 그 뒤 이들에게 각각 1억원씩 든 예금통장을 건네기도 했다.

실제로 고문을 하고도 범인인 경찰을 제대로 처벌하지 않았던 선례도 있었다. 1983년 경찰의 고문 수사로 인해 숨진 한일합섬 김근조 이사 사건 때 경찰은 자체 수사를 통해 경찰관 2명을 구속했지만, 그들은 얼마 안 가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박종철 사건과 관련해서도 경찰은 이미 정권 차원의 관계기관대책회의에서 자체 수사를 약속받았다. 이를 토대로 2명에게 뒤는 알아서 봐줄 테니 여론이 잠잠해질 때까지 잠깐만 교도소에 들어가 있으라는 주문이었던 셈이다.

처음에는 계획대로 되는 듯했다. 부검을 관철했던 최환을 배제한 검찰 수사팀(서울지검 형사2부 신창언, 안상수, 박상옥)은 경찰이 짜놓은 각본대로만 움직였다. 2명뿐이 아닐 것이라는 의문이 제기됐지만, 검찰은 새로운 사실은 하나도 밝혀내지 못했다. 심지어 고문 경찰관들을 현장 검증에 부르지도 못한 채 조작된 범인 2명을 구속 4일 만에 급하게 기소하고 마무리했다. 하지만 조작의 진상은 약 4개월 뒤인 5월18일에 드러난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김승훈 신부는 명동성당에서 열린 5·18 7주년 추도 미사에서 △박종철 사건의 범인은 조작됐으며 △물고문을 행한 진범은 구속된 조한경, 강진규가 아니라 황정웅, 반금곤, 이정호 3명이라는 폭발적인 내용을 폭로했다. 이로 인해 재수사가 이뤄져 고문 경찰 3명이 더 구속됐다. 또 조작을 주도한 박처원 치안감과 유정방 경정, 박원택 경정 등 경찰 간부 3명은 범인도피죄로 구속 수감됐다.

1987년 2월7일 각계 인사 6만명이 준비위원으로 참여한 ‘박종철군 추모대회’가 전국에서 동시에 열렸다. 사진은 서울 추모대회 뒤 시위대가 명동성당으로 진입하려고 경찰과 맞서고 있는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정의구현사제단의 폭로는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그동안 산발적이고 개별적으로 이뤄지던 반정부 시위는 시민단체와 야당이 주축이 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중심으로 조직적이고 전국적으로 이뤄졌다. 6월10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열린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는 6월항쟁의 출발점이 됐다. 이 6·10 국민대회를 앞두고 각 대학은 학교별로 가두 진출 투쟁을 벌였다. 6월9일 연세대 정문에서 벌어진 학생들의 시위도 그중 하나였다. 이날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 이한열(20)이 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다.(7월5일 사망) 박종철에 이은 이한열의 희생은 결국 6월29일 집권세력의 항복선언을 끌어냈다.

박종철의 죽음을 덮고 조작했던 경찰 총수 강민창은 1987년 교묘하게 처벌을 피했지만, 결국 황적준이 친 ‘정의의 그물’은 빠져나가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유일한 ‘야당지’로서 명성이 높았던 <동아일보>는 박종철 1주기를 맞은 1988년 1월 초 부검의였던 황적준 국과수 과장을 인터뷰했다. 황적준은 기억이 모호한 부분은 자신의 일기장을 들춰가면서 사실대로 말했다. 인터뷰가 끝나자, 기자는 일기장을 복사해달라고 요청했다. 꺼릴 게 없었던 황적준은 사적인 부분을 빼고 복사해줬다. 일기에는 1987년 1월15일 오후 치안본부에 불려갔을 때 강민창 본부장이 “박군의 사체에 외상이 없고, 3~4회 욕조에 담갔으니 익사일 것”이라고 말한 내용 등이 그대로 적혀 있었다. 또 부검 뒤에는 사인을 쇼크사로 기재하라고 회유한 내용도 들어 있었다.

-일기장 공개로 인한 파장을 예상하지 못했나요?

“솔직히 개인 일기가 무슨 중요한 증거가 될 것이라고는 인식하지 못했어요. 일기장 내용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보도가 되자, 국과수와 경찰에서 난리가 났지요. 조직원이 조직을 배반했다는 비난이 쏟아졌고요. 그때는 정말로 고통이 컸습니다. 그날로 당장 사표를 냈습니다.”

경찰, 고문 물증 없애려
한밤중 시신 화장 추진
부검 거부하는 경찰 총수에
최환, “현행범 체포” 압박도

부검 이후엔 황적준을 회유
“고문사망 땐 정권 무너진다”며
쇼크사로 소견서 작성 요구
황, “정의편에 서겠다” 고수

사진으로 남아 있는 박종철의 생전 마지막 모습. 숨지기 일주일 전쯤 하숙집 친구들과 경기도 일산 백마의 한 민속주점에 놀러갔을 때 찍은 것으로, 하숙집 선배였던 하종문 한신대 교수가 보관해왔다. <한겨레> 자료사진

“아버지 같은 사람 없더라”

-그때 후회하지는 않았습니까?

“후회는 안 했어요. 잘못한 것은 아니잖아요. 직업윤리에 맞게 사실대로 했을 뿐이죠. 속으로 내가 의사인데 어디 가더라도 밥은 못 벌어 먹겠느냐는 심정도 있었고요.”

-박종철 사건 이후 30년이 지났습니다. 민주화가 됐지만, 블랙리스트 작성 등에서 보듯이 우리 사회는 아직도 공직자들이 제 역할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요.

“각 전문 직업인들이 자기 소명의식을 갖고 직업윤리대로 움직이면 모든 게 잘됩니다. 그러나 지금 보면 오히려 가장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고 있어요. 사회가 발전하려면 전문지식인들이 가치관을 제대로 가져야 합니다. 매뉴얼대로 사회를 이끌어가야 하고요. 박종철 사건 때 공안부장은 법과 규정대로 대처했는데 30년 후에는 오히려 그게 안 되고 있어요. 그런 면에서는 사회가 후퇴했어요. 제 전공인 부검 분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모든 변사 사건은 규정대로 다 해야 한다고 봐요. 백남기씨도 원칙대로 부검을 했어야 합니다. 미국은 케네디 대통령도 부검해서 결과가 교과서에 실려 있어요. 원칙을 어떤 때는 적용하고 어떤 때는 배제하면 안 됩니다.”

“많이 배우고 잘 사는 사람들이 모범을 보여야 하는데 그러질 못합니다. 지금 국정조사나 특검 수사를 보면 집권층이나 잘난 사람들이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잖아요. 일반 국민들이 오히려 선량해서 그나마 사회가 유지되고 있다고 봅니다. 이래서는 정의가 바로 설 수 없지요. 앞으로 다가올 30년은 이런 식으로는 안 됩니다. 근본적으로 바꿔야 합니다.”

인터뷰를 마친 두 사람은 박종철기념관을 나와 서울 남영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녀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슬쩍 물어봤다. “무척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아요. 아버지 같은 분은 없더라고 가끔 얘기하더라고요”(최환), “내색은 않는데 좀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아요”(황적준)라는 답이 돌아왔다. 아버지처럼 살아야 한다는 부담이리라. 이 땅에서 자유와 평화를 누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들에 대한 부채의식과 부담감을 지니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역사 안으로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최환 변호사와 지난 6일 서울 서초구 반포동 변호사 사무실에서 한 별도 인터뷰 내용도 기사에 담겼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신문구독][주주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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