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경제]<판도라>-한수원은 '회색 코뿔소'를 보지 못하는 걸까

입력 2017. 1. 11. 0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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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상업용원자로인 고리원전 1호기는 39년째 운영 중이다. 최초 설계할 때 잡았던 수명 30년을 다했지만 정부가 2008년 10년간 더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해줬기 때문이다. 만약 이 원전에 문제가 생긴다면? 고리원전 반경 30㎞ 안에는 380만명이 산다.

박정우 감독의 <판도라>는 세계 최고의 원전밀집지역을 둔 한국에 던지는 종말론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진도 7에도 견딘다는 ‘한별1호기’가 진도 6.1의 지진을 이기지 못한다. 냉각수가 새고 수소압력이 높아지더니 원자로 격납용기가 폭발한다. 더 큰 문제는 격납용기 옆방에 저장돼 있는 사용후핵연료. 핵연료가 활성화돼 폭발이라도 하면 상황은 되돌릴 수 없다. 대한수력원자력의 하청업체 직원인 재혁은 이를 막기 위해 동료들과 함께 자청해 원전에 들어간다.

<판도라>는 그 흔한 영화창투사 하나 붙지 않았다. 영상도시라던 부산도 차갑기는 마찬가지였다. 사회비판성 영화라는 이유라며 모두가 꺼렸다. 박정우 감독은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다. 대통령 탄핵사태가 아니라면 빛 보기 힘들었을 영화일 수도 있다.

영화 개봉이 늦춰지는 사이 지난해 발생한 진도 5.8의 경주 지진은 제작진도 깜짝 놀랐다고 한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에도 고리원전은 적지 않은 사고가 일어나고 있다. 그때마다 한국수력원자력 측은 “큰 문제가 아니다”라고 일축한다. 하지만 정말 안전할까. 혹시 한수원은 쿵쾅쿵쾅 위험신호를 내며 달려오는 회색 코뿔소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회색 코뿔소(Gray Rhino)’는 미국의 싱크탱크인 세계정책연구소 미셸 부커 소장이 2013년 다보스포럼에서 처음 제기한 개념이다. 2t 무게의 코뿔소가 멀리서 빠른 속도로 육중한 몸을 흔들고 다가오면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다. 엄청난 몸집은 눈에 띌 수밖에 없고, 그렇지 않더라도 육중한 무게 때문에 발밑으로 진동이 느껴진다. 덩치가 크면 클수록 그 신호는 더 세진다. 그럼에도 이를 알아채지 못하다가, 혹은 무시하다가 큰 위기를 당하는데, 이를 ‘회색 코뿔소’라 부른다.

미셸은 저서 <회색 코뿔소가 온다>에서 사람들이 뻔히 보이는 위기를 알아채지 못하는 것은 심리적 요인과 외부적 요인이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인간의 본성이나 조직·사회제도는 현상을 유지하고 밝은 미래를 선호하도록 설계돼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려운 문제가 닥치면 미적거리며 문제를 회피하려 든다. “무슨 큰일 있겠어”라며 근거없는 낙관론도 편다. 사회·정치적 제도는 단기적 성과를 부추긴다. 미래를 내다본 장기적인 리스크 관리는 쉽지 않다. 그저 내 임기에만 터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른바 폭탄 돌리기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2016년 종무식에서 “2017년 10대 리스크 중 9개는 올해와 동일한 리스크”라며 “새해에는 예상치 못한 블랙스완보다는 이미 알려진 요인이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낼 확률이 높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회색 코뿔소가 예상치 못한 속도로 다가오며 리스크가 현실화될 수 있는 시기”라고 덧붙였다.

미셸은 회색 코뿔소가 돌진해 올 때 들이받히지 않는 방법으로 코뿔소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코뿔소의 성격을 규정해야 하며, 실행가능한 작은 변화를 단계적으로 시도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위기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야 하며, 멀리 보이는 위협요소들이 어떻게 진행될지 예상할 수 있어야 하며, 문제를 책임지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밝혔다. 하나 하나가 원전사업자인 한국수력원자력이 새겨들어야 할 말들이다.

영화 속 관료들은 대형재난을 은폐하기에 급급하고, 대통령은 무기력하다. “거지 같고 개떡 같은 나라지만 우리들이 안하면 누가 하냐”며 끝내 원전으로 들어가는 재혁의 뒷모습에 세월호와 민간잠수사들이 맺혔다.

<박병률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m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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