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명복 칼럼] 대망인가, 허망인가
참담한 결과 뼈저리게 체험
반기문 대망론에 어른거리는
친반 세력의 발호 조짐
무엇이 나라와 자신 위한
바른 선택인지 더 고민해야
새해가 되면 누구나 소망을 품는다. 튈르리궁에 유폐된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왕정 복고’의 소망이 있었듯이 청와대에 갇혀 있는 박근혜 대통령에게도 새해 소망은 있을 것이다. 서울구치소에 수감돼 있는 최순실이라고 소망이 없을까.
사람마다 소망의 색깔과 크기는 다르다. 아픈 사람은 건강을 바랄 것이고, 없는 사람은 통장 잔고가 늘어나기를 소망할 것이다. 누구는 합격을 바라고, 누구는 승진을 소망할 것이다. 꿈과 소망이 없는 삶만큼 무기력한 삶은 없다. 앞날에 대한 기대가 있기에 우리는 현실의 고통을 견디며 산다.
뉴욕 맨해튼의 타임스스퀘어에서 부인과 춤추며 정유년 새해를 맞은 그에게도 소망이 있을 것이다. 이미 전직(前職)이 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그는 기대와 설렘 속에 송구영신(送舊迎新)의 밤을 보냈을 것이다. 유엔 사무국의 수장(首長)으로 보낸 10년 세월을 뒤로하고, 곧 그는 대한민국의 시민으로 돌아온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엔 좀 늦고, 완전히 손 놓고 물러나기엔 좀 이른 나이 73세. 그를 기다리고 있는 미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가 처음부터 유엔 사무총장을 노렸던 건 아니다. 어부지리(漁夫之利)로 우연히 기회가 왔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오래전 외교부 출입기자로 겪어 본 그는 리더형보다는 참모형에 가깝다. ‘기름장어’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상하좌우로 두루 처신을 잘해 적을 안 만드는 스타일이다. 일벌레처럼 주어진 과제를 성실히 수행하는 전형적인 외교 관료였다.
‘박정희의 딸’ ‘선거의 여왕’이라는 아우라에 홀려 투표한 참담한 결과를 우리는 지금 뼈저리게 체험하고 있다. 최악을 막기 위해 차악(次惡)을 택했을 뿐이라는 뒤늦은 변명으로 둘러대기엔 잘못된 선택의 책임이 너무나 크다. 그럼에도 권력의 곁불이 아쉬운 사람들은 전직 유엔 사무총장의 아우라에 목을 매고 있다. ‘인류 문명의 거목’ 운운하는 시대착오적 ‘반비어천가’가 울려퍼지고, “공산당만 아니라면 무조건 따르겠다”는 충성서약이 줄을 잇는 장면에선 ‘친박(親朴)’을 능가할 ‘친반(親潘)’의 발호를 예감한다.
평생 꽃길만 걸어 온 반 전 총장은 또다시 꽃가마를 타고 꽃길을 걸을 기대에 부풀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나이 못지않게 사고도 구시대적이다. “대한민국 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내 한 몸 불사르겠다”는 출사표는 살신성인(殺身成仁)과 멸사봉공(滅私奉公)을 외치던 1970년대를 연상시킨다. 새마을운동을 칭송하고, 일본과의 위안부 합의를 높이 평가하는 데서는 기회주의의 구린내가 난다.
어떤 소망을 품든 그건 그의 자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는 아직 어떤 비전도, 이념도, 가치도 제시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현실정치의 진흙탕을 헤쳐갈 자질이나 용기도 아직 보여준 게 없다. 굴러온 기회는 어떻게든 놓치지 않겠다는 이기적 욕심이 돋보일 뿐이다.
무엇이 나라를 위하고 자신을 위한 길인지 그는 더 고민해야 한다. 유엔 사무총장을 마치고 바로 대권에 도전한 사람이 왜 아직 한 명도 없었는지 곰곰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귀국하는 날까지 아직 시간은 있다. 대망(大望)이 허망(虛妄)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의 심사숙고를 기대한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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