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굴기의 꽃산 꽃글]나도밤나무
[경향신문]
귀족이란 태어나자마자 은퇴한 사람이다라는 정의를 들었다. 아등바등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정곡을 찔렀다는 기분이 들 것이다. 한편으로 최근에 등장한 금수저에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 것이다. 이런 말도 있다. 공주는 평생 손잡이를 잡을 일이 없다고 한다. 어디를 가나 세상을 칸막이하는 문은 항상 열려 있기 때문이다. 손이란 바깥에 그냥 달려 있는 게 아니다. 밑천이라고 달랑 고것뿐인 육체가 자신이 담긴 이 세계와 가장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관문이다. 그러니 그들은 세상의 문을 봉쇄당한 채 살아가는 존재라 할 수 있겠다. 스스로 열어야 할 문이 하도 많은 한 편의 인생에서 이만한 대리인생이 어디 또 있을까.
산으로 가지 않을 때면 우면산 자락의 국립국악원에 가서 토요명품공연을 보기도 한다. 국악 고수들의 소리와 악기로 귀를 흠뻑 씻는 시간이다. 여러 다양한 공연에서 대개 마지막을 장식하는 건 고전무용이다. 숨을 빨아들일 듯 흰옷을 차려입고 도살풀이춤을 출 때 주목하는 건, 공중과 접촉하면서 길게 뻗어나가는 손가락 끝!
나무들에겐 잎을 달았다가 떼는 것이 달력이고, 그 앞을 지나치는 등산객들의 차림새나 얼굴 표정이 곧 시계이리라. 꽃도 없는 요즘 산에 가서 뭘 보느냐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겨울은 겨울대로 보아야 할 게 많다. 그리하여 눈꽃을 헤치고 가서 꽃이나 열매가 아닌 엽흔이나 겨울눈을 관찰해도 충분히 하나의 세계가 보인다. 원숭이 얼굴, 하트 모양은 물론 지하에 계신 외할머니의 옆모습도 발굴할 수 있다. 그렇게 궁금한 표정으로 지리산의 한 자락을 훑을 때 가장 눈길을 끈 건 나도밤나무의 겨울눈이었다. 6월에 피는 탐스러운 꽃도 꽃이지만 이런 한겨울에 손가락을 각기 다른 방향으로 꼬부리며 가리키는 겨울눈을 외면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물가나 바위틈에서 뿌리를 두고 내 눈높이를 얼추 맞춰주는 나도밤나무의 겨울눈. 그 언젠가 본 무용수의 가지런한 손끝,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조지훈)을 너무나도 빼닮은 나도밤나무의 겨울눈! 나도밤나무, 나도밤나무과의 낙엽 교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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