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가 묻어버린 '박정희 신드롬'

백철 기자 2016. 12. 17.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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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혁명을 한 것입니다.”(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11월 초, 디씨인사이드 주식 갤러리를 중심으로 ‘10·26 의거 명예회복 추진위’(이하 추진위)가 결성됐다. 추진위는 김재규 전 정보부장이 법정에서 한 최후진술 내용을 자신들이 최초로 올린 글에 담았다. 이들은 10·26의 주역인 김 전 부장을 ‘의사’(義士)로 부르며, 김 부장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서울 영등포구 문래근린공원에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 옆에 김재규 부장의 흉상을 세우겠다는 취지로 모금운동을 벌이고 있다.

김재규를 ‘대통령을 살해한 내란범’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를 앞당긴 사람’으로 보는 시각은 소리소문도 없이 퍼지고 있다. 주식 갤러리 등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김재규의 사진이 담긴 티셔츠를 입고 박근혜 하야 촛불집회에 참석했다는 이들의 인증사진이 간간이 올라온다. 김재규 얼굴이 담긴 피켓도 등장했다. 경기도 광주시 삼성공원에 위치한 김재규 묘소를 참배하는 이들의 발길도 늘어나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실정이 만천하에 드러나면서 역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작업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과연 좋은 지도자였는지 의문을 갖는 과정에서 김재규에 대한 긍정 여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김재규가 살아나는 것은 박정희 신드롬에 치명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김재규는 10·26의 주범일 뿐만 아니라, 중앙정보부장 시절 박 전 대통령에게 최순실의 부친 최태민의 비위사실을 알린 당사자다. 한 교수를 김재규를 ‘박정희의 충신’이라는 관점에서 재평가해야 한다며 “유신시대의 자료를 꼼꼼히 읽으면서 김재규란 사람이 자기가 잘릴 수도 있는데 박정희의 충신으로서 자기 몸을 던져서 최태민을 막으려 했던 것을 알게 됐다. 그때 최태민을 막았다면 오늘의 불행한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며 “이런 내막이 최근 들어 다시 알려지면서 집회에 김재규 얼굴이 들어간 깃발을 들고 나오는 사람들이 생기는 게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10·26 명예회복 추진위를 주도하는 이들도 박근혜 정부의 실정 때문에 등을 돌린 이들이었다. 추진위의 제안자 20대 청년 한운씨를 만났다. 그는 “인생 최대의 실수를 조금이라도 상쇄하기 위해서 이렇게 나서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을 “2012년 대선 당시 새누리당 청년당원으로 박근혜 후보의 당선을 위해 뛰던 사람”으로 소개했다. 그는 1년 정도 대통령인수위 청년특위, 새누리당 미래세대위원회 등에서 활동하다가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에 실망하고 탈당했다고 한다. 그는 “박근혜 정부 때문에 박정희나 김재규에 대해서도 더 관심 깊게 알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설명은 이어졌다. “과거 세대는 박정희에 대한 명확한 향수가 있는 반면, 청년세대는 그 시대를 살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박정희 시대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있는 건 아니다. 나도 ‘박정희가 민주주의는 탄압했지만 박정희 시대에 GDP가 올라간 건 사실이지’ 정도의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 들어 민주주의가 탄압을 받고 표현의 자유를 빼앗기는 일들이 생겨나면서 ‘박정희 시절처럼 민주주의가 탄압받으면 이렇게 되겠구나’ 하는 것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이다.”

한국 사회를 20년 가까이 지배한 ‘박정희 신드롬’은 IMF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생겨났다는 것이 정설처럼 굳어져 왔다. 물론 IMF 이전에도 박정희 향수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4년 8월 <경향신문> 여론조사에서 박정희는 전·현직 대통령 중 정치력과 행정력이 가장 뛰어난 대통령으로 꼽혔다. 이때만 해도 박정희에 대한 ‘신격화’는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설문 응답자의 40.5%는 박정희를 권위적인 지도자로 꼽았고, 민주적이라고 평가한 응답은 15.3%에 그쳤다. 경제분야에서 가장 공헌한 사람을 묻는 문항에서 1위를 차지한 것은 박 전 대통령이 아니라 31.5%의 지지를 받은 정주영 현대 회장이었다. 2위는 13.0%의 선택을 받은 이병철 삼성 회장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11.8%로 3위에 그쳤다.

일반적으로 ‘박정희 신드롬’은 IMF 외환위기를 전후로 카리스마가 있는 지도자를 찾는 대중들의 요구가 반영된 현상으로 평가된다. 1997년 4월 <동아일보> 여론조사에 따르면, 역대 대통령 평가에서 박정희는 75.9%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다른 역대 대통령들 중 10%를 넘긴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박정희의 최장기 비서실장 김정렴의 회고록 <아 박정희>와 류철균 이화여대 교수(필명 이인화)의 박정희를 모델로 한 대하소설 <인간의 길>이 출간된 것은 IMF 사태 직전이었다.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가 쓴 박정희의 일대기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의 1권이 출간된 것은 IMF 직후였다.

물론 진보진영에서는 박정희 신드롬을 비판적으로 바라봤다. 조 대표의 책이 나올 무렵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우익세력의 논리를 그들의 언어로 반박하는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를 출간했다. 하지만 박정희 신드롬의 흐름 자체를 바꾸지는 못했다.

2000년대 들어서도 박정희 신드롬은 여전했다. 동아시아연구원이 2005년부터 5년마다 실시하는 ‘한국인의 정체성’ 여론조사에 따르면, 박정희 전 대통령은 1~3차 모두 역대 대통령 평가 1위를 기록했다. 지난해 광복절을 맞이해 갤럽에서 실시한 ‘우리나라를 가장 잘 이끈 대통령’ 설문에서도 박 전 대통령은 44%의 선택으로 1위를 기록했다. ‘박정희 신드롬’은 결국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을 이끈 밑거름이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당선으로 박정희 신드롬은 정점을 찍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경북 구미시에 있는 박정희 생가 방문객 통계에서 그 단면을 볼 수 있다. 2005년 4만6000명 수준이던 방문객 수는 매년 증가해 2013년 70만9000명으로 정점을 찍은 뒤 올해까지는 감소세가 이어졌다. 올해 4분기까지 방문객은 29만4000명으로, 지난해 52만2700명의 절반을 약간 넘긴 수준이다. 특히 올해 4분기 방문객 수는 9만500명으로, 박 대통령 취임 이후 처음으로 분기당 10만명 이하로 내려갔다.

박근혜 정부 들어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호감도가 ‘2위’로 발표되는 여론조사도 나오기 시작했다. 리서치뷰는 2013년부터 올해 9월까지 주기적으로 역대 대통령 호감도 여론조사를 발표했다. 2013년 12월 조사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제치고 1위를 기록한 이후, 올해 9월 조사까지 두 전직 대통령의 순위는 그대로였다. 2013년만 해도 박근혜 대통령의 호감도는 19.0%로 2위였으나 조사를 거듭할수록 떨어졌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이제 박정희 신화의 최후의 보루라 할 수 있는 TK(대구·경북)에서도 흔들리고 있다. 11월 이후 갤럽 여론조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은 4~5%를 유지하고 있다. TK에서도 많아야 10%의 지지율에 그치고 있다.

한홍구 교수는 “우리가 드디어 박정희 신드롬을 박근혜에 대한 환멸과 함께 묻어버릴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박정희와 박근혜의 관계를 과거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와 3세의 관계로 비유했다. 한 교수는 “나폴레옹 1세는 유럽에 민주주의를 퍼뜨린 계기가 됐지만 결국 황제가 됐다. 나중에 그의 조카(나폴레옹 3세)까지 황제가 되니 프랑스 사람들이 얼마나 어이가 없었겠나. 그런 반동적인 상황을 그린 것이 바로 <레미제라블>이다. 프랑스처럼 우리 역사에서도 발전이 있으려면 (박근혜 정부와 같은) 반동을 무수히 거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 교수는 비선실세 최순실의 뿌리인 최태민에 대한 언론 보도가 쏟아지면서 박정희가 지금의 국정농단 사태에 책임이 있다는 여론이 형성되고 있다고 봤다. 한 교수는 “박정희가 최태민 문제를 처리하지 못한 책임이 이번에 드러났고, 김기춘 비서실장이나 남재준 국정원장 같은 사람들을 통해 공안통치를 해온 것이 바로 박근혜의 박정희식 통치술이다. 유치원생까지 박근혜 퇴진을 외치는 분위기에서 이제 박정희 신드롬은 미래세대에게는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 교수는 “여전히 박정희를 신격화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겠지만, 그런 사람은 박근혜의 지지율처럼 국민의 4~5% 내외일 것”이라며 “과거 설문조사에서 박정희가 못한 점을 물으면 대체로 독재정치와 민주주의 탄압을 꼽았는데, 이제는 자식을 잘못 키웠다는 게 중요 항목으로 나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12월 13일 한 네티즌이 경기도 광주시 김재규 묘소를 참배한 뒤 인터넷에 올린 사진. / 디씨인사이드 주식 갤러리

한편, TK지역에서 오랫동안 활동해온 김태일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오래된 박정희 신화가 쉽게 무너질 것으로 보긴 어렵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TK에서 박정희는 신화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냥 ‘신’이다. 산에 있는 사찰을 돌아다니다 보면 부처님이나 관우장군의 영정을 모셔놓고 기도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런데 TK의 사찰에는 박정희·육영수 내외의 영정에 기도하고 숭배하는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TK지역에서만큼은 박근혜의 실패가 바로 박정희 신화의 붕괴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봤다. 김 교수는 “박정희와 달리 박근혜까지 ‘신’으로 생각하는 정서는 거의 없다. 하지만 박근혜는 ‘신의 딸’이었기 때문에 TK지역이 박근혜의 열렬한 버팀목이 됐던 것은 사실이다. 박근혜의 실패가 박정희에 대한 실망을 불러오고 있는 건 맞지만 박정희 신화에 큰 금이 갔다고 보기엔 아직 성급하다”고 말했다.

영남대에서 김 교수는 현대한국정치론을 강의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통치는 빠질 수 없는 부분이다. 김 교수는 수업 중에도 박정희 신화의 그림자를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수업에서 ‘유신체제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려운 권위주의 체제’라는 취지로 강의를 한다. 하지만 TK 출신 학생들은 어렸을 때부터 현재 자신들이 누리는 번영은 모두 박정희의 성과라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기 때문에 박정희에 대한 존중감이 기본적으로 있다. 이런 학생들이 내 강의를 듣고 놀라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밥상머리 교육 등 사회화 과정의 차이인지 다른 지역 학생들과는 확연한 차이가 느껴졌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TK지역까지 박정희 신화를 걷어내기 위해서는 ‘김재규 재평가론’으로는 어렵다고 봤다. TK 정서상 김재규를 긍정적으로 언급하는 것 자체가 ‘신성모독’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대화를 열 수 없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박정희의 갑작스런 죽음이 동향 사람들의 연민과 동정을 자아냈고, 이를 경제발전 신화와 맞물려 수십년간 확대 재생산돼온 것이 박정희 신화의 실체라고 판단했다.

김 교수는 김부겸 민주당 의원이 2014년 대구시장 선거에서 박정희 컨벤션센터 공약을 낸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박정희에 대한 좋은 ‘기억’과 박정희 신에 대한 ‘믿음’만 가진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토론과 설득이 아니다. 만주군 경력이나 유신독재 등 실제 박정희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현실에서 보고 느끼게 해주는 것이 ‘역사적 재평가’로서는 훨씬 적절한 방법이라는 게 김 교수의 설명이다. 김 교수는 “TK에서는 박정희에 대해 토론하고 따지기보다 맹목적으로 ‘훌륭한 분이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평가가 많다. 다른 지역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이곳에서 민주화 세력은 박정희에 대한 ‘믿음’과 싸워야 하니까 미치고 펄쩍 뛰겠다. 그래서 현실 공간에 박정희의 잘잘못을 모두 나열한 공간을 마련해서 조금이라도 신화를 역사 영역으로 끌어당기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한홍구 교수도 박정희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준비하고 있다. 한 교수 등 지식인들은 지난해 10월 <반헌법행위자 열전> 편찬 계획을 밝혔다. 한 교수는 “박정희는 이 열전에 당연히 들어가야 할 집중검토 대상자다. 박정희와 이승만만큼 반헌법행위를 한 사람이 없다. 다만 그들을 전면에 내세웠을 때 열전 작업이 현실적으로 어려울 수도 있다. 우리가 박정희를 반헌법행위자로 선언할 역량이 되느냐 안 되느냐의 문제”라고 말했다.

한 교수는 “그래도 박정희가 박근혜보다는 낫다”는 취지의 말을 남겼다. 그는 “박정희에게는 그래도 충신들이 있었다. 김재규 중정부장이나 박승규 민정수석처럼 자신의 직을 걸고 최태민 보고서를 올리던 사람들이 있었다. 김정렴 비서실장도 다른 비서관들에게 최태민과 어울리지 말라고 지시할 정도로 유신정권의 핵심 참모들은 분별력과 상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드러난 바로 볼 때 박근혜 정권의 참모 중에 최순실 문제에 대해 올바른 소리를 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 아니냐”며 씁쓸해했다.

김재규의 변호사 안동일 “김재규는 10·26 정신이 헌법에 들어갈 것이라 말했다”

오랫동안 진보-보수를 가릴 것 없이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을 긍정적으로 보는 여론은 거의 없었다. 보수 세력은 김재규를 ‘박정희를 죽인 사람’으로 생각했고, 진보 세력은 ‘부마항쟁으로 유신정권을 몰아낼 기회를 박탈한 사람’으로 취급했다.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던 안동일 변호사는 “김재규가 10·26 거사를 한 동기에 대해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민주화 인사들 중에는 10·26이 없었다면 이승만처럼 박정희를 끌어내릴 수 있었는데, 10·26 거사 때문에 박정희를 영웅으로 만들었다고 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저는 10·26 거사가 있었기에 유신이 종식되고 긴급조치가 해제되는 등 김재규에게 민주화의 공로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안 변호사는 “김재규가 유신의 앞잡이 노릇을 한 것은 맞지만, 그는 오랫동안 유신헌법의 비판자였다”며 10·26이 우발적인 권력 내의 다툼에 불과하다는 세간의 평에 동의하지 않았다. “김재규는 유신헌법이 제정된 때인 3군단장 시절부터 유신헌법에 비판적이었다. 건설부 장관, 중앙정보부장 시절에도 유신체제를 완화시키려 노력했던 인물이다.”

김재규는 1심 최후진술에서 10·26의 동기를 5가지로 설명했다. 그 중 첫째는 자유민주주의 회복이었고, 둘째는 국민의 많은 희생을 막는 것이었다. 안 변호사는 “세계적으로 우리나라가 독재국가로 몰리고 대미 관계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김재규는 유신체제를 무너뜨려 민주회복을 하자는 뜻에서 거사를 했다”며 “차지철은 캄보디아를 거론하면서 거기는 200만 명이 죽었는데 몇십만 명이 데모하는 게 별거냐고 말했고, 박정희는 ‘내가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재규는 ‘대통령 한 사람만 희생하면 되는데 왜 여러 사람이 피해를 봐야 하냐’는 생각에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것”이라고 설명했다. 안 변호사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10·26 거사의 직·간접적 동기를 재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재규는 유언을 남기기 전에 주변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대법원 재판이 끝난 후 안 변호사 등 변호인단은 신군부의 손길을 피해 도피 생활을 시작했다. 안 변호사가 도피하면서 친구 집에 보관해 둔 10·26 재판기록은 26년이 지난 2005년에서야 <10·26은 아직도 살아 있다>란 책으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안 변호사는 “전해 듣기로 김재규는 ‘언젠가 10·26을 혁명이라 부를 것이고, 헌법 전문에 4·19와 함께 10·26 혁명정신도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고 한다. 이승만 12년 독재를 깨뜨린 4·19가 헌법에 들어갔는데 18년 군사독재를 무너뜨린 10·26도 언젠간 헌법 전문에 들어갈 수 있지 않냐는 취지였을거라고 생각한다”며 말을 마쳤다.

<백철 기자 pudmak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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