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이 꿈이던 그리운 딸 은화야, 팽목항에 세 번째 봄 오면 꼭 만나길

김호 2017. 1. 9. 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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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고 미수습자 어머니 이금희씨
매일같이 바다 보며 너를 기다려
직장 그만둔 남편, 대학 자퇴 아들
오늘도 4월 16일을 살고 있어
미뤄지는 선체 인양 안타깝지만
작업 계속된다는 사실에 안도
경기도 안산 단원고 학생을 비롯해 304명의 소중한 생명이 바닷속에 갇힌 2014년 4월 16일의 ‘세월호 비극’. 그날 TV 중계방송으로 비극을 생생하게 시청하면서 사람들은 예외 없이 슬픔과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덧없는 세월이 흘러 9일이면 참사 발생 1000일째를 맞는다.1000일이란 시간은 많은 것을 바꿔 놨지만 아직도 찾지 못한 ‘미수습자’ 9명이 세월호와 함께 전남 진도 바닷속에 있다. 9명 중 3명의 가족은 진도 팽목항을 떠나지 못하고 오늘도 ‘4월 16일’을 산다. 1000일의 기다림 때문에 시간이 멈춰 있다.
조은화양의 어머니 이금희씨가 지난 7일 전남 진도 팽목항 컨테이너 회의실 안에 내걸린 딸의 사진 앞에 서 있다. 이씨는 세월호 사고 발생 이후 1000일 동안 딸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다. [진도=프리랜서 장정필]
이금희(48·여)씨가 그런 경우다. 이씨는 단원고(당시 2학년 1반) 친구들과 제주로 수학여행을 떠난 딸 조은화(당시 17세)양의 귀가를 오늘도 기다리고 있다. 안산의 집 대문 앞이 아니라 팽목항 방파제 옆 공터에 마련된 미수습자 가족 숙소 앞에서 매일같이 바다를 멍하니 바라본다.

그날 갑작스러운 사고 소식을 접하고 학교 측이 마련한 버스에 올라 진도에 도착한 게 당일 오후 5~6시쯤이다. 가 본 적 없고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모를 정도로 낯설었던 진도 생활이 3년가량 이어지리라고 당시엔 상상도 못했다. 실신했다가 힘겹게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은화는 보이지 않았다. 다른 학부모처럼 “아이를 구조해 달라”고 울부짖었다. 시간이 지나자 은화의 친구들이 하나둘씩 시신으로 발견됐다. 안타까움 속에서도 “은화는 꼭 살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3~4일이 지나자 “바다에서 올라온 아이들의 시신 상태가 좋지 않다”는 말이 들렸다. 점점 두려워졌다. 딸이 죽었을 것이라는 생각만으로도 견디기 어려웠다. 참사 일주일이 되자 “시신만이라도 찾고 싶다”는 바람이 간절했다. 자식의 시신을 찾아 기뻐 울며 진도를 먼저 떠나는 다른 학부모들이 정말 부러웠다.

그래도 은화를 찾지 못한 채 결코 떠날 수 없어 팽목항을 지켰다. 은화를 잃은 잔인한 그 봄이 지나고 여름·가을이 되고 겨울의 문턱에 들어섰다. 하지만 상황은 달라진 게 없었다. 은화는 여전히 차가운 바닷속에 있었다. 그해 11월 “정부가 수색 작업을 종료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했다. 딸을 구해 주지 못했는데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단원고 생존 학생이 2014년 은화양의 생일(10월 10일)을 앞두고 직접 그려 이씨에게 보내온 그림이다. [진도=프리랜서 장정필]
더 이상 팽목항에서만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다. 결국 거리로 나섰다. 피켓을 들고 “세월호를 인양해 미수습자들을 찾아 달라”고 외쳤다. 같은 처지인 단원고 미수습자 허다윤(17)양의 어머니 박은미(47)씨와 서로 위로하며 힘을 냈다. 전국을 돌며 세월호 인양의 필요성을 알렸다. 너무나도 당연한 인양 결정은 세월호 사고 1주년인 2015년 4월에야 나왔다.

일부에선 우리를 이기적인 사람으로 취급했다.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 “국가적으로 손해인데 세월호를 인양해야 하느냐”는 이들도 있었다. 주변에서는 “남은 아들(23)을 위해서라도 이제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유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국가가 구하지 못했지만 부모까지 자식을 포기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비수를 꽂는 말들이 오히려 가족을 더 차분하게 만들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은화를 꼭 찾아야 한다는 목표는 더 뚜렷해졌다. 하지만 세월호 인양 예정시점이 당초 2016년 7월에서 8월 이후로, 다시 연내 인양에서 2017년 상반기로 미뤄졌다. 고통스러웠지만 인양 작업이 계속된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평범했던 가족의 일상은 그동안 완전히 달라졌다. 회사에 다니던 남편(54)은 정상적으로 출근할 수 없어 아예 직장을 그만둬야 했다. 참사 당시 대학 신입생이던 아들은 팽목항을 지키느라 결국 자퇴했다. 친척과 지인에게 빌려 어렵사리 생계를 잇고 있다.지난해 10월 ‘최순실 국정 농단 의혹’이 불거지면서 박근혜 대통령의 ‘세월호 7시간 행적’을 놓고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박 대통령 측은 “그날에 대해 잘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가족에게는 너무도 생생한데 지도자가 남 말 하듯 하니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다.

오늘도 무심한 팽목항 앞바다는 말이 없다.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다시 팽목항에 세 번째 봄이 오면 공무원이 꿈이던 은화를 꼭 만날 수 있겠지.

진도=김호 기자 kim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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