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전 조사관 "실업급여 내달 끊기지만.."

선대식,안홍기 2017. 1. 9.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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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1000일 - 인터뷰 ①] 김성훈 전 세월호 특조위 조사관의 '험난한 진상규명의 길'

[오마이뉴스 글:선대식, 사진:안홍기, 편집:김지현]

▲ 김성훈 전 세월호특조위 조사관 김성훈 전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조사관
ⓒ 안홍기
2014년 4월 16일, 그의 인생은 바뀌었다.

민간연구소의 연구원이자 평범한 아빠는 그날 이후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에 매달렸다. 현재 그는 실업자로, 다음 달에 끊길 실업급여를 걱정할 처지다. 하지만 그는 세월호 특조위 조사관 후속모임을 꾸려 진상규명 작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다.

"6살짜리 아이는 아빠가 무엇을 하는지 알아요. 뉴스에 박근혜 대통령이나 세월호 참사 얘기가 나오면 이것저것 물어봐요. 나중에 아이한테 '힘들어서 (세월호 진상규명 작업을) 그만뒀어'라고 말을 못할 것 같더라고요."

그는 후원을 모집해서라도 진상규명 작업을 이어나가려 한다. 9일 세월호 참사 발생 1000일을 맞았지만, 여전히 그는 진상규명의 최전선에 서 있다. 김성훈(36) 전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세월호 특조위) 조사관 얘기다.

권력자를 권좌에서 끌어내린 촛불 혁명의 힘은 긴 시간 동안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에 몸과 마음을 쏟은 그와 같은 사람들에게 빚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난 6일 서울 서대문구의 한 카페에서 김성훈 전 조사관과 마주 앉았다.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었다"

▲ 김성훈 전 세월호특조위 조사관 김성훈 전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조사관
ⓒ 안홍기
세월호 참사가 났을 때 김성훈 전 조사관이 몸담았던 연구소는 자체적으로 세월호 침몰 원인을 연구했다. 이상한 점이 수두룩했다. 연구소의 연구 결과와 정부 발표 내용은 맞지 않았다. 하지만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자료에 접근할 수도, 관련자를 조사할 수도 없었던 탓이다.

마침 세월호 특조위 별정직 공무원 공고채용 소식이 들렸고, 김 전 조사관은 여기에 응시해 합격했다. 2015년 7월의 일이다. 정부 대응의 적절성을 파헤치는 진상규명국 조사2과에 배치됐다.

- 부담이 컸을 것 같다.
"부담이 컸다. 하지만 워낙 국민적인 응원을 받는 사안이라 조사관 모두 자신감을 가졌다. 의혹으로 제기된 게 많았기 때문에 정리하면서 조사를 하면 (진상규명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 가졌던 생각이 바뀌었을 것 같다.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기록의 양은 방대했다. 하지만 일부 조사관 채용이 늦어져, 엄밀한 기록 분석이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행정업무까지 처리해야 했다. 파견공무원들은 제 역할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특조위 동향을 소속 기관에 보고했다."

- 처음부터 정부가 조사를 방해한 것 아닌가.
"진상규명국 아래 조사 1·2·3과가 있다. 조사를 지휘할 진상규명국장의 역할이 중요한데, 청와대는 이 자리를 비워뒀다. 또한 1과 과장은 파견공무원이 맡기로 했는데, 여러 이유로 공석이 됐다. 박근혜 정부는 처음부터 어떻게 하면 특조위가 제대로 운영될 수 없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해 12월 1차 청문회가 가까스로 열렸다. 청문회가 끝난 뒤 많은 조사관들은 무력감을 느꼈다. 김 전 조사관은 "열심히 하고 싶었는데, 정부의 방해 등 여러 조건 때문에 제대로 조사를 할 수 없었다. 너무 억울했다"라고 토로했다. 그때 처음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정부는 세월호 특조위를 가만 두지 않았다

 416가족협의회와 4.16연대 회원들이 지난 6월 30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에서 '세월호 참사의 성역 없는 진상조사 특조위 보장 청와대 결단 촉구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는 모습.
ⓒ 최윤석
그는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었다. 국민의 기대는 컸고, 그에게 부여된 역할의 중대성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조사관들도 마찬가지였다. 김 전 조사관은 "2016년 1월부터 대면조사를 시작했다. 그때는 물불 안 가리고 덤벼들었다"라고 했다.

- 대면조사도 쉽지 않았겠다.
"정부 쪽 관련자들은 조사에 응했다. 다만 이미 감사원이나 검찰·경찰 조사를 받았기 때문에 똑같은 얘기를 했다. 기존 진술을 뒤집어 진실에 한걸음 다가가야 했는데 쉽지 않았다. 강제 조사권이 없으니, 새롭고 중요한 자료를 찾기 어려웠다."

조사관들은 열심히 일했다. 정부의 방해에도 특조위가 성과를 내는 원동력이 됐다. "세월호 선내 대기 방송을 한 강혜성씨로부터 '선사가 지시했다'는 증언을 이끌어냈고, 세월호 참사 당시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김시곤 KBS 보도국장의 통화 녹취록을 처음 입수해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2016년 봄 열심히 조사를 하다 보니, 새로운 기록을 입수했고, 기존의 진술을 뒤집을 수 있는 힘이 생겼다"라고 말했다. 특히 해경 통신망인 주파수공용통신(TRS) 녹취록의 일부를 입수해, 혹시 모를 선내 생존자를 위한 에어포켓을 만들었다는 정부 발표가 거짓임을 밝혀냈다. 다만 100만여 건에 달하는 TRS 녹취록 중 특조위가 단 7000여 건만 제출받은 것은 아쉬운 일이다.

1~3차 청문회를 거치면서 진상규명에 속도가 붙었지만, 곧 벽에 부딪혔다. 정부가 특조위 강제 해산 카드를 들고 나온 것이다. '4·16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세월호 특별법)에 따르면, 특조위의 최대 활동기간은 종합보고서·백서 발간 기간을 합쳐 1년 9개월이다.

정부는 세월호 특별법이 2015년 1월 1일 시행됐다는 근거를 들어, 2016년 9월 30일을 특조위 해산일로 삼았다. 특조위는 인력도 예산도 없었던 1월 1일을 특조위 활동시작일로 삼는 게 부당하고 주장했지만, 정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조사관들은 이후 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했다. 이 과정에서 지방노동위원회는 특조위 활동 시작일이 1월 1일이라는 정부의 판단을 인정하지 않았다.  김 전 조사관은 "정부가 특조위 강제 해산을 위해 무리하게 법을 해석했다는 게 다른 정부기관을 통해 드러났다"라고 지적했다.

인터뷰 중반, '세월호 7시간'을 두고 긴 일문일답이 이어졌다. 김 전 조사관은 특조위에서 이를 조사했다. 그는 열정적인 몸짓으로, 참사 당일 박 대통령의 직무유기와 무능을 밝혔다.

☞ 이어지는 기사 : [인터뷰②] "7시간보다 중요한 건 '참사 대응 능력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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