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중앙일보

일본 사죄 번복 못하게 한국이 넣은 '불가역' 문구가 족쇄

유지혜 입력 2017.01.12 01:37 수정 2017.01.12 07:2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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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일본 '최종적' 요구에 역제안
일, 책임 뒤집지 말라는 취지 역이용
위안부 문제 끝났다며 소녀상 꼬투리
"반인도범죄는 불가역적 해결 불가
나치 전범 아직도 법정 세워" 지적
부산 일본 총영사관 앞 소녀상 갈등의 불씨는 2015년 12·28 위안부 합의에 담긴 두 단어 때문이란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일본 정부가 예산(10억 엔) 거출과 전 위안부 분들의 상처 치유를 위한 사업 시행 등 조치를 착실히 실시한다는 걸 전제로 이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한다”는 문장 안의 ‘최종적·불가역’이란 단어가 빌미를 만들어주고 있다는 의미다.

소녀상 설치에 보복성 조치를 취하고 있는 일본의 논리는 하나다. ‘피해자 지원을 위해 10억 엔을 내서 문제가 다 끝났는데 왜 또 시작이냐’는 것이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외상도 8일(현지시간) 체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최종적·불가역적 해결’을 언급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위안부 협상 과정을 되짚어봤다.


‘최종적’은 일본, ‘불가역적’은 한국 제안
‘최종적’이란 표현은 일본의 요구였다. 미국의 영향도 있었다. 일본은 2012년 말 아베 정부 출범 이후로 워싱턴 조야에 “우리가 아무리 사과를 해도 한국이 골포스트를 옮기는 것처럼 말을 바꾼다”는 일명 ‘골포스트론’을 퍼뜨렸다. 이에 미국은 합의 전 한국 측에 “사죄, 책임 인정 부분에서 진전이 있으면 일본이 원하는 최종적 해결임을 확인해줘도 좋지 않겠느냐”는 메시지를 전했다고 한다.

한국은 여기에 ‘일본이 위안부 피해자 지원 조치를 착실히 실시한다는 것을 전제로’라는 단서조항과 ‘불가역적’(바꿀 수 없는)이란 표현을 추가하자고 맞섰다. 외교부 관계자는 “불가역적이란 표현은 우리뿐 아니라 일본에도 해당되는 것”이라며 “일본 정부가 합의에 명시한 책임 통감, 마음으로부터의 사죄와 반성 등을 다시 부정하거나 왜곡하는 망언을 하지 말라는 취지에서 넣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반인도범죄에 마침표 찍는 건 무리”
위안부 문제의 발단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나치 전범을 법정에 세운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일본 전범을 처벌하기 위한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의 차이 때문이었다. 뉘른베르크에선 A급 범죄(침략전쟁 등), B급 범죄(민간인 학대·살해 등), C급 범죄(인종 학살, 노예화 등 반인도범죄)를 모두 적용했다. 하지만 도쿄재판은 A·B급 범죄 혐의만 따졌다. C급 범죄에 해당하는 위안부 문제는 아예 다루지 않았고, 가해자 처벌도 이뤄지지 않았다.

위안부 문제가 반인도범죄란 건 국제사회도 인정하고 있다. 1996년 유엔 보고서(일명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에서 최초로 위안부를 ‘전시 성노예’로 규정하고 일본 정부에 사죄와 배상을 권고한 이후로 국제사회의 인식에는 변함이 없다.

이런 반인도범죄를 ‘최종적·불가역적’으로 해결했다고 선언하는 것 자체가 무리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조세영(일본연구센터 소장) 동서대 교수는 “과거사 문제를 어느 한 정부가 끝내긴 쉽지 않다”며 “특히 위안부 문제 같은 반인도범죄에 마침표를 찍는다는 건 무리가 있다”고 말했다.


“고노 담화 등 명시했어야”
전 세계적으로도 반인도범죄에 대한 처단은 현재 진행형이다. 독일은 뉘른베르크 재판의 정신을 잇기 위한 후속 조치로 반인도범죄 처단을 국내 형법으로 규정해 지금도 나치 전범들을 처벌하고 있다. 95년 보스니아 내전 당시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보스니아계 이슬람 신도 등 민간인 8000명을 학살한 스레브레니차 학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유고전범재판소는 지난해 12월 학살 책임자인 ‘발칸의 도살자’ 라트코 믈라디치(75)에게 종신형을 구형했다.

일본처럼 한 번 사죄로 끝내려 한 경우도 드물다. 알렉산다르 부치치 세르비아 총리는 2015년 7월 스레브레니차 학살 20주년 행사에 참석했다가 군중에게 돌 세례를 받고 쫓겨났다. 하지만 그는 4개월 만에 다시 추모관을 찾아 추모비 앞에 고개를 숙였다.

‘최종적·불가역적’이란 문구에 대해선 외교부 내에서도 아쉬움을 표하는 이들이 많다. 외교부 관계자는 “불가역적이란 표현을 담더라도 일본 정부가 강제 동원을 최초로 인정한 ‘고노 담화를 계승한다’는 걸 전제로 했어야 한다”고 말했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