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황실이 보냈다는 장수불은 어디로 갔을까?

이종헌 입력 2016. 12. 30. 16:16 수정 2016. 12. 31.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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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해당의 북한산 인문기행 2]

[오마이뉴스이종헌 기자]

승가사 뒤편 바위에 5m 크기 마애불, 보물 제215호

▲ 북한산 순수비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탁본(왼쪽)과 김정희가 순수비 옆면에 새긴 글자(오른쪽)
ⓒ 국립중앙박물관
다산 정약용의 <승가사를 지나며>라는 시에 "용사(龍師)가 북으로 가자 큰 비석이 우뚝하고, 옥불이 동으로 오니 보전(寶殿)이 드높구나"라는 구절이 있다.

뜻인즉, 신라 진흥왕의 군대가 백제의 영토인 한강 일원을 점령하고 북방으로 진출하면서 승가사 위쪽, 오늘날의 비봉에 북한산순수비를 세웠다는 것이요, 또 하나는 조선 정조 때 연경으로부터 옥으로 만든 불상이 들어왔는데 이것이 승가사에 안치되었다는 것이다.

북한산순수비는 신라 진흥왕 16년(서기 555년), 혹은 진흥왕 29년(서기 568년) 즈음에 설치된 것으로 조선 후기 서유구, 김정희 등이 나서 진흥왕순수비로 판정하기까지 근 천여 년 동안 무학대사왕심비(無學大師枉尋碑) 또는 몰자비(沒字碑) 등으로 불려왔다.

지금은 국보 3호로 지정되어 국립박물관에 안치되는 호사를 누리고 있으나 천년의 세월 비바람에 씻기고 눈보라에 시달리며 알아주는 이 없이 고독한 세월을 묵묵히 기다려왔을 그 정의(情意)를 생각하면 아무리 무심한 돌이라도 절로 마음이 숙연해진다.

어디 진흥왕순수비뿐이랴? 승가사 뒤편 바위에는 5m 크기의 마애불이 새겨져 있는데 보물 제215호로 지정된 이 '북한산 구기리 마애석가여래좌상'은 누가, 언제, 왜 조성하였는지 알지 못한 채 오늘도 산사에는 염불소리만 가득 울려 퍼지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학자 세키노 다다스(關野貞)는 이 마애불을 고려초기 불상으로 보고 고려 조각으로서는 신라 것에 비등할 만한 우수작이라 했다 하나, 불과 두 달 만에 전국의 문화재를 졸속으로 조사한 결과라고 하니 쉽게 믿음이 가지 않는다.

그나마 월북미술가 김용준이 나서 이를 신라시대의 것으로 바로잡은 것은 그 진위여부를 떠나 우리 문화재에 대한 주체적 인식이요 적극적 관심의 발로라는 점에서 고무적인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김용준은 1947년 12월 14일자 경향신문 칼럼에서, 눈썹과 눈으로부터 코 입술이 모두 다 예쁘고 시원스런 표현이라든지 신라 석조의 특색인 턱 아래 한 곡선을 그어 아래턱을 만든 솜씨며, 얼굴 모양의 턱이 꽉 받치고 원만 후덕하고 복스러운 맛이라든지 의복과 가부좌의 자세며 팔각형으로 된 천개(天蓋)를 반쯤 돌을 파고 넣은 것과 연좌(蓮座)의 유려한 선 등을 들어 틀림없는 신라의 조각임을 주장하였다.

안타깝게도 이 '북한산 구기리 마애석가여래좌상'은 지난 1968년 무장간첩 침투사건 때 온몸에 총상을 입고 대수술을 받은 바 있으니 아무리 인심 좋은 관음보살이라도 마냥 자비만을 베풀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나만의 기우일까?

▲ 보물 215호 북한산구기리 마애석가여래좌상 보수 이전 사진으로 1968년 무장간첩침투 사건으로 인해 입은 총상의 흔적이 어깨부위에 선명하다
ⓒ 야후재팬
승가사엔 보물 1000호 승가사 석조 승가대사상도 있어

승가봉 아래 해발 580 미터의 산중턱에 위치하여 보현봉과 향로봉을 각각 좌청룡과 우백호로 삼고 멀리 인왕과 북악을 주산으로 삼아 한양 도성 인근 이천만 중생을 굽어보고 있는 승가사는 위의 마애불 외에 보물 1000호로 지정된 '승가사 석조 승가대사상'으로도 유명하다.

고려 때 이오(李?)가 쓴 '삼각산중수굴기'에 따르면, 옛날 신라 때 낭적사의 승려 수태가 승가대사의 성스러운 행적을 듣고 삼각산 남면의 승지에 굴을 만들고 대사의 모형을 새겼다는 기록이 있으니 승가사는 곧 승가대사상을 모신 사찰이라는 뜻이다.

승가대사는 중국 당나라 때 서역 출신의 승려로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때부터 승가대사를 신앙하는 유풍이 있었다. 오늘날 약사전 안에 봉안된 승가대사상은 고려 현종 15년(서기 1024년)에 광유(光儒) 등이 조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라 경덕왕 15년(서기 756년) 낭적사 수태선사가 승가굴에 승가대사상을 봉안하고 승가암을 세운 이후로 약 1300여년의 성상이 흐른 지금, 그러나 아쉽게도 승가사에는 위의 마애불과 승가대사상 외에는 이렇다 할 옛 유물이 없다.

정조 때 승가사를 중건한 성월당대선사의 부도와 탑비, 그리고 약사전 앞에 추사의 것으로 알려진 바위글씨 '가양심신(可養心神)' 이 있지만 그 역사가 일천하다. 승가사가 발간한 '승가사연기사지'를 살펴보니 역사적으로 승가사는 몇 번의 부침을 겪었고 그럴 때마다 옛 건물과 유물 유적들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조선시대만 해도 임진왜란 때 승병들의 은거처라 하여 방화 소실되었고, 병자호란 때 역시 적군에 의해 소실되었으며, 숙종 때 무충의 옥에는 장희빈이 범인을 승가굴에 은폐하였다가 폐사 지경에 이르렀고 또 최근에는 1950년 6·25 때 크게 불탔다.

천년고찰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옛 건물들은 남아 있는 것이 없으니 오늘날 푸른 기와를 머리에 인 채 고즈넉하게 서있는 대웅전이며 영산전, 명부전, 약사전, 산신각, 향로각, 종각, 서래당, 제일선방 등은 모두 6·25 이후에 다시 세운 것들이다.

청나라 황제가 하사한 옥불이 있었던 승가사

 가양심신 승가사는 해발 580미터 산중턱에 위치하여 보현봉과 향로봉을 좌청룡, 우백호로 삼고 인왕과 북악을 주산으로 삼아 한양 도성을 굽어보고 있으니 가양심신이란 마음을 수양하기에 좋은 명당길지임을 뜻하는 말이다.
ⓒ 이종헌
승가사의 역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전각이며 부도며 탑비들이 얼마나 많았을까마는 그 중에서도 정조 때 승가사에 건립되어 양반 사대부로부터 일반 백성에까지 수많은 중생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장수전(長壽殿)의 존재를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장수전이란 무엇이었던가? 다시 첫머리에 인용한 다산의 시로 돌아가 보자.

다산이 승가사를 방문했을 당시 승가사에는 청나라 황제가 하사한 장수불이라는 옥불이 있었다. 장수전은 바로 그 옥불을 안치하기 위해 새로 지은 전각이다. 사연인즉슨 이렇다.
효의왕후와의 사이에 자손이 없었던 정조는 나인 출신인 의빈성씨와의 사이에서 마침내 문효세자를 얻는다.

1782년 9월의 일이니 정조의 나이 31세 때 일이다. 의빈성씨는 더구나 정조를 15년 동안이나 애타게 만든 여인이었으니 아들을 얻은 기쁨이야 오죽했겠는가? 정조는 문효세자가 태어난 지 만 22개월째인 1784년 7월 세자책례를 올리니 이는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의 세자책봉에 해당한다.

자손이 없던 조선왕 정조가 아들을 낳아 세자 책례를 올린다는 사실을 안 청나라 조정에서 가만히 있을 리 만무했다. <일성록> 정조 8년 12월 24일 조에 정조와 영의정 서명선의 대화가 나온다.

내용인즉, 청나라에서 보내온 옥불의 처리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세자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뜻으로 청나라 황실에서 보내온 옥불을 아무리 불교를 숭상하지 않는 나라라고 해도 거절하기는 힘들었을 터, 정조는 마침내 예전부터 왕실의 원찰로 명성이 높았으나 장희빈 때 무충의 옥으로 인하여 폐사가 되다시피 한 승가사를 중건하여 옥불을 안치하기로 한 것이다.

이 옥불은 오늘날의 미얀마 산으로 청나라 황제에게 조공된 것이었으며 청나라 황제는 이를 다시 문효세자를 위한 장수불로 하사한 것이다. 어쨌거나 폐사 직전의 승가사는 청나라 황실에서 하사한 옥불의 안치소로 으리으리하게 중건되었고, 여기에 혁혁한 공을 세웠던 인물이 바로 성월당대선사이다. 현재도 승가사에는 성월당대선사의 부도와 탑비가 남아있다.

아무튼 당시 승가사는 이 미얀마 산 옥불을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1785년 승가사를 방문하여 이 광경을 목격한 무명자 윤기(尹?, 1741~1826)의 시를 보면 이 같은 사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장수전은 몇 백 척 높이의 층층대 위에 우뚝 솟아있으며 단청이 얼마나 화려한지 사람의 눈길을 빼앗을 지경이라고 했다. 그 내부에는 천정에 황금 구슬을 아로새겼고 한 쌍의 침향등과 술 장식을 드리웠으며 황제가 하사한 시가 적혀 있고 그 아래 유리로 된 상자 안에 옥불이 안치되어 있다고 했다. 구경꾼이 얼마나 많은지 흡사 시장바닥처럼 시끄럽다고도 했다.

1783년 이곳을 방문한 성균관 유생 이옥도 장수불에 관한 기록을 남긴 것을 보면 당시 장수전이 장안사녀의 기도처로서 또 유람지로서 많은 이들의 이목을 끌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러나 청나라 황실의 기대와는 달리 문효세자는 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단명한 세자가 되고 말았으니 이 무슨 기구한 운명의 장난이던가? 오늘날 장수전은 흔적도 없고 유리갑 속에 들어있다는 장수불 또한 그 행방이 묘연하다.

지난 봄날 승가사를 찾아 비구니 스님을 한 분 붙잡고 혹시 옥불의 정체를 아느냐고 물었더니 아는 듯 모르는 듯 <승기사 연기사지> 책 한 권만을 건네 준 채 총총히 사라져 버렸다.

승가사를 중창한 도원 스님이나 상륜 스님이 계시면 모를까 두 분 다 입적하신 지 오래니 옥불 친견의 기회는 애시 당초 틀렸다. 대신 오는 새해 아침에는 비봉에 올라 주말마다 촛불을 들고 광화문의 밤을 밝히는 민초들의 염원이나 조속히 이루어지도록 국태민안을 빌어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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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1월 북한산 인문기행 안내
일시? 2017. 1. 21. 10:00~
장소? 승가사 비봉 일원
일정? 구기탐방지원센타(10:00)-승가사-비봉-향로봉-향림사지-불광사 탐방지원센타
주제? 추사 김정희와 진흥왕순수비 그리고 마애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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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월간마운틴 1월호에 게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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