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시집 '만인보'에 등장한 '고영태 가족사'
80년 5월 광주에서 아버지 숨진 뒤 일화 실려
[한겨레]
국정농단 사태 또 하나의 주인공 고영태씨 가족사가 고은 시인의 인물시집 <만인보>에 소개된 사실이 확인됐다. 만인보는 1986년부터 2009년까지 집필된 4001편의 시로 구성된 30권짜리 대작이다. 등장인물만 5600여명에 이른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우리 민족의 다양한 얼굴을 그려 “시로 쓴 민족의 호적부”, “한국문학사 최대의 연작시”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고영태씨 가족사가 등장하는 건 만인보 ‘단상 3353-고규석' 편과 ‘3355번-이숙자' 편이다. 고규석과 이숙자는 고영태씨의 부모다. 고규석씨는 1980년 5월21일 광주시내로 일을 보러 갔다가 광주교도소를 지나던 중 군인들의 발포로 현장에서 숨졌다. 고규석씨와 희생자들은 숨진 지 열흘이 지나서야 광주교도소 안에서 암매장된 채 발견됐다. 고영태씨가 다섯 살 때다.
고은 시인의 만인보에는 고영태 가족의 생활상과 고규석씨 사망 이후 아내 이숙자씨가 남편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던 일화가 실려 있다. 고규석씨가 숨진 뒤 어렵게 생활하던 이숙자씨는 망월동 묘역 관리소 인부로 채용돼 다섯 남매를 챙기며 어렵게 생계를 이어갔다. 가족의 해피엔딩은 막내였던 고영태가 펜싱 선수가 되어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에 거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고영태씨는 언론 인터뷰에서 “어릴 적 일이라 (아버지가 숨졌을 때) 기억은 안 난다. 너무 어렵게 자라서 아버지가 없어서 불편하다는 생각조차 못하고 자랐다”고 말한 바 있다.
이장 노릇/ 새마을지도자 노릇/ 소방대장 노릇/ 예비군 소대장 노릇/ 왕대 한 다발도 번쩍 들었지/ (중략)
동네방네 이 소식 저 소식 다 꿰었지/ 싸움 다 말렸지/ 사화 붙여/ 사홧술 한잔 마시고/ 껄껄껄 웃고 말았지/ (중략)
누구네 집 서울 간 막내아들/ 달마다 담배 사보내는 것도 알고/ 누구네 집 마누라가/ 영감 몰래/ 논물 몰래 대어/ 옆논 임자하고 싸운 일도 알고/
아니 아니/ 누구네 집 삽 두 자루/ 누구네 집 나락 열 가마/ 남은 것도 아는 사내/ 고규석/
다 알았지/ 다 알았지/ 그러다가 딱 하나 몰랐던가/
하필이면/ 5월 21일/ 광주에 볼일 보러 가/ 영 돌아올 줄 몰랐지/ 마누라 이숙자가/ 아들딸 다섯 놔두고/ 찾으러 나섰지/
전남대 병원/ 조선대 병원/ 상무관/ 도청/ (…) /그렇게 열흘을/ 넋 나간 채/ 넋 잃은 채/ 헤집고 다녔지/
이윽고/ 광주교도소 암매장터/ 그 흙구덩이 속에서/ 짓이겨진 남편의 썩은 얼굴 나왔지/ 가슴 펑 뚫린 채/ 마흔살 되어 썩은 주검으로/ 거기 있었지/
아이고 이보시오/ (중략)
다섯 아이 어쩌라고/ 이렇게 누워만 있소 속 없는 양반
만인보 단상3355-이숙자
고규석의 마누라 살려고 나섰다/ (…)/ 담양 촌구석 마누라가/ 살려고 버둥쳤다/
광주 변두리/ 방 한 칸 얻었다/
여섯 가구가/ 수도꼭지 하나로/ 살려고 버둥쳤다/
여섯 가구가/ 수도꼭지 하나로 물 받는 집/ (중략)
남편 죽어간 세월/ 조금씩/ 조금씩 나아졌다/ 망월동 묘역 관리소 잡부로 채용되었다/ 그동안 딸 셋 시집갔다/
막내놈 그놈은/ 펜싱 선수로/ 아시안 게임 금메달 걸고 돌아왔다/
늙어버린 가슴에 남편얼굴/ 희끄무레 새겨져 해가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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