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생존자 900여일의 기록

장슬기 기자 2016. 12. 18.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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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EBS 다큐프라임 ‘감정시대, 스무살! 살아남은 자의 슬픔’

[미디어오늘 장슬기 기자]

“친구들 문제가 가장 크죠. 그런 부분은 잘 안 물어보시더라고요. 맨날 ‘사고가 어땠냐’, ‘그때 일(세월호 참사) 떠올리면 힘들지 않냐’… ‘친구들의 빈자리가 크지 않냐’ 그런 부분은 안 물어보고, 다 괜찮은 줄 알고 계시더라고요. 저에게는 친구들 빈자리가 좀 큰 것 같아요.”

공식적으로 세월호에서 마지막으로 살아나온 단원고 졸업생 박준혁 학생의 말이다. 이제는 스무살, 대학생이 된 준혁이는 세월호 참사를 비극적인 한 시점이 아니라 소중한 사람을 잃은 빈 자리로 표현했다. 13일 오후 EBS 다큐프라임 ‘스무살! 살아남은 자의 슬픔’ 편에서는 세월호에서 살아나온 이들이 친구들을 다 잃고 어떻게 살았는지 기록했다.

▲ EBS 다큐프라임 ‘감정시대, 스무살! 살아남은 자의 슬픔’편 화면 갈무리. 세월호 생존자 단원고 졸업생 박준혁

준혁이는 故 임경빈 학생과 친했다. 그는 “친구들한테 많이 의지해서 빈자리가 느껴질 때가 많다”고 말했다. 세월호 생존자 이종범(20, 대학생)은 故 허재강 학생과 친했다. 종범이는 누구와 친했냐는 물음에 “재강이요”라고 친구의 이름을 말해놓고 눈물을 보였다.

만질 수 없는 친구를 바라보기라도 해야 했다. 종범이는 재강이 사진을 지갑에 항상 넣고 다닌다. “(사진을) 굳이 뺄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종범이는 재강이에게 미안해한다. “그냥 계속 미안한 마음이 제일 컸다. 혼자만 나왔다는 것 때문에…” 살아남은 자들은 비극을 떠안는다.

▲ EBS 다큐프라임 ‘감정시대, 스무살! 살아남은 자의 슬픔’편 화면 갈무리. 세월호 생존자 단원고 이종범
▲ EBS 다큐프라임 ‘감정시대, 스무살! 살아남은 자의 슬픔’편 화면 갈무리. 고 임경빈 군의 어머니 전인숙씨
준혁이는 경빈이 어머니 전인숙씨와 시민들 앞에 섰다. 이 자리에서 전씨는 “(사고) 첫날 준혁이한테 미안했던 말이 ‘왜 너만 나왔냐고 같이 나오지’…기억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는데 지나고나서 굉장히 미안했다”고 말했다. 고통은 깊이를 다투지 않는다. 준혁이는 “먼저 간 친구들 많이 기억해주면 고맙고, 그냥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참사 당일의 기억

EBS 취재진은 조심스럽게 생존자들의 기억을 복원했다. 양정원 학생(20, 대학생)은 “제 바로 앞에 애들이 캐비닛에 깔렸는데 제가 앞에서 그걸 다 봤다”고 말했다. 배가 기울자 정원이는 맞은편 방까지 날아가 반대편 벽에 부딪혔다. 왼쪽 얼굴에서 피가 흘렀다. “애들이 ‘너 괜찮냐’고 ‘너 피난다’고 어떤애가 거울을 보여줬다. 그때는 아무것도 못 느꼈다.”

4월16일 오전 8시54분 두 번째 신고전화가 있었다. “살려주세요. 배가 기울었어요.” 신고 30분이 넘은 오전 9시28분 해경 헬기 B511이 도착했고, 세월호는 이미 반쯤 넘어간 상태였다. 9시38분 해경 123정이 도착해 46분 선장과 선원만 구조했다.

정원이는 “창문으로 해경들이 줄타고 내려오는 것”을 봤고 “헬기 바구니가 올라갔다 내려가는 것”도 봤다. “양 옆에 비상구도 보였는데 멀지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안 오니까 무슨일이 있나 했고…솔직히 구조는 기본이었으니까. 구조될 줄 알았다. 해경이 안에 들어와서”라고 말했다.

배가 곧 넘어가려던 오전 10시20분 모든 선박은 세월호 주변에서 사라졌다. 325명이 수학여행을 떠났는데 75명만 살았다.

학생들은 구조된 게 아니라 탈출했다. 국가는 배안에 들어가지 않았다. 정원이는 “구조라고 하긴 모호하다”며 “구조라기 보단 우리가 탈출한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생존자 장애진(20, 대학생) 학생은 “뛰어내렸고, 그 사람들이 건져준 것 밖에 없다”고 말했다.

살아나온 자들은 아프다

그날의 경험은 일상을 뒤집었다. 애진이는 사고 이후 응급구조과에 진학했다. 도망치고 피하는 사람이 아니라 도와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아픔만이 아픔을 안을 수 있다. 안산 분향소에서 애진이는 고 오영석 군의 어머니 권미화씨를 꼭 끌어안았다.

▲ EBS 다큐프라임 ‘감정시대, 스무살! 살아남은 자의 슬픔’편 화면 갈무리. 안산분향소에서 세월호 생존자 장애진(왼쪽)학생이 고 오영석 군 어머니 권미화씨를 위로하고 있다.

준혁이는 수면제가 없으면 쉽게 잠들지 못한다. 애진이는 어머니 김순덕씨에게 ‘괜찮다’는 말을 자주하고, 참사 당일이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배 안에서 크게 다쳤던 정원이는 80일간 병원에 입원했다. 가장 병원에 오래 있던 생존자다.

정원이 어머니 문석연씨의 말이다. “아는 사람들에게 통화가 되면 다 병문안 와달라고 했어요. 우리 애는 따뜻한 위로가 필요하겠더라고요. ‘와서 아무것도 사가지고 오지 말고 정원이 좀 안아주고 가’ 그랬어요.” 어머니는 정원이를 억지로 퇴원시켰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병원에서 살아야 할 것 같아보였다. 어머니는 정원이의 트라우마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정원이는 매일 밤잠을 설쳤다. 악몽이 이어졌다.

세월호 유족들에게 많이 들었던 말이다. “우리는 오늘도 4월16일을 살고 있다.” 애진이는 세월호 리본을 팔에 문신으로 새겼다. 다른 아이들도 친구들의 물품을 보관하고, 세월호 팔찌를 통해 기억을 붙잡고 있다. 수강신청을 하고, 운전면허를 따는 등 스무 살이 하는 일상을 살면서도 이들의 시간은 4월16일에 멈춰있다. 생존학생들은 친구들이 없는 일상에 살아돌아와 그날을 살고있다. 고마운 일이다.

▲ EBS 다큐프라임 ‘감정시대, 스무살! 살아남은 자의 슬픔’편 화면 갈무리. 세월호 생존자 단원고 졸업생 양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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