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체크] 개헌, 정말로 '두 달 반' 안에 가능할까?

오대영 2016. 12. 14.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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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두 달 반'…어제(13일) 오늘 정치권 일각에서 제시된 시간입니다. 이 안에 개헌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김종인 의원/더불어민주당 : 우리가 4.19 이후에 개헌을 하는데 불과 두 달 반에 개헌을 했습니다. 6.10 항쟁 뒤 개헌도 역시 두 달 반 정도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개헌은 대한민국의 큰 틀을 바꾸는 일입니다. 두어 달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이게 가능할지, 급하게 후다닥 해치울 일인지 의문입니다. 팩트체크에서 확인해보죠.

오대영 기자! 그 당시에 정말로 두 달 정도 걸렸나요?

[기자]

개헌안이 발의된 뒤에 통과돼서 확정될 때까지 시간을 저희가 하나하나 세어봤습니다. 1960년 개헌에 35일 걸렸습니다. 1987년 개헌은 41일 만에 이뤄졌습니다. 한 달에서 한 달 반정도 걸린 거죠.

[앵커]

굉장히 신속했군요. 그러면 김종인 의원의 얘기가 맞네요?

[기자]

일단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개헌이 모두 9차례 이뤄졌습니다. 두 달 정도 되죠. 1960년에는 개헌이 두 번이나 있었는데 두 번째는 12일밖에 안 걸렸습니다.

[앵커]

12일은 좀 심한 거 아닌가요? 법안 처리하는 것도 아니고.

[기자]

이때는 법적으로 '국민투표' 절차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이 투표에 걸리는 시간이 한 달 정도 걸린다고 생각하면 그게 빠졌으니까 12일이 걸린 건데요. 1960년 이후로 국민투표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1987년을 예로 들면 개헌을 하려면 <발의-공고-국회표결-국민투표-공포> 순으로 이뤄졌습니다. 그래서 이 절차를 아주 빠르게 진행하면 두 달 반, 가능은 합니다.

김종인 의원의 말이 맞는 것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이건 그냥 기술적, 행정적 절차일 뿐입니다. 이에 앞서서 훨씬 더 많은 논의와 정치적 협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1987년 개헌 때 주요 내용만 추렸는데도 이렇게나 많습니다.

[앵커]

이게 오늘의 핵심이군요. 저기 보면 김영삼-김대중 '회동'도 있네요?

[기자]

당시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하나하나 기록한 겁니다. 1985년 6월 5일의 일입니다. 그날 '양 김'을 포함한 야권의 지도자들은 "내년(1986년)에 개헌을 해야한다"고 뜻을 모았습니다.

1986년 1월 17일에는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국론분열'을 이유로 개헌 논의에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런 논의가 1985년부터 87년까지 계속해서 이뤄졌습니다. 야권에선 개헌을 위한 '1천만 서명운동'을 거의 1년간 벌였습니다. 시민사회도 동참했습니다. 국민들도 동참했습니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은 반대했죠.

[전두환 전 대통령/4·13 호헌조치 (1987년 4월 13일) : 이제 본인은 임기 중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현행 헌법에 따라 내년 2월 25일 본인의 임기 만료와 더불어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할 것을 천명하는 바입니다.]

[앵커]

결국 6월 항쟁을 계기로 개헌이 이뤄졌죠. 그런데 이게 2~3년간 여러 논의와 충돌을 통해서 나온 결과였군요?

[기자]

이렇게나 많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제가 자료를 하나 더 보여드릴게요. 이건 1987년 헌법을 개정할 때 국민에게 이렇게 하겠습니다라고 공고한 내용입니다. 그 원본입니다.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마침내 국민대화합을 이룩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여야 합의에 의하여 헌법개정안을 제안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정치권과 국민이 다같이 동참했던 겁니다.

김종인 의원은 1987년 민정당 소속으로 개헌특위에 몸담고 있었습니다. 두 달 반이 아니라 3년 가까이 필요했다는 것을 누구보다 이런 사실을 잘 아는 위치였습니다.

[앵커]

1960년 개헌 때의 상황은 어땠나요?

[기자]

그땐 무척 달랐습니다. 개헌에 필요한 기술적 절차에 35일 걸렸고 국민 투표는 없었습니다. 1987년처럼 사회적 공론화가 없이 서둘러서 이루어졌습니다.

그에 앞서서 3.15 부정선거로 4.19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수습이 필요했던 자유당은 '내각제 개헌' 추진을 발표하죠. 그리고 다음날 이승만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를 내놓습니다.

하지만 분노한 민심은 계속됐고, 이 대통령은 결국 하야했습니다. 그 뒤에 내각제가 확정됐습니다. 그러니까 김종인 의원 말대로 이때는 두 달만에 이 모든 과정이 끝났습니다.

[앵커]

성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 여당에서 먼저 개헌을 꺼내 들었던 거군요. 지금과 상황과 비슷한데요?

[기자]

지금과 아주 비슷합니다. 당시 국민이 요구한 것은 '정·부통령 재선거'였습니다. 그러나 정치권에 내놓은 수습책은 '개헌'이었습니다.

자유당 입장에선 개헌을 통해 기득권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고, 야당 입장에선 그동안 요구했던 '내각제'를 이참에 관철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거죠. 여야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겁니다.

그래서 1960년의 개헌과 1987년의 개헌은 성격 면에서나 목적 면에서 무척 다릅니다. 기간도 매우 다릅니다. 그런데 김종인 의원이 '두 달 반'이라는 기간만으로 둘을 묶어서, 지금 개헌할 수 있다, 라는 근거로 내놓는 것은 설득력이 상당히 떨어집니다.

[앵커]

그런데 지금 개헌론자들은 1987년 이후 30년간 논의가 축적돼서, 시작만 하면 금방 할 수 있다, 라는 거잖아요?

[기자]

그렇게 얘기하고 있지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 합의의 주체가 되느냐, 이게 중요한 문제인데, 이번 최순실 사태에서 우리가 결정적으로 확인했던 건 헌법이라는 건 우리 삶에 녹아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걸 시민사회, 국민이 다 적극 동참해야하죠. 더구나 이번처럼 각계각층에서 민의가 쏟아질 경우에 개헌에 대한 생각은 굉장히 다를 수 있습니다. 오늘 취재과정에서 참고한 자료에는 이런 문구가 있었습니다.

"개헌의 소수의 현자가 결론으로 정해 국민에게 강요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일부 정치 엘리트가 결론을 낸다 해도, 국민이 지지를 보낼지 의구심"

개헌 문제가 어디에서부터 풀어야 하는지 어느 정도 답을 찾을 수 있는 자료였습니다.

[앵커]

'정치 엘리트'.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용어네요. 오대영 기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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