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과연 바다를 지배할 수 있을까?

최성흠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연구소 연구위원 2016. 12. 22.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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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흠의 문화로 읽는 중국 정치] 21세기 해상 실크로드가 의미하는 것

[최성흠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연구소 연구위원]

 

세계의 문명은 큰 강 주변에서 발생했고, 강한 문명은 그 강들을 육로로 연결했다. 나일강 유역의 이집트 문명,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 문명, 그리고 인더스강 유역의 문명이 더 강한 문명이 되기 위해 서로 경쟁했다. 한때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들을 연결하여 헬레니즘 문명을 이루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황하문명은 실크로드를 통해 그들과 연결되었다. 그렇게 인류문명은 오래전부터 강과 강을 잇는 육로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고 때때로 전쟁을 치르면서 교류했다.

이에 반해 바다는 비교적 평화로웠다. 특히 해상문명 교류의 터전이었던 인도양은 다양한 민족이 자유로운 항해를 하며 종교와 문화를 전파하고 상호 존중의 태도를 유지했다. 중국에는 광저우(廣州), 취앤조우(泉州), 닝보(寧波), 푸저우(福州) 등 몇몇 국제항을 통해 서역의 문물이 전래됐고, 차와 비단 그리고 도자기 등이 서역으로 전해졌다. 이러한 역할을 맡은 이들은 상인이라고 하기보다는 용기 있는 모험가에 가까웠다. 이른바 대항해시대라고 불리는 15세기가 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15세기부터 서구에는 강력한 해양 국가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강과 강을 바다로 연결하고, 그들의 경제적 욕망을 바다를 통해 채워나갔다. 처음 인도양에 들어온 포르투갈인은 상인이라기보다 약탈을 일삼는 해적에 가까웠다. 남아메리카로 향했던 스페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17세기에 인도양을 지나 일본의 나가사키까지 진출한 네덜란드인은 유능한 상인이었으며 19세기에 인도를 식민지화하고 중국을 개항시킨 영국은 바다의 지배자, 다시 말해 세계의 지배자였다. 20세기에는 미국이 세계의 지배자 자리를 이어 받았다.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곧 세계의 지배자라는 등식이 성립한 것이다.

중국의 명나라는 포르투갈이 인도양에 오기 70여 년 전에 이미 인도양을 누빈 적이 있었다. 영락제(永樂帝)의 명을 받은 정화(鄭和)가 29년 동안 7차례에 걸쳐서 아프리카 동부 해안까지 원정을 한 것이다. 첫 항해에는 62척의 배와 2만 780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인도양에 나타났으니 많은 나라가 그 위세에 주눅이 들었을 것이다. 바다를 지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며 능력도 충분해 보였다. 그러나 원정의 종식과 함께 놀랍고도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명나라는 더 이상 바다로 나가지 않았고, 그것도 모자라 아예 바다의 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널빤지 한조각도 바다에 띄우지 못한다(寸板不許下海)"는 명 태조의 원칙이 엄격하게 지켜졌으며 심지어 정화의 원정을 명했던 영락제조차도 모든 민간선박을 원양항해를 할 수 없는 평두선(平頭船)으로 개조하도록 명했다. 이러한 기조는 청나라에도 이어져서 "한 폭의 돛도 입항을 불허한다(不許片帆入口)"는 원칙이 세워졌다. 바다를 통한 교역을 원천적으로 차단한 것이다. 아편전쟁에서 패하여 홍콩을 영국에 할양하고, 광저우, 샤먼(廈門), 푸저우, 닝보, 상하이(上海) 등 5개의 항구가 강제적으로 열릴 때까지 중국은 그렇게 바다의 관문을 잠그고 있었다.

'시경(詩經)'에 "하늘 아래 왕의 땅 아닌 곳이 없고, 바닷가까지 이르는 땅에 왕의 신하 아닌 자가 없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을 풀이하면 세상의 땅은 왕의 것이며 바다 안쪽의 땅에 사는 사람들만 왕의 신하라는 뜻이다. 이렇듯 농업을 중시하던 중국인들에게 바다는 아주 먼 옛날부터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게다가 장사를 해서 돈을 버는 것을 천시했으니 바다를 통한 민간인들의 교역은 상상하기도 힘든 것이었다. 정화가 원정을 했을 때도 그 목적이 정복을 하거나 교역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황제의 위엄을 보이는 것에 그쳤고, 가지고 돌아온 물건들도 황제에게 진상할 관상용 얼룩말, 타조, 기린 같은 것들뿐이었다. 원정대장 정화가 환관이었으니 그게 그리 이상하지도 않을 듯싶다. 그러나 얼마 후 인도양에 진출한 서양의 원정대를 이끈 사람들은 기업가들이었고, 아마도 그들이 그런 광경을 봤다면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1979년부터 중국은 개혁개방을 실시했다. 덩샤오핑은 이전의 그 어떤 황제도 그리고 지도자도 하지 않았던 일을 시작했다. 타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바다의 관문을 열고, 세계의 강과 강을 바다로 연결하여 민간인들이 장사로 돈을 버는 것을 장려하기 시작했다. 중국 공산당 식의 표현을 빌리자면 수천 년 동안 관부에 속해했던 상인을 해방시킨 것이다. 이는 단순히 중화인민공화국의 현대사뿐만 아니라 중국 전체의 역사에서 처음 있는 사건이다. 개방이 지속되고 더욱 확대된다면 덩샤오핑은 훗날의 역사가들에 의해 중국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사회구조를 바꾼 인물로 기록될지도 모르겠다.

이제 중국은 적극적으로 바다로 나가기 시작했다. 2013년 9월과 10월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은 중앙아시아와 동남아 국가 순방 기간 중에 차례로 '실크로드 경제벨트와 21세기 해상 실크로드' 이른바 '일대일로(一帶一路)' 건설을 제의했다. 실크로드 경제벨트는 고대의 실크로드를 확대함과 동시에 새로운 루트를 개발하는 것이어서 역사적으로 익숙한 면이 있다. 그러나 21세기 해상실크로드는 이제까지 중국의 역사에서 한 번도 시도해본 적 없는 해양국가의 면모를 갖추려는 도전이다. 중국이 계획하고 있는 해상실크로드는 남중국해에서 출발하여 서쪽으로 인도양을 거쳐 유럽에 연결하고, 동쪽으로는 남태평양까지 연결하여 중국을 중심으로 대서양, 인도양, 태평양을 잇는 것이다.

▲ 중국이 구상하고 있는 일대일로 건설의 루트. ⓒwikimedia.org


일대일로 건설의 기본 원칙은 평화와 공동번영 그리고 개방과 상호존중에 기반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는 이러한 원대한 계획을 실현할 만한 해상 활동의 역사적 경험이 없다. 세계의 다양한 문화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개방적인 문화도 아니었다. 정화의 원정 후에 바다를 잠근 이유도 너무나 다른 문화가 바다 밖에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 아니었겠는가.

19세기 제국주의자들이 했던 것처럼 식민지를 경영할 생각이 아니라면 또는 바다의 지배자가 되어 세계를 지배할 생각이 아니라면 교역의 자유를 보장하는 바다의 개방성에 대한 인식과 지지를 보여줘야만 한다. 남사군도와 조어도 등의 문제를 단순히 육지의 영토를 소유하는 것과 동일선상에서 접근한다면 그 바다를 함께 이용하고 있는 나라들의 동의를 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중국은 여전히 또 하나의 바다를 봉쇄하고 있다. 바로 정보의 바다이다. 전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 유튜브 등의 사이트가 차단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카카오톡이나 라인도 PC에서는 사용이 잘 안 된다. 물론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사용할 수는 있지만 중요한 것은 중국 당국에 개방적 사고가 아직 부족하다는 것이다. 평화공존과 공동번영을 위해서는 상호이해가 필수적이다. 상호이해의 통로를 막고서 공동번영을 이루기는 힘들 것이다. 바다를 원천봉쇄한 영락제만큼은 아니더라도 여전히 외부 세계의 문화가 자신들의 질서를 파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중국의 지도자들 정서에 짓게 깔려 있는 듯하다. 그만큼 중국에 대한 주변국의 신뢰도 낮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최성흠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연구소 연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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