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포퓰리스트]⑨ 막말은 나의 힘..필리핀 '로드리고 두테르테'

황윤태 인턴 기자 2016. 12. 23.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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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현지시각), 빈민가 출신의 복싱 챔피언 매니 파퀴아오(Manny Pacquiao)가 캄보디아에 나타났다. 손에는 마우스피스도, 글러브도 들려있지 않았다. 하원에서 2선을 지낸 후 상원에 진출해 정치인이 된 파퀴아오는 말쑥한 흰 셔츠에 필리핀 국기가 그려진 뱃지를 달았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로드리고 두테르테(Rodrigo Duterte) 필리핀 대통령이 있었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과 매니 파퀴아오 필리핀 상원의원이 주먹을 쥐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최근 두테르테 대통령은 “파퀴아오는 내 후임이 될 자격이 있다”며 전폭적인 신뢰를 보냈다. / 블룸버그 제공

두테르테 대통령은 최근 전방위 외교에 힘쓰고 있다. 전통적 우방 미국과는 거리를 두고 중국, 동남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에 공을 들이고 있다. 국제 사회에서 주목도 받고 있다. “차가 막혀서 짜증났는데 원인이 교황 방문 때문이었다”며 “교황도 개자식” 등 과격한 발언으로 존재감을 높이고 있다. 구설수에 오르고도 “모든 욕설에는 이유가 있다”며 “욕 뒤에 숨겨진 이면을 보아야 한다”고 되레 목소리를 높인다.

과격한 발언 뒤에는 높은 지지율이 있다. 지난달 29일 실시된 여론조사에서는 대통령 국정수행에 지지한다는 응답이 76%에 달했다. 오랜 시간 시장직을 역임했던 다바오 시에서는 88%의 높은 지지율을 기록했다. 필리핀 내 가장 큰 사회문제로 지적되던 마약문제에 대한 강경 대응이 많은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 지방 정치인 집안의 ‘욱하는 아들’...개과천선 후 사법시험 합격

로드리고 두테르테는 1945년 남부 레이테의 주도인 마신(Maasin)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중국 푸젠 시먼(Ximen) 출신 이민자였다. 1951년 민다나오 섬의 다바오에 정착한다. 아버지 비센테 두테르테(Vicente G. Duterte)는 변호사였고, 어머니 솔레다드 두테르테(Soledad Duterte)는 교육자인 동시에 시민단체의 리더였다.

아버지 비센테 두테르테는 변호사 생활 이후 정치에 뛰어들었다. 다나오 시장을 지낸 이후 다바오 시가 다아보(Daavo) 주에서 분리되기 직전 주지사를 지냈다. 1965년에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Ferdinand Marcos)의 행정비서관으로 중앙 정치에 진출했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은 1972년 계엄령을 선포하고 독재 정치를 휘둘렀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필리핀 ‘스타’와의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마르코스에 대한 의리를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사회 지도층이었던 부모님과 달리, 로드리고의 성격은 고상하지 못했다. 불같은 성격 때문에 여러번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자신을 모욕하던 일진 학생을 총으로 쏴 버린 적이 있었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부정 행위로 인해 퇴학을 두 번이나 당했다. 이후 다이고스 성 십자가 대학(Holy Cross College of Digos)에서 중등 교육을 끝마쳤다.

1968년 마닐라 라씨움 대학(Lyceum of the Philippines in Manila)에서 정치학 학사를 취득했다. 1972년에는 산 베다 법학대학(San Beda College of Law)에서 법학 학위를 취득한 직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두테르테는 현재 동거 중이다. 1973년 사법시험 합격 후 엘리자베스 짐머만(Elizabeth Zimmerman)과 결혼해 1남 1녀를 낳았지만, 2000년 결혼무효로 헤어졌다. 카톨릭 국가인 필리핀에서는 이혼(Divorce)대신 결혼무효(Marriage annullment)라는 법적 조치가 있다. 이후 25살 연하의 오니렛 아반세나(Honetlet Avancena)와 동거 중이다. 아반세나와의 사이에도 딸이 있다.

◆ 민병대 이끌고 ‘범죄와의 전쟁’ 나선 두테르테…합법 여부에 대한 논란 여전

1970년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다바오 시 검찰에서 검사로 근무했다. 검사로 재직할 당시 두테르테는 범죄자들에게 악명높은 검사로 이름을 떨쳤다.

1988년 두테르테는 검사직을 사직하고 민주필리핀당(PDP-Laban)에 입당하면서 정치 생활을 시작했다. 그 해 선거에서, 다바오 시장에 당선됐다. 두테르테 가문이 다바오 시에서 유력한 정치 가문이었기 때문에 당선은 어렵지 않았다.

시장 당선 이후 두테르테는 ‘범죄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우선, 사병부대인 다바오 척살대(Davao Death Squads)를 창설했다. 이를 통해 무법천지였던 다바오 시의 범죄율을 크게 낮췄다. 다바오 시내 도처에 CCTV를 설치하고, 차량 속도 제한을 뒀다. 또한, 공공 장소와 시설에서의 흡연을 전면적으로 금지했다. 필리핀에서 최초로 911 서비스를 도입한 것도 다바오 시다.

또한 부정부패를 뿌리뽑아 다바오를 상업도시로 변모시켰다. 대통령 당선 직전이던 2015년 다바오 시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안전한 도시에 뽑히기도 한다. 이를 바탕으로 22년간 7차례 연임했다. 3번 이상 시장을 할 수 없는 연임 제한 규정에 걸려 선거에 나올 수 없게 되자, 2010년 딸 사라 두테르테 카르피오(Sarah Duterte Carpio)를 선거에 내보내 당선시켰다.

필리핀에서 경찰과 검찰 등 공권력은 부정부패 앞에서 유명무실했다. 마약사범들이 관료들에게 뇌물을 주고 처벌을 피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두테르테의 강력한 정책은 국민들에게 환영받을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두테르테 시장의 해결방식이 합법적이지 않았다는 데 있다. 2010년 국제 인권단체 휴먼라이트 워치(Human Right Watch)와 국제사면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다바오 척살대(DDS)가 처형했다는 이들은 범죄자라는 의심만으로 처형을 당했다. 두 단체는 1998년부터 2008년까지 1000명 이상의 실종 사건에 이들이 관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마약 뒤에 숨은 ‘진짜 문제’ 불평등…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분노

로드리고 두테르테 민주필리핀당 대선 후보가 지난 5월 필리핀 대선에서 승리한 직후 주먹을 불끈 들어올리고 있다. 당선 후 두테르테 대통령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강력한 범죄 퇴치 의지를 보였다. / 블룸버그 제공

두테르테 시장이 주목받았던 또다른 이유는 필리핀 사회 내부에 뿌리깊게 박혀있던 경제적 불평등이었다. 독립 이후부터, 필리핀은 확대되는 경제적 격차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범죄 문제에 신음해왔다.

소득 불평등의 굴레는 토지개혁 실패부터 시작됐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당선된 필리핀의 대통령들은 모두 토지개혁에 공을 들였다. 식민지 플랜테이션 농업으로 토지 분배가 기형적으로 변한 탓이다. 그러나 하시엔데로(Hasiendero, 대규모 농장주)에서부터 기득권으로 성장한 일부 가문들에 의해 개혁이 좌절되면서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1972년 독재정치를 시작한 마르쿠스 대통령이 소수 가문들의 기득권을 인정해주는 대신 독재를 정당화하면서, 소득 격차는 더욱 벌어졌다. 자기생존이 목적인 기득권은 끊임없이 부패했다. 1986년 필리핀 국민혁명인 ‘피플파워(People Power)로 코라손 아키노가 대통령이 되었지만, 토지개혁과 격차해소에는 실패했다.

정치 엘리트들이 내전 종식이나 농지개혁 같은 과제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국민의 정치적 불신은 높아져 갔다. 별다른 정치적 업적이 없는 영화배우(에스테라다 전 대통령)이나, 연예인의 딸(그레이스 포 상원의원)이 유력 대선주자가 되는 현상이 빈번해졌다.

독재 종식과 정치적 혼란기 이후 2010년 베그니노 아키노 3세(Begnino Akino III) 대통령 통치 기간이었던 지난 5년간 필리핀 경제는 평균 6%대의 높은 성장세를 보였다. 국민 1인당 소득도 22%나 증가했다. 외국인 직접 투자(FDI) 역시 꾸준히 늘어 인도차이나 반도 주변국들보다도 높은 경제성장률을 꾸준히 구가했다.

그러나 경제적 불평등은 여전했다. 2014년 세계은행(World Bank)에 따르면, 필리핀은 상위 10%가 전체 부의 76%를 차지해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소득이 불평등한 국가다. 여전히 10명 중 3명에 해당하는 필리핀 국민이 빈곤선 이하의 소득으로 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2016년 대선 후보로 등장한 두테르테 시장은 국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선거 운동 초반에는 군소 후보 중 하나였으나, 선거 중반 범죄퇴치 이력과 행보가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다른 후보들을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카톨릭-이슬람 간 갈등에서는 이슬람 회유책을, 경제 격차 문제 있어서는 수도권 분산을 통한 정책을 공약하며 대중들을 열광시켰다.

두테르테는 10대 공약으로 ▲범죄와의 전쟁 ▲연방제 시행 ▲내전 종결 ▲3자녀 제한 정책 ▲불평등 타파 ▲미성년자 훈육 ▲부패 척결 ▲마르코스 전 대통령 국립묘지 안장 ▲해외 투자 유치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제시했다. 대부분 기존 정치 기득권 세력들의 공약과 반대되는 것들이었다. 특히 중앙집권을 끝내고 지방분권형 정치 체계를 통해 독립성을 강화하고, 지방별 맞춤형 정책을 통해 경제적 불평등을 끝내겠다는 공약은 대중의 폭발적 반응을 이끌어냈다.

호재도 있었다. 기존 정치세력이었던 마누엘 로하스 후보와 그레이스 포 후보가 단일화에 실패해 여권 표가 나눠지면서 지난 5월 치러진 필리핀 대통령 선거에서 1300만표를 얻어 큰 표차로 당선됐다.

◆ 친미반중 프레임 부수기 시작…“철저한 실용주의”, “미국-중국 사이에서 파도타기”

두테르테는 신속했다. 대통령으로 취임한 6월 이후 전국적으로 범죄와의 전쟁에 뛰어들었다. 필리핀 연방경찰청에 의하면, 9월 중순까지 마약 조직과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재판 없이 살해된 이들은 최대 3000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효과는 빠르게 나타났다. 필리핀탐사보도센터(PCIJ)에 따르면, 두테르테 대통령 이후 지금까지 3000명 이상의 마약 용의자가 사살됐고, 70만명이 자수했다. 사회 내 가장 큰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이면서, 지지율도 급상승했다. 지난달 29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78%라는 높은 지지율을 보였다.

국내의 안정을 바탕으로, 두테르테는 기존 정치권이 유지하던 친미반중 정책 프레임을 부수기 시작했다. 당선 후 외교사절로는 최초로 중국 대사를 면담하기 시작하면서, 중국을 견제하는 도구였던 미-필리핀 합동순찰을 중지했다. 10월 초에는 필리핀 북서부에서 진행된 미-필리핀 연례 합동 상륙훈련(PHIBLEX)를 마지막으로 군사훈련까지 중단했다.

10월 중순에는 중국을 방문했다. 중국 지도부는 최고 수준으로 예우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과 정상회담을 한 이후 리커창 총리, 장더장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과 별도 회동을 가졌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남중국해 문제는 미뤄두고 실리부터 챙기겠다”며 400명의 경제사절단과 함께 중국에 도착했다. 중국은 필리핀 어선에 제한적으로 남중국해 조업을 약속했다.

클라리타 카를로스 필리핀대 정치학 교수는 AFP통신과의 인터뷰를 통해 "두테르테 대통령은 실용주의적 인물이자 마키아벨리의 이론에 동의한다"면서 “그는 철저한 실용주의에 근거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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