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립학교, 국정교과서 방파제로 나선 까닭은

박은하 기자 2016. 12. 24. 15:3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국정 발행 조속 이행” 촉구… 박근혜 대표 정책의 구원투수로 나서
이준식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오른쪽 두 번째)이 28일 오후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중학교 역사 1·2, 고등학교 한국사 등 총 3종의 국정교과서 현장 검토본을 공개한 후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낙년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이주영 건국대 명예교수, 최대권 서울대 명예교수, 이 부총리, 김정배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서성일 기자

11월 25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노웅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준식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에게 역사교과서 국정화 방침을 철회할 의사가 있느냐고 물었다. 이 부총리는 “28일 현장검토본을 공개한 뒤 이후에 현장에서 적용할 방법을 강구하겠다. (반대 의견을) 무겁게 받아들이겠다”고 답했다. 교과서는 예정대로 발행하지만 채택을 일선학교에 강요하지 않겠다고 해석될 수 있는 말이었다. 청와대는 “교과서 국정화를 예정대로 추진하겠다”고 밝혀 온도차를 보였다. ‘태블릿 PC’ 보도로 박근혜 대통령 탄핵 여론이 임계점을 넘어서기 직전 역사교과서 국정화 관련 청와대의 편은 없는 듯했다.

한국사립초중고법인협의회(법인협의회)는 11월 30일 “역사교과서 국정 발행을 조속히 이행해 오는 3월 신학기부터 학교에서 쓸 수 있도록 하라”고 정부에 촉구했다. 사학법인회는 전국 1653개 초·중·고교를 운영하는 900개 법인 이사장들의 모임이다. 이경균 사학법인회 사무총장은 “28일 국정 교과서 현장검토본 공개 후 협의회 자체적으로 내용을 면밀히 검토했는데, 국정 교과서 자격이 충분해 보인다”며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잘 부각됐고, 모든 면에서 좌우 어느 쪽으로 치우침 없이 균형 있게 서술됐다”고 밝혔다. 사학법인회 대전지회는 일선학교에 국정 교과서 홍보물을 배포했다가 교사들의 반발을 샀다. 12월 7일 전국 1610개 사립 중·고교 교장들의 모임인 사단법인 대한사립중고등학교장회(교장회)는 성명서를 내고 “국정 역사교과서가 과거의 검정 교과서에서 나타났던 좌편향적 시각의 기술들을 걷어내는 데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했다. 박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상태에서 사립학교가 박 대통령 대표 정책의 구원투수로 나선 셈이다.

‘법인’이 ‘학교’보다 먼저 반응했다. 사립학교 체제에서 법인은 학교를 소유하고 설립·운영을 위한 관리자의 역할을 맡고, 실제 교육은 학교가 담당한다. 성명의 내용 면에서도 교장회가 법인협의회보다 여론의 눈치를 살피는 모양새를 띤다. 양 측 다 모든 회원 법인과 학교가 의견수렴에 참여하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법인협의회는 11월 24일 총회를 열고 회장단(최현규 회장과 전국 16개 시·도 회장들)에게 국정 역사교과서 현장검토본이 공개되면 내용을 검토해 입장을 발표하도록 위임해 입장을 정했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뒤 교장회 관계자는 <주간경향>과의 통화에서 “16개 시·도 회장단들에게 물어 의견을 구했다”며 “발행된 역사교과서를 반드시 채택하겠다는 뜻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정의화 사학개혁국민운동본부 상임대표(상지대 교수)는 “이 일은 한국 사립학교 체제에서 법인과 학교의 권력관계를 상징한다”며 “법인이 학교의 인사권을 갖고 있고, 지역 시민사회나 학생·학부모 대표 견제 없이 운영의 전권을 갖는 한국 사학체제에서 학교는 법인에 완전히 종속된다”고 말했다.

사립학교와 관련된 각종 정책에서도 법인협의회가 전면에 나선다. 2005년 열린우리당의 사립학교법 개정안 때가 대표적이다. 법인협의회는 1992년 결성됐다. <수학의 정석> 저자 홍성대 상산학원 설립자 겸 이사장(79)이 초대 회장을 맡았다. 홍 이사장은 명예회장으로 2005년에도 사립학교의 입장을 대변해 언론 인터뷰에 나서곤 했다. 조용기 우암학원 설립자(79), 오정석 부산 동래학원 이사장(74), 김하주 영훈학원 이사장(83)을 거쳐 현재 최현규 백강학원 이사장(68)이 회장을 맡고 있다. 2014년 영훈국제중 입시비리로 실형을 선고받은 김 이사장을 제외하고 나머지 역대 회장은 고문으로 위촉돼 있다. 지역 회장을 맡고 있는 부회장 겸 이사가 16명이고, 일반 이사가 34명이다. 이경찬 우진학원 이사장, 조하금 상산학원 이사장이 감사를 담당한다. 언론 인터뷰 등 실무는 이경균 사무총장(60)이 맡고 있다. 법인협의회는 지난 1월 교육부 차관 간담회에서 안건 중 하나로 국정 교과서 문제를 논의했는데, 이 자리에 최현규 회장, 윤남훈 회장과 함께 이 사무총장이 참석했다. 이 사무총장은 서울시교육청 교육행정국장 자리에서 2014년 말 사직하고 지난해 상반기에 법인협의회 사무총장으로 이동했다. 이 전 국장이 2014년 재직한 교육행정국은 사립법인 인·허가, 법인 임원 해임처분, 사립학교 적립금 관리 등이 주된 업무여서 유관기관 재취업 논란이 일었다.

현역 실무진이라 할 수 있는 최 회장과 지역회장 16명은 모두 재단 설립자 2세 혹은 3세다. 오정석 이사장의 부친 오태환 이사장(1955년 작고)은 호주 감리교 선교회에서 1895년 설립했다가 경영난과 일제의 강요로 문 닫은 구일학원을 다른 부산지역 유지들과 함께 인수해 1940년 동래학원을 설립했다. 윤남훈 서울회장은 고 윤기안 삼산학원 설립자(1995년 작고)의 손자다. 윤기안 이사장은 평안북도 기독교 집안 출신으로 3·1운동에 참여해 1982년 12월 국민훈장 동백장이 추서됐다. 동래학원은 예외적 경우로 법인협의회에 속한 대부분 학교는 1960~70년대에 설립됐다.

법인협의회가 입법과 관련해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분야는 이상민 민주당 의원과 이장우 새누리당 의원이 발의한 사립학교법 개정안을 막는 일이다. 이상민 의원은 지난 7월 사립학교도 관할 지방교육청에 위탁해 공개채용으로 교원을 선발하도록 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현행법에는 교원 신규임용 시 시험 등 공개채용 절차를 거치도록 한 공립학교와 달리 사립학교의 경우 이사회 의결 등의 절차를 통해 임용한다. 사립학교의 채용비리 등이 불거진 데 대한 조치였다. 법인협의회는 “학교법인의 개별적 교원 채용방법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개별 학교법인의 자율성을 저해하는 위헌적인 것으로 강력히 반대한다”고 밝혔다. 교원을 임용고시를 통해 선발하도록 하는 것이 사학의 자율성을 침해한다는 것이다.

이 의원은 보도자료를 통해 “대부분의 사립학교 교원 인건비가 국고에서 지원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본 법안은 사립학교에 대한 무리한 간섭이라고 보기 어려우며, 사립학교 교원 채용에 있어 소위 빽이나 금품 관행이 사라지고 실력과 자질을 충분히 갖춘 교원이 공정하게 채용될 것”이라고 밝혔다. 법인협의회는 사학법인에 2명의 개방형 외부 이사를 두도록 한 2005년 사학법 개정안도 사학 자율성 침해라며 반대했다.

이장우 의원의 법안은 농어촌학교 통·폐합에 관한 것이다. 이 의원의 법안은 일정 규모 이하 소규모 학교가 2021년까지 스스로 폐교하면 인센티브를 준다는 내용이었다. 법인협의회는 법안의 취지에 동의하지만 농산어촌 소규모 학교 문제 해결을 위해 ‘2021년’이라는 기한을 법률안에서 삭제할 것을 주장한다.

정부로부터 독립된 사립학교의 자율적 운영을 강조하면서 국정 역사교과서를 찬성하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정의화 사학국본 상임대표는 “사립학교의 자율적 운영이 아니라 법인 소유자가 간섭받지 않을 자유를 뜻한다”며 “한국 사학법인들이 말하는 자율성의 허구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사립학교의 수난시대는 박정희 정권 시절이었다. 사학재단도 피할 수 없는 ‘가난’과 ‘정부의 학원통제’가 이유였다. 일제 말기 국민학교 취학률은 54%였는데, 교실이 부족해 2부제를 실시하는 상태였다. 1949년 취학률은 89%로 폭등했다. 1946년 교육예산 11억원 중 68%인 7억3000만원이 초등교육 경비로 쓰였는데, 이는 학교 운영비의 30%에 불과했다. 70%는 학부모들의 호주머니에서 나왔다. 사립학교의 재정은 열악했고, 입시경쟁은 치열했다. 이 틈을 노린 입시비리가 판을 쳤다. 1960년대 말까지 사립학교교장연합회의 주된 요구사항은 학교 운영을 위한 수업료 인상이었다. 인상률은 30%까지 주장하기도 했다. 사학의 자율성은 걸핏하면 침해됐다. 1963년 학생들의 한일협정 반대시위를 막지 못했다고 부산 동래중·고등학교 교장이 해임당하는 사건도 있었다. <동아일보> 1967년 6월 27일자 기사 ‘교장은 약하다-동래중·고교 교장 해임사태가 준 충격’이라는 기사에서 “교육자의 말로는 그늘 속에서 천대받는 삶”이라고까지 표현했다. 정부 고위층의 지시로 부정입학을 시켰다가 발각나면 학교장이 오욕을 뒤집어쓰고 물러나는 사태도 소개했다.

독재정권과 사학재단 간 결탁은 1970년대를 거치면서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이 시기는 경제성장에 힘입어 중등교육에 대한 수요가 폭발했다. 중학교 진학률이 1970년 50.1%에서 1979년 71.6%로, 1980년에는 95%로 성장했다. 공립학교만으로는 교육열을 감당할 수 없어서 전국 곳곳에 사립학교가 생겨났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정부 차원에서도 고등학교 교육 이상을 받은 숙련된 노동자가 필요한 시기였다. 또한 유신체제로 인해 정신교육, 민족교육, 군사교육을 학교에서 충실히 이행해야 했다. 정부는 돈을 들여 학교를 세우는 대신 학교 설립을 민간에 맡겼다. 토지만 있으면 건축비를 지원해줬고, 수익용 재산도 5000만원 정도만 갖추면 학교 설립을 허용했다. 학교는 우후죽순 생겨났지만 여전히 부실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고, 비리가 판을 쳤다. 정부의 교육방침을 따르는 한 사학재단 이사들은 극심하게 규제받지 않았다. 건실하게 살아남은 사학도 있었지만, 비리사학의 대명사 ‘상지대’가 설립자 가문을 떠나 김문기 전 이사장에게 인수된 때도 이 무렵이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과 교육운동연대, 사립학교개혁국민운동본부는 12월 6일 공동성명을 내고 “부패사학 지배세력은 국정농단 세력과 친밀한 관계에 놓여 있고, 이들의 기득권 유지는 정치권력과의 유착관계 형성을 통해 가능했다”며 “이번 사학 지배세력의 ‘국정 역사교과서 구하기’ 행태는 권력에 기생해 온 사학의 태생적 한계가 반영되고 있다”고 밝혔다.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학과 교수는 “1960년대만 하더라도 민립사학의 전통이 있었지만 1970년대 들어 사학 이사장과 정부 간 결탁이 일어났다. 특히 박정희 독재정권의 신화화가 학교 내에서는 이사장 및 설립자 일가의 신화화와 맞물려 일어났고, 이 현상이 1980년대를 거치며 심화됐다”고 말했다. ‘민립’과 ‘사립’의 결정적 차이는 학교를 국가가 운영하지 않더라도 특정인이 배타적으로 소유하는가, 지역사회 및 다양한 주체들이 함께 운영하는가에 달려 있다. 법인협의회 임원의 절반가량이 70대 이상 고령자이다(표 참조). 법인협의회는 교원노조의 활동이나 학생인권조례 등 학교의 내부 권력을 분산시키는 일에 일관되게 반대입장을 보여 왔다. 김재옥 전교조 광주지부 정책실장은 “국민 80%가 반대하는 국정 교과서를 강행해 학원 지배를 강화하려는 발상은 시대착오적”이라며 “사학에 대한 나쁜 국민 여론을 더 부추길 수 있다”고 말했다. 전국 1187곳 중·고교 역사교사들은 역사교과서 국정화 불복종을 선언한 상태다.

박정희 제3공화국 시절 자율성을 통제받다가 4공화국 시절 기득권의 일부로 거듭난 사학은 국정 교과서의 최초 옹호자이자 최후 보루가 됐다. 새누리당 원내대표 선거에 비박계의 대표주자로 출마했던 나경원 의원은 “(당을 친박에게 맡겨서는) 좌파들에게 정권이 넘어간다”고 말했다. 나 의원의 부친은 학교법인 홍신학원을 소유하고 있다. 새누리 탈당의사를 밝힌 김무성 전 원내대표는 2015년 국회 내 국정 교과서 초청 강연에서 “역사학자 90%가 ‘좌파’”라고 발언했다. 박 대통령이 물러나도, 대안 보수정당이 만들어져도 보수 주류세력은 사립학교의 지배자들과 같은 이념을 공유한다. 사립학교는 ‘영원한 제국’으로 남을 수 있을까.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