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영웅' 김영옥

최윤필 2016. 12. 25.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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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옥(1919~2005)은 한국계 미국인으로 2차대전과 한국전쟁에 참전, 한국과 미국 이탈리아 프랑스의 4개국 정부 무공훈장을 포함해 19개 훈장과 메달을 받은 전쟁 영웅이다.

보병으로 입대해 사관후보생으로 장교가 됐고, 한국전쟁 땐 전선에서 소령으로 승진해 미 육군 최초 아시아계 보병 대대장이 됐다.

최근 작고한 한국계 미국인 수영 다이빙 영웅 새미 리(1920~2016) 등과 함께 LA 한인 및 아시아계 이민사회 권익ㆍ봉사활동으로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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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12.29

한국계 미 육군 김영옥이 2005년 오늘 별세했다.

김영옥(1919~2005)은 한국계 미국인으로 2차대전과 한국전쟁에 참전, 한국과 미국 이탈리아 프랑스의 4개국 정부 무공훈장을 포함해 19개 훈장과 메달을 받은 전쟁 영웅이다. 보병으로 입대해 사관후보생으로 장교가 됐고, 한국전쟁 땐 전선에서 소령으로 승진해 미 육군 최초 아시아계 보병 대대장이 됐다. 대령으로 전역한 뒤에는 LA 지역 한인 및 아시아계 시민 권익, 아동 청소년과 여성 권익보호에 힘썼다.

미주 언론인 한우성이 쓴 ‘영웅 김영옥’(북스토리) 등에 따르면 그의 삶, 특히 전공(戰功)은 할리우드 영화를 방불케 한다. 이민자 2세로 미국서 태어난 그는 LA 시립대를 중퇴한 뒤 이런저런 일을 시작했지만 마땅한 직업을 구하지 못했다고 한다. 2차대전 발발 직후 미 육군 모병소에 갔지만 거기서도 아시아계라는 이유로 거절 당했다. 그가 군인이 된 건 모병법이 바뀐 1941년 1월 말이었다. 사관학교를 거쳐 소위 계급장을 달고 배치된 부대는 442 보병연대 100보병대대. 일본 등 아시아계 2세들로만 이뤄진 부대였다. 대대장이 그가 한국계임을 알고 소대원과의 갈등을 우려해 전출을 제의했으나 “여기엔 한국인도 일본인도 없다. 우리는 모두 미국인이며 같은 목적으로 싸우는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는 탁월한 리더였다.

유럽 이탈리아ㆍ남프랑스 전선에 투입된 100대대 병사들은, 흑인들이 그랬듯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더 용맹스러워야 했다. 소대장 김영옥의 무훈 중에는 총격전 속에 독일군 진지로 돌격해 부상을 입은 채 기어이 수류탄으로 나치 기관총 벙커를 무력화했다는 일화, 새벽에 부하 한 명과 단 둘이 적 진지에 잠입해 두 명을 생포해왔다는 일화 등이 있다.

전후 대위로 전역해 세탁소를 운영하던 그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재입대해 제7보병사단 31보병연대 정보참모로, 야전 지휘관으로 활약했다. 51년 1.4후퇴 이후 중부전선을 두고 공방을 벌이던 때 그의 대대만 도드라지게 약진하는 바람에 적 진영으로 오인한 아군의 포격을 받고 부상을 입었다는 ‘전설’도 있다. 그는 미 육군보병학교 교관과 주한미군군사고문단 등을 거쳐 72년 예편했다. 최근 작고한 한국계 미국인 수영 다이빙 영웅 새미 리(1920~2016) 등과 함께 LA 한인 및 아시아계 이민사회 권익ㆍ봉사활동으로 여생을 보냈다. 김영옥은 2005년 12월 29일 작고했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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