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크리트 지지층'은 이렇게 탄생했다

장정일 2016. 12. 10.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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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할아버지들은 일자리와 쓸모를 한꺼번에 빼앗기면서 서서히 빈곤 노인이 되었다. 이들을 어떻게 보호할지 장기적 정책을 세워야 한다. 제45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많은 노년층이 트럼프에게 표를 몰아주었다.

대한민국의 할아버지들은 한국 사회의 모든 독을 마다하지 않고 받아 삼킨 사람들이다. 이들의 종교는 미국·가부장제·박정희·삼성·경제발전·흡수 통일·빨갱이 척결·<조선일보> 등이다. 피의자가 된 박근혜 대통령의 변하지 않는 콘크리트 지지층도 바로 이들이다. 이들에 대한 진보 좌파의 해석은 진저리나게 똑같다. 가난한 두 70대 독거노인을 밀착 취재한 최현숙은 <할배의 탄생>(이매진, 2016)을 출간한 직후, 어느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시민단체들이 집회할 때, 마이크 소리 최대로 켜놓고 맞불집회 하는 할배들을 꼰대라고 하는데, 난 애초부터 그런 시각에 의심이 좀 있었어요. 이분들을 만나면서 제가 느낀 건 이래요. ‘이들은 자기의 시선으로 자기를 바라보기보다는, 가진 자들, 배운 자들의 시선과 평가를 좇아서 그걸 자기 정체성으로 내면화한다’는 점. 가난한 사람들의 경우엔 자기 정체성을 독립적으로 가질 기회가 드물어요. 그래서 많이 배운 사람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말을 모방해서 자기를 평가하고, 그 잣대로 세상을 보죠. 그래서 자기 계급을 배반하는 정치적 선택들, 자기 허상화, 이런 현상이 나오는 거죠.”

ⓒ이지영그림

지은이는 인터뷰 첫머리에서 시민단체들의 집회를 훼방 놓는 할아버지들을 ‘꼰대’라고 부르는 진보 좌파의 시각을 의심해왔다고 말한다. 하지만 방금 읽은 인터뷰나, “자기 계급에 기반하지 않고 재벌이나 정치 지도자들의 눈높이로 세상을 보고 있다”라고 책에서 강조된 빈곤 노인들에 대한 지은이의 해석은, 뭇 진보 좌파들의 그것과 전혀 다를 게 없다. 진보 좌파는 일당 2만원을 받고 우파 관제 행사에 동원된 노인은 물론이고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노인 일반을 통틀어, 누군가(재벌·정치 지도자)에게 ‘세뇌된 사람’이라는 관점으로만 바라본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할배의 탄생>의 표층을 이루고 있을 뿐, 같은 책의 심층은 전혀 다르게 말한다. 모든 텍스트는 저자도 모르는 균열을 품고 있다. 오로지 두 번 읽는 독자만이 유리하다. 텍스트의 균열을 읽어낸 독자가 그 책의 진정한 저자다.

전라북도 부안에서 태어난 김용술씨는 1945년생이고, 강원도 횡성에서 태어난 이영식씨는 1946년생이다. 두 사람 다 유복(有福)한 집안이 아니어서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다. 두 사람은 더 배우지 못한 것을 평생 후회하고는 했지만, 짧은 가방끈이 두 사람의 현재를 빈곤 노인으로 만든 가장 큰 원인은 아니다. 전자는 양복점 재단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후자는 근력이 좋았던 시절의 대부분을 목수와 공사장 인부로 지냈다. 두 사람은 그 시절을 잘나가던 때로 기억한다. 마음만 먹으면 쉽게 돈을 벌 수 있었다.

두 사람이 동반 몰락하기 시작한 것은, 그들이 배운 기술의 세계로 대량생산과 규격화로 요약되는 산업화가 물밀듯 들어오면서다. 김용술씨는 LG패션의 전신인 반도패션이 기성복을 만들면서부터 양복점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고 회상한다. 싸고 맵시 좋은 기성복이 나오면서 맞춤복은 사양길이 되었다. 이영식씨의 경우 아파트를 많이 지으면서 동네 목수들이 살아남기 힘들어졌다고 말한다. 공사 현장의 공법(工法)이나 재료가 기계화·조립화되면서 그만큼 목수의 일자리가 줄어들었다.

<할배의 탄생>최현숙 지음이매진 펴냄

“사무실에서 펜대 굴리는 일에는 평생 취직할 생각을 안 해봤어. 근데 젊을 때는 기술직이 사무직보다 백배 나았어. 왜냐? 자유롭지, 돈 많이 벌지, 머리 숙일 필요 없지. 공무원이 철밥통이라고 하지만 공무원들도 기술자, 자영업들을 부러워했어. 근데 보니까, 다 같이 못 배울 때나 기술직이 잘나갔던 거야. 기술이 무지하게 빠르게 발전하잖아. 그걸 못한 거야. 한때 잘나가던 자영업 기술자들, 양복, 양재, 구두, 이발, 세탁, 그런 거 다 젊어 한때 잘나갔지 지금은 다 퇴물이잖아. 대학에 박사까지 나오고 빠릿빠릿한 놈들이 다 컴퓨터로 하고 돈 투자해서 프랜차이즈하고, 그걸 우리 같은 사람들이 어떻게 쫓아가냐구. 세상 변한 거 보면 완전히 다른 세상에 있는 거 같아.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이런 게 상상도 못했던 거거든.”

산업화가 쫓아낸 “손맛”(김용술)과 “느낌”(이영식)의 생생한 즐거움을 만끽했던 두 사람은 인생관마저 놀랍도록 닮았다. “인생관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어. 남한테 해 안 끼치고 사는 게 원칙이라면 원칙인데, 나는 내 손발로 땀 흘려서 살았어”(김용술). “나는요 이런 말씀이 죄송스럽지만, 나대로 원칙을 가지고 살아요. 남한테 피해 주지 말고 살자. 내가 좀 손해 보더라도 나는 남한테 그러지 말자, 그게 내 원칙이에요. 그렇게 노력하면서 살았구요”(이영식).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어리 하나밖에 없는 두 사람으로 하여금 “나는 주머니에 돈 한푼 없어도 어디 가도 혼자 살 수 있다, 그 주의야”라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저력은 그들이 연마한 기술이다. 이런 세계관을 도저한 장인적(匠人的) 세계관이라고 부르고 싶다.

노인의 자긍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기초노령연금이 꼭 필요한 노인들이 기초노령연금 수령을 부끄러워하거나 노동자들의 연대와 파업을 못마땅해하는 이유는 독립 자존했던 시절의 장인적 세계관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이런 노인들을 세뇌된 사람이라는 관점으로만 보는 시각은 교정되어야 한다. 문제는 세뇌가 아니라 드높은 자긍심이다. 정진웅의 <노년의 문화인류학>(도서출판 한울, 2012)은 현실이 노인을 차별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로 규정할 때 혹은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아무런 힘이 없을 때, 노인들은 자랑스러웠던 과거를 현실대응책으로 내세운다고 한다. 이 자긍심을 퇴행적으로 볼 게 아니라, 거기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현재 폐휴지와 종이 박스를 줍는 노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그렇게 살지 않았다. 이들은 농업시대에 태어나 산업시대를 살다가 정보화시대에 이르러 자신의 직종이 송두리째 사라져버리고 기술이 쓸모없게 된 사람들이다. 일자리와 쓸모를 한꺼번에 빼앗긴 사람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빈곤 노인이 된다. 문제는 세뇌도, 높은 자긍심도 아니다. 이들의 자긍심과 기술을 사회적으로 환원하고 재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일하고 싶어 하는 노인들에게 최적화된 일자리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요즘은 뭐 노인들이 청년들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말이 있던데, 그런 거는 아니라고 봐. 노인이랑 청년 일이 다른데, 그럴 리가 없지.” 다가올 인공지능시대에 퇴출되고 사장될 산업시대의 마지막 노동자들을 어떻게 보호할지에 대한 장기적 정책을 세워야 한다. 제45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많은 노년층이 도널드 트럼프에게 표를 몰아주었다.

장정일 (소설가)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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