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살인사건' 가해자의 기묘했던 최후진술

신필규 2016. 12. 26.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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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사과할 줄 모르는 사회.. 우리가 제대로 된 사과 요구해야 하는 이유

[오마이뉴스신필규 기자]

언젠가 한 친구가 온라인에서 언어 폭력을 겪은 일이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여성을 향한 공격이 그렇듯, 그 말들은 심각한 성적 모욕을 담고 있었고 결국 친구는 그들을 신고하기에 이르렀다.

보통의 인터넷 트롤들처럼, 가해자들은 경찰에게 연락을 받고 나서야 사태의 심각함을 깨달았고 그제야 합의와 선처를 호소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친구는 몇몇 가해자들의 사과문을 받아 보았는데, 그녀의 말에 따르면 글의 상태가 잘못된 사과문의 표본이라 할 만큼 심각했다고 한다.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잘못했는지에 대한 성찰은 없고 고소로 어려워진 자신의 처지,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라는 시답지 않은 변명만이 가득했다고 한다. 심지어 '너도 잘한 것은 아니지 않냐'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결국 그 친구는 사과문을 반려하고 다시 쓰기를 요구했다. 그렇게 온 사과문이 여전히 부족하다면? 그러면 또 쓰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지인과 이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아마 가해자들이 속으로 이를 갈고 있지 않을까 질문했다. 그러자 그는 '그게 반성을 안 했다는 증거야'라고 답했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만약 정말 자기가 한 일을 곱씹어보고, 그것이 어떤 잘못인지를 제대로 안다면, 사과문을 재차 쓰는 일에서 분노를 느낄 리 없을 테니까. 거꾸로 그것은 이들이 제대로 된 사과를 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반성의 첫 단계는 성찰이다. 이들의 미안함은 그런 것이 아니라, 경찰이 자신에게 연락까지 오는 불리한 상황 때문에 나왔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보통 사과가 아니라 '면피'라고 불린다.

가해자들의 사과가 지니는 모순

 지난 5월 24일 강남역 인근의 건물 공용화장실 '여성 살인사건' 피의자 김모(34)씨가 살인사건 현장 검증을 모두 마치고 경찰호송차량으로 이동하고 있다.
ⓒ 최윤석
내가 이 일을 다시 떠올리게 된 건, 얼마전 열린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재판 소식을 들은 때였다. 이날 가해자 김씨의 최후 진술은 참으로 기묘했다. 그는 피해자에 대해선 '면목이 없고 마음이 아프지만', 자신의 범죄에 대해선 '반성이나 후회의 마음이 들지 않는다'고 답했다. 여기에 '본의 아니게 화가 나서' 범행을 저질렀다는 진술이 덧붙여졌다.

내가 그의 말에 주목한 건 흔히 만날 수 있는 범죄 가해자 진술과의 차이점 때문이었다. 피해자에 대한 형식적인 미안함과 자기 변명에 가까운 동기 진술은 여느 범죄자의 것과 같았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와 달리, 그는 자신의 범죄를 뉘우친다는 말 대신 반성도 후회도 하지 않는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나는 그의 진술이, 통상적인 가해자들의 말이 지니는 모순을 드러냈다고 생각한다. 김씨의 말에 따르자면 그의 범죄는 자신의 생각이나 의지(본의)가 아닌 '화' 때문에 저질러 졌다. 그리고 그 '화'는 그의 진술에 따르면 '주방 보조원 일을 하며 발생'했으며, 평소에 자신을 무시해 왔다던 '여성'들에게 표출되었다.

이런 식의 논리대로라면, 이 사건에서 그의 책임은 없다. 범죄를 저지를 것은 그가 아니라 속에 발생한 '화'였으며, 이것은 외부의 원인으로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성찰은 자기 내부를 향하는 일이다. 때문에 이런 구도에서라면, 자기가 저지른 것임에도 그가 스스로의 범죄를 반성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그리고 반성할 수 없는 일을 후회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그들이 사과할 줄 모르는 이유

때문에 자기가 저지른 일의 의미와 피해자의 고통보다, 가해의 불가피함과 우발성을 강조하는 사과는 제대로 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진정성 없는 사과'란 이런 것들을 지칭하리라 생각한다. 그것은 태도와 표현의 문제라기 보다는 사과가 전제하는 일들, 깊이 있는 성찰과 피해자의 고통에 대한 이입을 했느냐의 문제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가해자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받아내는 게 그렇게까지 중요한 일이냐고. 피해자가 빨리 회복하게 하고 가해자가 제대로 대가를 치르게 만드는 식으로,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에 집중하는게 낫지 않겠냐고. 동의한다. 가해자의 개심이 이미 벌어진 일을 수습하는데 큰 영향을 주진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제대로 된 사과를 받아내는 것이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의 한 부분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왜냐하면 사과는 꼭 필요하지만, 사실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과 스스로가 했던 일을 돌아보고, 그것들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부단한 노력 없이는 익숙해지기 어려운 노동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는 이러한 '노동'이 특정 부류의 사람들에게만 강요되는 경향이 있다.

손쉽게 눈에 띄는 소수자들이나 권력있는 사람들에 의해 일상이 좌지우지되는 사회적 약자층이다. 이들은 자신의 잘못이 자기 정체성 자체의 흠결이 되거나, 다른 사람의 심기를 건드리는 경우 맹렬한 공격을 받는다. 때문에 시시각각 스스로를 점검하고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살핀다. 이런 사람들에게 사과가 전제하는 기술들은 생존 필수품이나 다름 없다.

제대로 된 사과를 계속 요구해야 하는 이유

나는 오랜 시간 사람들이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뻔뻔해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야 깨닫게 된 건, 그들이 사과를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애초에 할 줄을 몰랐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남자 연예인들은 갖은 막말을 해도 그것이 '재미'로 포장되지만, 여성 연예인들은 짝다리만 짚어도 자필 사과문을 써야한다.

성소수자들이 축제에서 노출을 하면 그들은 곧바로 음란한 존재가 되지만, 어떤 이성애자가 벌거벗고 거리를 돌아다닌다고 해도 그들의 성적 지향이 공격 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동남아시아 이주 노동자들은 지금도 범죄의 온상인냥 취급 당하고 추방을 요구 받지만, 한국 사회는 서구권 이주 노동자의 범죄에 같은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누군가는 무결점의 존재가 되어야만 하고 스스로의 무해함을 증명하기 위해 분투하는 동안, 어떤 이들은 타인에게 실질적으로 해악을 끼치면서도 그것의 의미를 알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러니 이들이 사과를 직접적으로 요구 받는 순간에도 그것을 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말하자면 그들이 반성에 무능한 것 이면에는 일상적인 권력 관계 속의 불평등함이 숨어있다. 때문에 제대로 된 사과를 받아내는 것은 중요하다. 성찰하지 않았다면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다른 사람을 살피지 않았다면 살피게 만들어야 한다. 기득권자로서 자신에게 불필요했던 노동을 하도록 만들어야한다. 나에게 그들의 사과를 받는 것은 기울어진 권력을 재배치 하는 작업의 연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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