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새 고속도로' 올라탄 AI, '바이러스 행성' 되는 지구
김현권 의원 입수 '검출내역' 봤더니
"살아있는 오리과 철새에서 늘어나"
종간 전염으로 유럽과 북미 대륙 확산
시베리아 등은 바이러스 '환승터미널'
'차단 방역'도 한계 있을 수밖에
[한겨레]
2003년부터 철새를 포획해 시료를 정부기관에 전달해온 이한수 한국생태환경연구소장은 2010년 겨울 만경강을 기억한다.
“그때 청둥오리를 포획했는데, 처음으로 H5N1형 바이러스가 검출됐지요. 살아있는 철새에서 조류인플루엔자(AI)가 나오긴 처음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조류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는 새를 찾기는 이 소장에게 ‘하늘의 별 따기’였다. ‘캐넌넷’이라고 불리는 그물포에 걸린 철새 몇 마리를 잡은 뒤 혈액 3㏄와 입 분비물, 항문 배설물을 채취한다. 그리고 실험실에서 조류인플루엔자 항체가 생겼는지 본다. 그해 조류인플루엔자가 검출된 사례는 그 청둥오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6년이 흐른 지금은 다르다. 이 소장이 22일 말했다. “H5N8형이 유행한 2014년부터 상황이 급변했어요. 야생조류에서 조류인플루엔자가 계속 나왔습니다. H5N6형이 유행하는 올해는 더해요. 전국 어디서든 잡아도 한 마리는 나올 지경입니다.”
이런 결과는 환경부가 22일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 김현권 의원(더불어민주당)에게 제출한 2009~2016년 ‘야생조류 바이러스 검출 내역’에서도 확인된다. 2010~11년 겨울, 살아있는 청둥오리 1건에서 H5N1이 검출됐으나, 2013~14년과 2014~15년에는 각각 6건의 포획 작업에서 H5N8이 검출됐고, 올겨울에는 현재까지 통계로 잡힌 건만 9건(H5N6, N5N8)이다. 바이러스 항체를 지닌 철새는 쇠오리, 청둥오리, 흰뺨검둥오리 등 모두 오리과의 물새였다. 이 소장이 말했다.
“(2010년대 초반) H5N1의 시대와 지금의 H5N8, H5N6의 시대는 다릅니다.”
한반도 철새에서도 조류인플루엔자가 유행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2014~15년 대유행’의 수수께끼
살아있는 철새가 바이러스에 감염이 됐는지는 그동안 ‘조류인플루엔자 세계적 확산’의 수수께끼를 푸는 핵심 열쇠였다. 과거 철새 사체에서는 종종 바이러스가 검출됐다. 하지만 산 철새가 바이러스 항체를 가지고 있다는 건 좀 다른 얘기였다. 건강한 철새가 국경을 넘나들며 그 무엇보다 빠른 ‘바이러스의 운반책’ 노릇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14~15년 조류인플루엔자(H5N8) 대유행 사태는 그런 점에서 과학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과거보다 확산 속도가 이례적으로 빨랐던 ’세계적 대유행’이었기 때문이다. 맨 처음 시작점은 한국 고창의 오리농장과 야생 가창오리 100여마리가 집단 폐사한 인근의 동림저수지였다. 그해 1월16일부터 퍼지기 시작한 H5N8형 바이러스는 191일 동안 1396만마리의 닭과 오리를 살처분으로 내몬 뒤 한여름인 7월25일이 되어서야 잠잠해졌다. 가을이 지나자 H5N8은 영국, 네덜란드, 독일 등 유럽 여러 나라와 미국, 캐나다 등 북미의 가금류 농장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국도 두 달 뒤인 9월 다시 창궐해 이듬해 5월까지 511만마리를 살처분했다. 반년 남짓 만에 조류인플루엔자가 북반구를 덮어버린 것이다. 아시아에서 북미로 확산된 것도 이례적이었다.
조류인플루엔자의 대유행을 밝혀내기 위해 국제 공동연구가 시작됐다. 16개국 과학자들이 인간 및 가축, 철새 이동 정보를 분석했다. 그 결과가 지난 10월 과학전문지 <사이언스>에 발표됐다. ’조류인플루엔자 H5N8의 세계적 확산과 야생철새의 역할’이라는 논문의 결론은 의미심장했다. “빠른 시간 바이러스를 운반한 건 장거리 이동 철새다.”
이 논문은 바이러스 대유행의 전파 경로를 ’한국→시베리아→유럽’과 ’한국→베링해→북미’의 두 가지로 파악했다. 살아있는 닭·오리 등의 유통, 교통수단을 통한 전파 등 인간에 의한 장거리 이동은 데이터를 봤을 때 가능성이 적은 것으로 분석했다. 바이러스는 ’철새들의 고속도로’를 타고 전세계를 누볐다. 시베리아, 베링해, 몽골 북부 등 다양한 종과 무리가 모이는 중·고위도 철새 번식지는 ‘바이러스의 환승 터미널’이 됐다. 한국에서 월동을 마친 철새들은 2014년 1~3월 시베리아의 번식지로 출발했다. 철새를 숙주 삼은 바이러스는 시베리아 번식지에서 다른 철새를 만나고 다시 그 철새는 베링해를 거쳐 2014년 12월 미국 서해안에 도착했다. 유럽 방향으로는 시베리아에서 출발해 2014년 11월에서 이듬해 2월에 도착했다. 국제 공동연구에 참여한 권정훈 건국대 수의대 조류질병학실험실 연구원은 23일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이러한 현상을 철새들의 ’릴레이 전파’(relay transmission)라고 한다. 같은 종뿐만 아니라 다른 종 사이에도 전파가 이뤄질 수 있다”고 말했다.
철새만 막는다고 되나
그렇다면 왜 최근 들어 철새에서 조류인플루엔자가 늘어난 걸까. 국제 공동연구팀에 참가한 건국대 수의대의 송창선 교수는 이렇게 추정했다.
“H5N1은 중국에서 주로 닭에서 나왔습니다. 반면 최근 유행하는 H5N8과 H5N6는 오리에서 주로 나타났지요. 철새에 오리류가 많습니다. H5N8과 H5N6가 철새로 들어가 쉽게 적응한 것입니다. 요즈음엔 (그물로) 10마리, 30마리 잡으면 1마리 정도는 감염된 철새가 나올 정도입니다.”
조류인플루엔자는 전파 경로를 차단하는 것과 동물의 면역력을 강화하기 위해 사육환경을 개선하는 방법 등 두 가지 접근법이 필요하다. 야생조류가 조류인플루엔자를 ’감기’ 정도로 앓고 지나가는 것처럼, 사육환경이 쾌적한 동물복지 농장의 닭·오리들은 비교적 피해가 덜하다. 그러나 공장식 밀집 농장은 수십만명이 탄 거대한 크루즈와 비슷해서 위생 관리가 잘되더라도 한번 파도에 휩쓸리면 재난에 가까운 피해가 난다.
전파 경로를 차단하는 ‘차단 방역’도 한계가 있다. 국제 공동연구팀도 뾰족한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연구팀은 논문에서 “철새의 번식지인 아북극 지역에서 바이러스 교환이 이뤄진다. 이곳을 중점 감시해 위험을 예고하는 차단 방역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철새 솎아내기 등 직접적인 생태 개입은 효과가 없다고 밝혔다. 워낙 빠른 속도로 철새들이 드나들기 때문에 통제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시베리아 등 아북극 지역에서 철새가 오가지만 중국 북부에서 직접 유입되기도 한다. 중국은 다양한 조류인플루엔자의 저장고다. 한국에서 살처분 등을 통해 박멸해도 얼마 뒤 중국의 바이러스가 한국으로 건너오는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 송창선 교수는 “중국 쪽에서 바이러스 정보 공유를 꺼리는 게 큰 문제”라고 말했다. 김현권 의원은 25일 “철새 도래지와 농장의 거리 제한을 두는 등 오리농장의 관리가 핵심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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