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리법 없이 '그냥'.. 좋아하진 않지만 끊을 수 없는 맛

정동현 셰프 2016. 12. 22. 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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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현 셰프의 생각하는 식탁] (41) 라면

초등학교 2학년 되던 아홉 살 때 처음 가스불 위에 물을 올렸다. 라면을 끓이기 위해서였다. 처음에는 꽤 어려웠다. 뒷면 조리예에 맞춰 컵으로 신중히 물을 계량했다. 가스불을 켜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렸을 적 가장 먼저 장난치며 놀았던 것이 가스불이었다. 한 살 어린 동생은 동생이라는 이유로 라면 냄비에서 멀찍이 떨어뜨려놨다. 나는 겨우 한 살 차이지만, 그래도 형이니까 동생을 먹여야 한다는 생각에 라면을 끓였다. 라면이라는 게 물만 제대로 맞추면 실패하기 어려운 음식이다. 당연히 첫 라면 끓이기는 성공이었다. 동생은 '맛있다' 소리를 내며 라면을 먹었다. 한번 라면 끓이기에 성공하자 자신감이 붙었다. 몇 달 사이에 조리법도 바꿔가며 라면을 끓였다. 맵다는 라면에 고춧가루를 더 풀기도 하고, 일부러 물이 없을 때까지 졸여 먹기도 했다. 동생도 한 번 라면을 끓인 적이 있다. 그때 나를 따라 고춧가루를 추가하다 그만 한 숟가락 넘게 그 뻘건 것이 들어가고 말았다. 결과는 뻔했다. 둘은 한 젓가락 채 먹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이건 진짜 못 먹겠다!"

고춧가루 범벅이 된 라면은 바로 버려지고 말았다. 그날 이후 동생은 라면 끓이기는 오로지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내가 라면 끓이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질색을 했지만 점차 무던해졌다. 맞벌이를 하던 어머니는 늘 김치찌개 같은 것을 끓여 놓고 갔지만 매일 뭔가를 하는 것도 고된 일이었다. 하지만 라면 끓이기는 초등학생이었던 나도 할 수 있었다. 우리 형제는 그 라면 덕분에 근처 수퍼마켓의 유명 인사가 되었다. 어린 두 꼬마가 와서 매일 라면을 사갔으니 수퍼마켓 주인 입장에서도 꽤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우리는 라면을 사갈 때마다 그램 단위로 적힌 중량을 체크했다. 같은 값이면 무게가 더 나가는 것이 이득일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또 신제품이 나오면 어김없이 먹어봐야 직성이 풀렸다. 주인 아주머니는 그런 나와 동생에게 '착하다'고 말하며 머리를 쓰다듬고는 했다. 우리는 그게 왜 착한지, 왜 칭찬받을 일인지 알지 못했다. 그저 라면이 맛있기 때문에 먹을 뿐이었다. 일요일이 되면 가끔 아버지가 라면을 끓일 때가 있었다. 겨우 파만 올리던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가 끓인 라면에는 양파가 들어가 있었다. 덕분에 조금 달큼해진 국물을 마시노라면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어린 시절, 주먹이 내 머리만 하고 엄했던 아버지가 끓인 라면에서 나는 단맛은 나에게는 뜻밖의 선물 같았다. 주말을 지나 주중이 되면 또 우리 형제는 라면을 끓였다. 중학교 때는 편의점에 서서 컵라면을 먹었고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매점에 달려가 라면을 사 먹었다. 가끔 부모 몰래 친구들끼리 소주를 나눠 마신 다음 날이면 매점에서 파는 라면 국물을 '캬' 소리 내며 마셨다. 그러면 나는 조금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른이 된 후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부터 의식적으로 라면을 먹지 않았다. 점심과 저녁을 회사에서 해결하는 일이 많았다. 라면 말고도 먹을 것이 천지였다. 그러던 나는 외국 생활을 하면서 다시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와우, 한국 라면 진짜 매워."

중국인 여자 친구가 있다던 '폴'은 한국 라면 이야기가 나오자 기겁을 했다. 호주 멜버른에 있는 한 레스토랑의 쉬는 시간이었다. 요리사들끼리 둘러앉아 식사를 하다 우연히 한국 음식이 화제에 올랐다. 다른 이야기지만 외국에서 한국 사람에 대해 가지는 몇 가지 고정관념이 있다. 첫째로 당연히 소주를 좋아할 거라고 여긴다. 둘째로 역시 당연히 노래방을 좋아할 것이고, 셋째로 컴퓨터를 잘할 것이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매운 음식을 잘 먹을 것이라고 지레 짐작해버리는데 팔할 이상은 그놈의 매운 라면 때문이다. 한국 특산품이라고 외국 친구에게 선물하는 경우도 많고, 같이 먹기도 한다. 외국에 오래 있다 매운 라면을 먹으면 나 역시 며칠 고생을 하건만 외국인들에겐 더더욱 고역이었을 것이다. 그날 나와 몇 안 되는 한국인 요리사들은 폴의 표정을 보며 애처럼 낄낄대며 웃었다. 폴은 그 라면이 얼마나 매웠는지 한참 설명을 하더니 억울한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너도 라면 좋아하지?"

나는 답했다.

"글쎄? 그렇게 좋아하진 않아."

나의 답은 반은 거짓이었고 반은 진실이었다. 나는 라면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끊을 수 없었다. 이유는 라면의 MSG 성분일지도 모르고, 어렸을 적부터 인이 박여서 그럴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내 몸이 라면을 부를 때가 있었다는 것이다. 외국 생활, 특히 호주의 생활은 여유가 있었다. 요리하던 시간을 빼놓는다면 꽤 살 만했다. 우선 날씨가 좋았고 사람들은 친절했다. 내 한 몸만 건사하면 되니 자유로웠다. 멜버른의 커피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했다. 괜찮은 베트남 쌀국숫집과 타이 음식점도 흔했다. 그런데 나는 한인 마트에 갈 때마다 라면을 샀다.

요리하는 사람이라고 라면 끓이는 법이 특별하지는 않다. 조리법에 맞춰 물을 넣고 최대한 센 불에서 끓여 먹는다. 누구나 아는 비법이다. 만약 어떤 연예인이 하듯 기름기를 줄인다고 면을 따로 삶으면 맛이 연해진다. 이유는 간단하다. 기름기가 빠지면 혀에 맛 분자가 머무는 시간이 짧아진다. 더불어 기름기에 용해되는 맛 분자가 제 성능을 내지 못해 맛 자체가 덜하다. 달걀을 푸느냐 마느냐도 첨예한 관심사다. 달걀을 풀게 되면 국물은 연해진다. 달걀 흰자가 흡착제 역할을 해서 수프를 집어삼키기 때문이다. 똑같은 원리로 프랑스에서는 '콩소메 수프'를 만들 때 달걀 흰자를 풀어 맑은 국물을 얻는다. 맑은 국물 라면을 먹고 싶지 않다면 불을 끈 상태에서 달걀을 푸는 것이 좋다. 국물의 잔열로도 달걀은 충분히 익는다. 흰자가 완숙되면서 수프에 엉기는 것도 막을 수 있다. 라면을 동남아 음식 비슷하게 바꾸는 방법도 있다. 라임즙과 국물에 뿌리고 고수를 썰어 넣으면 마치 태국의 '똠얌꿍'을 먹는 것 같은 맛이 난다. 이 조리법의 포인트는 '많이'다. 고수도 많이, 라임즙도 많이 넣어야 한다. 프랜차이즈 쌀국숫집처럼 레몬 1/4, 고수 한 뿌리로는 턱 밑이 아릴 정도로 신 그 맛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훌륭한 맛을 원해서 라면을 먹지는 않았다. 몸과 마음이 아프면 라면을 찾았다. 감기가 들어 몸이 으슬으슬할 때면, 주방에서 영어 욕을 신나게 듣고 얼굴에 소금기가 껴서 집에 돌아올 때면 나는 가스불에 물을 올렸다. 아무도 없는 주방에 혼자 앉아 입천장을 델 것같이 뜨겁고 속이 상할 정도로 매운 라면을 먹으며 나는 자주 무력감이 들었다. 왜 이 라면을 끊지 못하는 걸까? 요리를 한다고 외국까지 와서 왜 겨우 인스턴트 라면에 의지해야 하는 걸까? 마침내 라면 국물까지 비워내면 나는 많은 것이 그리워졌다. 찬란한 봄의 설악산, 한여름 녹음의 지리산, 뜨거운 여름 대구, 정선의 민둥산, 몰운대의 적막함, 아우라지의 아련함, 술에 취해 택시를 타고 달리던 늦은 밤 강변북로, 이가 딱딱 부딪칠 정도로 추운 서울의 겨울, 공기처럼 나를 감싸던 나의 모국어, 그리고 사람들 나의 사람들, 라면 한 그릇을 나눠 먹고 국물에 찬밥을 함께 말던 그 사람들이 가슴을 치고 돌았다. 먹먹했던 가슴이 공허해지면 눈에 물기가 차 올랐다. 나는 그 물기로 라면 끓인 냄비를 한참 동안 씻었다. 씻어도 씻어도 냄비는 깨끗해지지 않았고 입에 남은 라면의 끈끈한 맛은 밤새 지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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