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기를 잃어버린 도쿄의 연말

2016. 12. 22.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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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과거 도쿄의 연말은 참으로 화려했다. 거리는 크리스마스트리와 온갖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으로 뒤덮여 언뜻 별나라에 온 듯한 판타지를 불러일으켰고, 티브이 방송에서는 크리스마스 특수를 맞아 음반을 낸 연예인들이 저마다 홍보하기에 바빴다.

덕분에 일반 시민들도 덩달아 흥겨운 연말 분위기에 편승해, 한껏 멋을 낸 드레스나 양복을 빼입고 크리스마스 파티나 송년회에 참가하기 바빴다. 거리 어느 곳을 가더라도 이 같은 축제 물결은 끝없이 이어졌고 먹을 것 또한 풍족했다. 어찌 보면 연말의 이 한때를 보내기 위해 지난 1년 동안 그렇게 열심히 살아왔나 싶을 정도로, 일본인들은 모든 열정과 에너지를 연말 파티에 쏟아부었다.

나 또한 80년대 중반부터 일본에 살면서 자연스레 일본인들이 주최하는 송년회에 초대받아, 많을 때는 11~12월 두 달간 저녁 시간을 모두 파티에 참석해야 할 만큼 바쁜 시절이 있었다.

이때만 해도 일본 경제가 ‘잃어버린 10년’을 외치기 전이어서 일본 기업들은 사업상의 파트너라든가 혹은 거래처, 그 밖에도 사업으로 연결된 사람들을 호텔이나 회관으로 초대해, 성대한 송년회로 풍성히 접대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때 모이는 사람만 해도 수십 명에서, 때로는 수백 명에 이르는 큰 파티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해마다 11월이면 어디를 가도 들리던 크리스마스캐럴이 뚝 끊어졌다. 조그만 상점만 가도 울려퍼지던 캐럴이 이제 더 이상 들리지가 않는다. 텔레비전에 나와 제목도 다 기억하기 힘들 만큼 많은 캐럴을 부르고 홍보하던 연예인들도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어디 그뿐인가. 운이 좋으면 유럽 여행 티켓에 당첨되는 송년회 파티의 추첨권 행운도 이젠 아련한 과거의 추억이 되어버렸다. 일본인들은 유난히 파티를 좋아한다. 서양에서 유입된 성탄절인데도 굳이 파티복을 입고 참가해야 하는 파티를 여는가 하면, 송년회에서조차 파티 분위기를 내고 싶어 하는 일본인들이 많다.

그랬던 일본인들이 지금은 기껏해야 부서별로 가까운 지인들만 모여서 간단히 식사를 겸한 음주로 송년회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심지어는 장기간의 불경기를 이유로 이런 미니 송년회조차도 생략한 회사가 점점 늘고 있다.

얼마 전 수십 년 지기 일본인 기자가 찾아왔다. 해마다 신문사나 잡지사, 방송사의 송년회에 함께 참석한 60대 후반의 카메라맨이다. 나와는 80년대 중반에, 일본 잡지사의 창간 특집으로 지금의 러시아가 소련이었던 시절에 사할린 취재를 함께 간 인연이 있다. 당시 한국은 소련과 국교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일본 사회당의 당수인 도이 다카코 위원장의 보증으로 겨우 1회만 입국이 가능한 비자를 받아 사할린 취재를 갈 수 있었다.

지금도 현역으로 열심히 현장을 누비고 있는 그는, 요즘 일본인들의 생활이 너무 팍팍해졌다고 하소연했다. “한국인들은 좀 시끄럽긴 하지만 늘 생기가 있어 좋은데, 우리 일본인들은 한국과 똑같이 경제가 어려운데도 너무 의기소침해 있고 활기가 전혀 없어. 늘 침잠돼 있는 생활의 연속인 것 같아.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느낌이 전혀 없는, 낙이 없는 삶이랄까. 언제까지 이런 생활이 지속되는 것인지, 같은 일본인인 나도 참 살맛이 안 나.”

진짜 그랬다. 요즘 일본인들의 생활을 보면 활기란 전혀 없고, 그렇다고 미래에 대한 무지갯빛 포부 따위는 내려놓은 지 오래다. 그래서인지 표정도 무표정 무변화다. 오죽하면 100만 명이 넘는 한국 시민들이 이 엄동설한에 광화문에 모여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외치는 모습을 보고 “어떻게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한꺼번에, 그것도 한자리에 모여서 그럴 수 있을까?” 하고 의문스러워한다.

그렇다고 일본인들이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은 결코 아니다. 도무지 흥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자양분이 고갈되어 시든 나뭇가지 같아 보이는 이들이 평소 자신들의 안정된 노후를 위해 치밀한 인생 설계를 하는 것에서는, 눈앞의 일에 급급한 우리네보단 훨씬 고수다.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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