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안 겪어보면 몰라요, 카메라가 운다는 거"

김형규 기자 입력 2017. 1. 6. 21:34 수정 2017. 1. 6.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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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세월호’ 지성이 아빠, 문종택씨의 1000일

단원고 ‘지성이 아빠’ 문종택씨가 지난 4일 경기 안산시 세월호 합동분향소 앞 416TV 사무실에서 촬영용 비디오카메라를 점검하고 있다. 정지윤 기자

안산 세월호 희생자 합동분향소 옆 작은 컨테이너에 마련된 그의 사무실 책상 위에는 한창 편집 작업 중이던 컴퓨터가 있고, 그 옆에 유통기한이 임박한 빵들이 놓여있다. 시민들이 아이들을 추모하며 ‘416 기억교실’에 놓고 간 간식이다. 유통기한이 다 돼 갈 즈음 차마 버릴 수 없어 유족 사무실로 옮겨 오는 이런 빵들로 문종택씨(55)는 대충 한 끼를 때우곤 한다.

“내 이름 안 쓴 지 오래됐어. 지금 내 삶은 지성이 아빠로만 존재하고 있으니까. 그게 초심이고 앞으로도 변하면 안되니까.” 그는 인터뷰 시작 전 이름과 나이를 묻자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지난 1000일 동안 인터뷰를 여기저기서 많이 했지만, ‘제정신’으로 하는 것은 오늘이 처음인 것 같다고 했다.

2014년 8월 문종택씨가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과 세월호 특별법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있다. 416TV 방송화면 캡처

-유족으로서 직접 카메라를 들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유족은 요구를 하는 당사자 입장인데, 카메라는 관찰자의 입장에 서는 것이잖아요.

“2014년 8월8일 국회에서 처음 단식을 시작한 날이었어요. 특별법 통과시켜달라고 목이 터져라 외치는데 쳐다도 안 보던 여당 의원들이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이대니까 갑자기 방긋방긋하더라고요. 그때 느꼈죠. 아, 카메라가 중요하구나. 그래서 우리도 캠코더를 구해왔어요. 그땐 방송할 생각은커녕 유튜브란 말 자체도 몰랐어요. 그냥 ‘유족이 여기 있다, 눈길이라도 달라’라는 심정이었어요. 카메라를 들이대니까 의원들이 그제서야 우리를 한번 쳐다는 보더라고. 참 더러웠죠.”

그날부터 방송은 그의 ‘직업’이 됐다. 현장에서 만난 독립언론 종사자들에게 카메라 조작법 등을 부지런히 배웠다. 그동안 쌓인 방송 목록은 700여편에 이른다. 컴퓨터 하드에 기록된 동영상 분량만도 20테라바이트(TB)가 넘는다.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현장을 누비는 일은 젊은 기자들에게도 만만치 않은 일인데요.

“아주 상상도 못 하죠. 제일 중요한 게 노트북이에요. 라이브 방송을 하려면 카메라에 핸드폰, 멀티탭까지 3개 선을 노트북에 연결해야 돼요. 경찰들하고 광화문에서 충돌이라도 나면 집사람이 노트북 들고, 나는 카메라 삼각대 들고 동시에 같이 뛰어요. 연결 잭이 끊어지면 안되거든요. 동거차도에서도 그 바람 부는 곳에 노트북과 카메라를 설치하고 혼자 촬영을 하면서 바닷속에 잠든 아이들 이름을 불러주려는데 바람에 선이 조금만 움직여도 끊어져서….”

-사실 언론이 해야 할 일들을 직접 하고 계신 셈입니다. 세월호 사건으로 언론들이 많이 지탄을 받았어요.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한 단식 행사가 이어지던 2014년 문종택씨가 한 시민을 인터뷰하고 있다. 416TV 방송화면 캡처

“저는 (세월호를 상징하는) 노란 옷을 안 입어요. 항상 땅바닥에 주저앉아야 하니까 검정 옷을 입죠. 그럼 현장 기자들이 내가 유족인지 모르고 자기들끼리 얘기하는 소리가 들려요. ‘오늘은 세월호 특조위원들끼리 안 싸우네.’ ‘유족들 그림 안 나오는데.’ 그런 장면만 찍으려고 온 의도가 뻔히 보이는 거예요. 그렇다고 그 친구들이 미운 건 아니에요. 다 자식뻘이고, 어찌 보면 시위 막는 의경들이랑 똑같잖아요. 위에서 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걸 텐데. 그래도 내가 뭐라고 하는 건 기자로서의 사명감을 자꾸 일깨워 주고 싶어서예요. 기사 한 줄에 사람 수백명을 죽였다 살렸다 할 수 있는데.”

카메라를 들면 그는 냉정한 ‘관찰자’가 돼야 한다. 머리로는 잘 알지만 실천은 늘 어렵다. 아무리 객관적 입장을 유지하려 해도 유가족이라는 그의 정체성은 바뀌지 않는다. 서서히 세월호를 잊어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다시 끌려면 눈물샘을 자극하는 영상을 만들어야 하는 걸 알면서도, 자신이 먼저 감정이 복받쳐 촬영을 포기한 적도 여러 번이다.

지난달 27일 416TV 사무실에서 편집 작업 중인 문종택씨가 모니터 화면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 김형규 기자

“세월호 인양작업 현장으로 가고 있었어요. 배가 막 흔들리는데 미수습자 가족인 은화 어머니, 다윤이 어머니가 처절하게 우시는 거예요. 우리 엄마·아빠들은 다 알거든요. 사람이기 이전에 동물로서, 정말 밑바닥부터 끓어오르는 새끼를 찾는 울분의 소리가 있어요. 그런 걸 찍어서 알려야 하는데, 도저히 못 찍겠더라고요. (잠시 침묵) 카메라가 울거든요. 그거는 안 겪어보면 몰라요. 카메라가 운다는 거.”

찍은 영상을 편집하는 작업도 같은 이유로 그에겐 고역이다. 바라만 봐도 저절로 울음이 터지는 화면을 여러차례 돌려보다 보면 나가서 담배 한 대 피우고 한참 울다가 다시 들어와서 또 우는 과정의 반복이다. 그러다 보면 결국 편집도 못하고 울기만 하다 밤새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문씨의 딸 지성이는 연예기획사에서 섭외 제안을 받을 정도로 외모가 출중했다. 경제적 이유로 연예인을 포기한 후에는 스튜어디스가 되겠다며 영어학원을 자청해 다녔던 기특한 딸이었다.

-1000일 전으로 한번 시간을 돌려볼까요. 지성이와 마지막으로 통화하신 게 2014년 4월16일 9시4분이었죠.

“저는 세월호가 ‘학살’이라는 거에 0.001%도 의심이 없는 게, 아이하고 통화하면서 배에서 나오는 방송 소리를 내가 들었어요. 자리에 가만히 있으라고. 그걸 듣고 내가 안심했으니 애들은 오죽했겠어요.”

가족들과 함께 팽목항으로 달려갔을 때 지성이 이름은 생존자 명단에 있었다. 그러나 짧은 안도는 곧 공포로 변했다. 생존 학생들이 모인 장소에 딸은 없었다. 당시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가 발표한 잘못된 생존자 명단을 그대로 보도한 언론 기사 중 일부는 아직도 버젓이 인터넷에 걸려 있다.

-참사 다음날 박근혜 대통령과 직접 통화하셨죠.

“(한참 침묵) 밤 10시 넘어서 ‘발신번호표시제한’으로 전화가 오더라고요. 통사정하는 심정으로 땅바닥에 엎드려 전화를 받았어요. 아이들 한 명이라도 구해달라고, 제발 하나라도. 그런데 수색상황을 알 수 있게 스크린을 설치해준다는 약속을 지켰다는 말 하려고 전화한 거였더라고. 홍보용이구나 싶었죠. 나도 그렇지만, 우리 가족들이 그때까지만 해도 참 바보 같았지. 대통령을 믿었다는 게.”

사실 문씨는 대통령과 통화할 때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은 하지 못했다. ‘우리 딸 지성이가 생존자 명단에는 있는데 행적을 찾을 수가 없다. 제발 알아봐 달라.’ 그러나 그 다급한 순간에조차 자기 애부터 찾아봐 달라는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지성이는 그로부터 2주 후에야 가족 품으로 돌아왔다. 4월30일 사고해역 인근에서 한 어부가 닻에 걸린 지성이를 끌어올렸다.

그때부터 문씨는 ‘지성이 아빠’로만 살아왔다. 카메라를 들고 유족들이 가는 곳 어디든 뛰어갔다. 삼보일배, 도보순례, 삭발, 단식, 기자회견, 거리집회…. 피부 알레르기 때문에 군대도 방위로 다녀왔던 그는 서릿발 같은 바닷바람을 맞으며 촬영하느라 얼굴이 퉁퉁 부었다. 안 그래도 마른 체형에 몸무게가 한때 8㎏이나 빠졌다. 그렇게 1000일이 흘렀지만, 그의 시간은 흐르지 않고 여전히 멈춰있다.

“지금도 2014년에 만든 피켓을 여전히 가지고 다니면서 쓰고 있어요. 변한 게 없다는 거죠. 과거에 만든 영상물은 과거의 기록이 돼야 하는데, 세월호 소식은 과거가 없어요. 딱 하나 바뀐 게 ‘특별법 제정하라’고 썼다가 ‘개정하라’고 글자 하나 고친 거. 현수막이나 서명지나 하나도 고쳐 쓸 게 없어요.”

-국가가 했어야 할 일을 그동안 피해 당사자인 유가족들이 해왔습니다. 최근에서야 박 대통령의 국정농단 실체가 드러나면서 세월호 참사에 대한 분노도 되살아나고 있어요.

“나는 박근혜가 탄핵당한다 해도 그건 처벌이 아니라고 봐요. 김기춘이 비서실장 하다 내려오고 국회의원이 ‘배지’ 내려놓는다 해도 그게 어떻게 책임지는 거예요. 원래 그게 기본인데. 국민 세금으로 봉급 받으면서 그동안 잘못된 일을 했으면, 그 돈까지 다 게워내야지. 우리 가족들은 애도할 시간도 갖지 못한 채 생업까지 포기하고 공무원이 했어야 할 일까지 하고 있는데.”

그는 지난 1000일 동안 단 1초도 행복해지면 안 되는 사람처럼 살아왔다. 유가족 트라우마 치료를 위해 건립된 ‘안산온마음센터’에서 족욕기로 안마를 받는 순간에도 머릿속에 먼저 떠오른 것은 동거차도의 천막 안에서 벌벌 떨고 있을 엄마들이었다. “족욕기가 정말 뜨끈뜨끈하고 좋대. 근데 나만 편하고 그런 거 같아서 도저히 못 받겠더라고. 그거 받는다고 나쁜 것도 아닌데, 아마 내 트라우마겠죠.”

화석처럼 굳어버린 자신의 아픔을 시종일관 담담하게 말하던 그는 인터뷰 도중 딱 한 번, 눈물을 보였다. 자신의 비극 앞에 철저히 무관심했던 사람들 때문에 눈물조차 말라버렸을 텐데도, 그는 오히려 고마웠던 시민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특별법 제정 서명운동을 위해 서해안 고속도로 휴게소를 나 혼자 차 타고 돌아다녔어요. 서명대 설치하려고 휴게소마다 전화를 돌렸는데 많이들 난색을 표하는 거예요. 다음번에도 휴게소 재입찰을 받으려면 한국도로공사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인 거 같더라고요. 그런데 화성휴게소에 갔더니 나이 지긋한 소장님이 나에게 주겠다고 직접 간 생과일주스를 내오면서 휴게소 명당자리를 마음대로 골라서 얼마든지 하라고 하는 거예요. 내 목이 아플까봐 30분마다 ‘단원고 2학년 1반 지성이 엄마·아빠가 서명을 받고 있으니 동참해달라’고 전체 안내방송까지 해주셨어요. 거기서 음반 팔고 있던 무명가수들도 ‘저희도 모금해서 세월호 후원금 냈습니다’ 하면서 자리를 비켜주고.” 그는 카메라와 핫팩을 마련해 준 온라인 요리 커뮤니티 ‘82쿡’ 회원들과 날이 추운데도 유모차를 밀고 나와 매주 촛불모임을 여는 전국 곳곳의 시민들을 떠올리면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고 말했다.

인터뷰 도중 문씨의 휴대전화 알람이 울렸다. 오후 4시16분이었다. 매일 같은 시각에 울리도록 알람을 맞춰놓은 것이다. 그는 알람을 ‘진실의 벨’이라 불렀다. “제 욕심이지만 노란리본 다는 것처럼 전 국민이 안전을 위한 벨소리 운동을 했으면 좋겠어요. 4시16분에 다들 알람 울리면 가족들한테 전화해서 사랑한다, 고마웠다 말하고 안부도 확인하는 거예요. 우리는 이제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그 말이 가슴에 맺혀있거든요.”

<김형규 기자 fideli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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