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애→ 은둔→ 국회의원→ 대통령→ 탄핵→ ?

권지혜 기자 2016. 12. 10. 0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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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 대통령 18년 은둔생활과 18년 정치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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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 18년 정치인생이 최순실 일가의 국정농단이라는 최악의 스캔들과 함께 막을 내렸다.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 부녀(父女) 대통령 기록도 빛이 바랬다.

박 대통령은 성심여중 2학년이던 1965년 청와대에 들어갔다. 74년 서강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그해 8·15 경축행사에서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에게 저격당해 숨지자 곧바로 귀국했다. 이때부터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다. 만 22살이었다.

79년 10월 26일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피살됐다. 다음날 새벽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으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들은 박 대통령이 “전방에는 이상이 없습니까”라고 물었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박 대통령은 9일장을 치르고 청와대를 나왔다. 그때부터 시작된 은둔생활이 18년간 이어졌다.

박 대통령을 정계로 불러낸 건 IMF 외환위기였다. 경제 상황이 나빠지면서 박정희정권 시절 고도성장에 대한 향수가 퍼졌다. 97년 대선 직전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가 지원 요청을 해오자 경북 구미 지구당에 입당했다. 아버지 고향이었다. 박 대통령은 “지난 세대가 이뤄놓은 많은 것이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아찔함 때문에 정치인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고 정계 입문의 변을 밝혔다. 이듬해 4월 대구 달성 보궐선거에 당선됐다.

박 대통령은 위기에 처한 당을 두 번 구했다. 2004년 한나라당이 차떼기 정당 오명과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휘청거릴 때 당대표를 맡았다. 천막 당사를 발판삼아 그해 치러진 17대 총선에서 121석을 얻으며 선전했다. 이때부터 2006년 6월 대표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2년3개월간 거의 모든 선거에서 이겼다. ‘선거의 여왕’이란 별명도 이때 붙었다. 2006년 5월 지방선거 유세 때는 면도칼 피습을 당하고 봉합 수술에서 깨자마자 “대전은요?”라고 물어 대전 지역 판세를 뒤집었다.

2011년 10월 한나라당이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패하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 디도스 공격으로 지지율이 바닥을 쳤을 때 박 대통령은 다시 비상대책위원장이 됐다.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당헌에 복지와 경제민주화를 넣었다. 이듬해 치러진 19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과반 의석을 확보했다.

그 여세를 몰아 박 대통령은 ‘100% 대한민국’ ‘준비된 여성 대통령’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2012년 12월 대선에서 승리했다. 대통령의 딸에서 대통령으로 다시 청와대에 입성했다. 청와대를 떠난 79년 11월 이후 33년3개월 만이었다.

정치인 박근혜와 대통령 박근혜는 달랐다. 박근혜정부는 집권 초부터 불통(不通) 비판에 시달렸다. 대통령 당선 후 약속한 탕평 인사는 첫 국무총리 인선(김용준 대통령직인수위원장)에서부터 꼬였다. 소통 부족, 인사 실패는 해를 거듭할수록 심해졌다.

집권 첫해는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공방으로 흘려보냈다. 이듬해 세월호 참사는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부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을 비롯한 청와대 참모진은 대통령을 ‘여왕’으로 모셨다.

새누리당에선 박심(朴心·박 대통령의 의중)만 살피는 강성 친박(친박근혜)이 득세했다. 박 대통령이 주변 관리를 못하는 사이 최순실과 그 일당은 권력을 사유화해 국정을 돈벌이 수단으로 삼았다. 그런데도 새누리당이 6·4지방선거와 각종 재보선에서 승리해 여권 전체에 콘크리트 지지에 대한 환상이 번졌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6월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며 자신에 반기를 든 유승민 원내대표를 ‘배신의 정치’로 낙인찍었고, 지난 4월 20대 총선 때는 ‘진박(진실한 친박) 감별 놀음’을 부추겼다.

민심은 총선 때 폭발했다. 새누리당은 122석을 얻어 원내 제2당으로 전락했다. 16년 만에 여소야대 국면이 펼쳐지면서 입법 권력이 야당으로 넘어갔다. 정권 레임덕의 신호탄이었다.

이후 박근혜정부가 역점 과제로 추진했던 공공·노동·교육·금융 등 4대 구조개혁은 사실상 폐기 수순을 밟기 시작했다. 유일한 가시적인 성과가 공무원연금 일부 개혁안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개혁안은 비박계 수장인 김무성 대표와 유 원내대표 시절 국회에서 통과됐다.

글=권지혜 기자 jhk@kmib.co.kr, 그래픽=전진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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