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않고 버텨온 '세월호 1000일' 가장 쓸모있는 시간"

강성만 2017. 1. 3.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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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잊지 말라 0416' 버스킹 진행 김권환 프로듀서

[한겨레]

김권환 프로듀서는 세월호 참사 뒤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바리캉으로 직접 머리를 깎았다. 참사 1돌을 기려 버스킹에 참가한 뮤지션들의 곡을 담아 프로듀싱한 음반 ‘잊지 말라 0416’을 소개하고 있다.

일요일이자 새해 첫날인 지난 1일 오후 4시16분 서울 홍대입구역 8번 출구에 어김없이 그가 나타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잊지 말라 0416’ 버스킹이 시작됐다. 포크 음악인 ‘바람종’이 노래를 하는 동안 그는 부지런히 서명대와 버스킹 앰프 사이를 오간다. 2014년 5월11일부터 버스킹을 이끌고 있는 김권환(42) 프로듀서다. 그간 묘묘, 이호, 바람종, 에스브이(SV), 밴드죠, 재수좋은 날 등 30~40개 팀의 음악인들이 참여했다. 버스킹이 끝난 뒤 김씨를 연남동 자택에서 만났다.

2014년 5월11일부터 매주 일요일
홍대역 8번출구 공연·서명지기로
2014년 4월부터 평일엔 피케팅도



대구 지하철사고 때도 친구 잃어
“가만 있으면 내가 죽을 것 같아”
촛불광장 열기보며 ‘승리의 희망’

새해 첫날인 1일에도 어김없이 홍대역 8번 출구 앞에서 버스킹이 열렸다. 포크송라이터 ‘바람종’이 노래를 부르는 도중 스피커 상태를 점검하고 있는 김권환 프로듀서.

그는 2015년 4월부터는 주6일 ‘세월호 피케팅’도 하고 있다. 오후 2시~3시30분에 역시 8번 출구에서 한다. 평일과 토요일은 피케팅, 일요일은 버스킹이 그의 시간표다. “미수습자인 단원고 허다윤 학생의 어머니가 저를 찾아와 평일에 피케팅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어요. 그때부터 피케팅도 하고 있어요.”

그는 일요일엔 연남동 집에서 두 대의 손캐리어에 버스킹용 앰프와 서명대, 피켓 등 60㎏ 정도 되는 장비를 싣고 8번 출구로 향한다. 10분 정도 걸린다. “비가 오거나 예고된 날을 빼곤 늘 걸어가요. 뮤지션의 기타가 100만원을 넘기도 해 젖으면 곤란하죠.”

그는 자신을 ‘세월호 홍대 용역’이라고 했다. ‘세월호 일’이라면 만사 제쳐놓고 달려간다는 의미다. 버스킹 참여 음악인들이 세월호 1년을 맞아 만든 앨범 <잊지 말라 0416> 제작도 그의 몫이었다. “400장을 팔아 247만원은 생존 학생 트라우마 치유비로, 50만원은 세월호 전단을 제작해온 최호선 교수에게 전했죠.” 그의 음향장비는 세월호 가족 기자회견 때면 무료로 제공되기도 한다.

왜 8번 출구였을까. “세월호 참사 때 홍대 뮤지션들이 누구보다 기민하게 움직였어요. ‘세월호를 지켜보는 작은 음악가의 선언’을 발표하고 2014년 5월11일 홍대입구역 9개 출구에서 버스킹을 했어요. 그때 저는 8번 출구에서 했죠.” 그는 버스킹이 계속된다고 생각하고 다음주에도 8번 출구에 나왔다. 그렇게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세월호 때 아이들이 그렇게 많이 죽었는데, 어른인 제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4월19일 팽목항에도 갔지만, 어수선하기만 했던 그곳에서 할 일을 찾을 수 없었다.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4월23일 바리캉을 들고 스스로 머리카락을 빡빡 밀었다. 지금도 2주마다 직접 바리캉을 잡는다.

“(세월호 사고 이후) 6개월간 악몽에 시달렸어요. 꿈결에 싱크대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나면서 살려달라는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버스킹은 사실 저를 치유하는 의미가 있어요. 그때 이러다 내가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세월호는 그에게 깊은 정신적 상처를 안긴 11년 전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김씨는 2003년 대구지하철 사고 때 친구를 잃었다. “중학교 때 과일행상 어머니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스스럼없이 도왔던 멋진 친구였어요. 취업 면접을 보러 가는 날 사고를 당했죠.” 그가 해군 출신이란 점도 대형 해상 참사를 예사롭게 넘기기 힘들도록 했을 것이다.

버스킹 초기엔 플라멩코 춤이나 마임처럼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이 참여했지만, 요즘은 노래 위주로 공연한다. “지금은 15개 팀이 한달에 한번꼴로 공연을 하고 있어요. 초기보단 동력이 떨어졌죠. 하지만 탄핵 이후 서명자는 초기만큼 많아졌어요.”

가장 힘든 순간은 언제일까. “덥거나 추울 때죠. 영하 10도로 내려가면 뮤지션의 손이 얼어요. 세 곡을 하기로 했는데, 두 곡만 하고 내려가면서 미안하다고 말한 뮤지션도 있었어요. 그래도 다음에 나오겠느냐고 하면 그러겠다고 해요.” 인터뷰에 동석한 바람종은 “추운 날엔 음악 비트가 빨라져 5분짜리가 3분 만에 끝나기도 했다”며 웃었다.

김씨는 2010년 고향 대구를 떠나 서울에서 기획사 ‘컴퍼니케이’(Companyk)를 차렸다. 어려운 인디 뮤지션들을 돕겠다는 생각에서다. 그간 디지털 싱글 10장과 정규앨범 2장(산책, 잊지 말라 0416)을 냈다. ‘산책’ 속 노래들은 그가 직접 작사·작곡했다. 지금은 프로듀싱 일은 하지 않고, 녹음용 스튜디오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독신 생활을 꾸려가고 있다. 최근엔 음향장비 대여 일도 시작했다.

“발표곡은 20개 정도이고, 미발표곡까지 하면 400곡 정도 만들었죠. 제가 죽은 뒤에도 제 노래를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불러줬으면 하는 그런 소망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는 세월호 이후로 노래를 만들 수 없었다고 했다. “제 노래는 다 사랑 노래입니다. 샤방샤방하지요. (세월호 이후로) 그렇게 쓸 수가 없어요. 어쩌다 노래를 쓰면 분노에 차서 욕이 나옵니다. 제가 만들고도 힘들어요. 전 여린 사람이거든요.”

세월호 이후는 그에게 어떤 시간이었을까. “지난 2년6개월은 제 인생에서 가장 쓸모있었던 시간입니다. 전 게으른 사람인데, 세월호라면 어디든 달려갔어요. 버스킹은 선체가 인양될 때까지는 계속할 생각입니다.”

지난해 10월 이후 촛불 광장의 인파를 두고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뮤지션들과 함께해서 나비효과가 발생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요. ‘잊지 않고 있으면 싸우게 되고 작은 행동이라도 계속하면 이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요즘 늘 되뇝니다.”

글·사진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신문구독][주주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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