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혁의 풀꽃나무이야기] 역사의 굵직한 사건을 지켜 본 헌법재판소 백송

이동혁 풀꽃나무칼럼니스트 2016. 12. 31.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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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을 맞아 백송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백송은 이름처럼 상서로운 흰빛을 가진 소나무 종류입니다. 예로부터 흰빛을 귀하게 여긴 우리 민족에게 백송이 각별한 대접을 받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백송이 특별 대접을 받는 또 다른 이유는 국내에 자생하는 나무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헌법재판소(재동)의 백송

백송은 중국이 원산지인 나무로, 그 옛날에는 중국의 수도인 북경에서나 구할 수 있는 나무였습니다. 그렇기에 국내에서 기품 있는 백송을 집 안에 심어 기른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중국을 드나드는 사신 또는 그만큼 지체 높은 사람이라야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백송은 그 집안의 가문과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물과 같았습니다. 당시의 권세가들은 아마 자신의 높은 신분을 과시하려고 일부러 심기도 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천연기념물 백송만 보더라도 그 존재의 위용을 알 수 있습니다. 국내에는 총 다섯 그루의 천연기념물 백송이 존재합니다. 국내 최고령 백송의 타이틀은 원래 ‘서울 통의동 백송’이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통의동 백송은 현재 존재하지 않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이미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바 있고, 광복 후 1962년 말에 천연기념물 제4호로 지정됐을 정도로 멋진 수형을 가진 나무였습니다. 그러나 천연기념물 지정의 영예는 30년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밑동만 남은 통의동 백송

1990년 7월 17일이었습니다. 폭우를 동반한 간밤의 돌풍에 쓰러진 통의동 백송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난리가 난 건 문화재청이 아니라 청와대였습니다. 당시 노태우 정권에서는 청와대 근처에서 자라는 백송의 죽음은 불길한 징조라 여겨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애썼습니다.

서울시에서는 ‘백송회생대책위원회’까지 구성했습니다. 통의동 백송을 쓰러진 상태로라도 살리려고 경찰관을 3교대 근무로 배치하기까지 했습니다. 그 정성을 알았는지 이듬해 봄에 싹이 나면서 살아날 조짐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건 살기 위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통의동 백송은 다음 김영삼 정권 때인 1993년 3월 23일에 천연기념물에서 해제되는 운명을 맞았습니다. 그러고 같은 해 5월 13일에 줄기가 잘려나가 지금의 흉측한 몰골로 변했습니다.

그런데 통의동 백송 사후에 알려진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나이테를 조사한 결과 1690년경에 심은 것으로 밝혀진 것입니다. 수령이 600년은 족히 넘었을 것이라는 추정과 달리 실제로는 3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재동 백송(철제빔에 노구를 의지한 채 서 있다)

만천하에 드러난 자신의 나이에 대해 말 못 하는 나무는 억울해할지 모르겠습니다. 속이려고 그런 게 아니라 당신네가 지어내고 믿어버린 이야기지 않느냐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 심정을 저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필자인 저도 호적에 1년 늦게 신고되어 나이 얘기를 할 때마다 평생 원래 나이를 함께 말해야 하는 운명에 처했으니까요.

통의동 백송을 대신해 최고령 백송 타이틀을 넘겨받은 건 ‘서울 재동 백송’입니다. 천연기념물 제8호인 재동 백송은 국내에서 가장 흰 껍질로 유명합니다. 어떤 이는 하늘로 비상하는 두 마리의 백룡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창경궁의 춘당지에 서 있는 백송이 더 하얀 것 같습니다. 정말이지 그렇게 새하얀 백송은 처음 봤습니다. 대체로 햇볕을 잘 받는 방향으로 선 백송일수록 껍질이 희게 변하는 것 같습니다. 백송의 껍질이 처음부터 하얀 것이 아니라 어릴 적에는 푸르딩딩한 백록색을 띠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쨌든 통의동 백송처럼 600년으로 추정하는 재동 백송의 나이도 믿을 수 없다고 하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재동 백송이 역사가 깃든 나무라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소재지인 재동은 이름의 유래부터가 살벌합니다.

창경궁 춘당지 백송(껍질이 무척 하얗다)

단종 1년인 1453년 10월 10일에 일어난 계유정난이 그 시작입니다. 단종의 왕위를 넘보던 수양대군이 자신의 집권에 걸림돌이 되는 늙은 대신인 김종서를 찾아가 죽인 사건입니다. 그때 김종서 집 일대에 진동하는 피비린내를 없애기 위해 재를 가져다 뿌렸습니다.

그래서 그 마을을 ‘잿골(=회동(灰洞))’이라고 부르다가 한자로 옮기면서 오늘날 재동(齋洞)이 됐습니다. 그 참극의 현장에 누가 백송을 심을 생각을 했는지 모를 일입니다. 600년이라는 수령이 맞는다면 계유정난의 실상을 어린 나이에 똑똑히 보고 자란 나무가 바로 재동 백송입니다.

재동 백송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집권 과정을 지켜본 나무로도 유명합니다. 그때는 백송의 자리가 영조 때의 재상 조상경의 집이었을 시기입니다. 풍양 조씨들의 세도정치가 펼쳐진 자리를 백송이 참관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창덕궁으로 들어간, 조씨 집안의 12살짜리 딸이 차후 고종 집권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신정왕후 조 대비가 됩니다. 철종이 승하하자 조 대비는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인 고종을 즉위시키고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하며 흥선대원군에게 정책 결정권을 주었습니다.

항상 V자를 그리고 서 있는 재동 백송

이후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의 세도를 종식하고 왕정을 복고하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 성공 여부를 두고 모두가 불안해할 때 흥선대원군만은 자신의 계획이 성공할 것을 확신했다고 합니다. 백송의 껍질이 더욱 흰빛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나요?

그 후 재동 백송의 자리는 개화 사상가들의 대부인 박규수의 사랑채가 됐습니다. 그 후에는 경기여고 자리가 됐다가 창덕여고 자리로 바뀌었으며 지금은 헌법재판소가 들어섰습니다. 그 바람에 백송은 헌재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참관한 나무로 일컬어졌습니다.

헌정 사상 첫 번째인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심판 판결을 지켜보기도 했고, 같은 해에 행정수도 이전 특별법에 대한 위헌 문제의 판결을 지켜보기도 했습니다. 그런 재동 백송의 이력에 하나 더 추가할 것이 생겼습니다. 헌정 사상 두 번째인 대통령 탄핵 심판이 그것입니다.

6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많은 사건을 지켜보았을 이 백송은 벌써 두 번째 대통령 탄핵 심판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찬성이나 반대를 외치는 시위대의 소음에 못 이겨 자신도 헌재 소장이나 재판관처럼 일찍 퇴근하고 싶어 하지는 않을까요? 어쩌면 세 번째 대통령 탄핵 심판만은 없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헌재에서 어떤 결정이 내려지든 간에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이 있습니다. 재동 백송은 누군가의 승리를 예견하듯 항상 ‘V’자를 그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발음하기 곤란했던 해가 저물고 이제 정유년의 새해가 밝아옵니다. 백송의 흰빛을 더욱 희게 할 태양이 뜨기를 기대합니다. 새로이 품어보는 소망이나 희망이 모두 이뤄지시길 바랍니다. 1년 동안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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