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통령 탄핵안 가결]부친 후광 업고 대권 올랐지만..'박정희 패러다임'도 종말

이용욱 기자 입력 2016. 12. 9. 22:16 수정 2016. 12. 9.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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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박근혜의 ‘정치 인생 18년’

박근혜 대통령과 황교안 국무총리(왼쪽)가 9일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직후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위원 간담회에 참석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박근혜 대통령(64)의 18년 정치인생이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됐다. 9일 국회 탄핵소추안 통과로 박 대통령은 헌정사에서 임기를 채우지 못한 또 한 명의 대통령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비선 실세’ 최순실의 국정농단이 추락을 촉발했지만, 실상 집권 4년 동안 역주행과 일방통치에 쌓였던 민심의 반감이 이번 일로 폭발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애초부터 박 대통령 부상이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 존재에 힘입었고, 아버지 통치 스타일을 적극 차용한 점에서 ‘박정희 패러다임’의 종말로도 여겨진다. 박 전 대통령이 1961년 5·16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지 18년만인 1979년 10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총탄에 사망한 데 이어 박 대통령이 정계 입문 18년 만에 대통령 권한이 정지된 것도 아이러니하다.

■ 정치입문 후 대통령 당선까지

박 대통령은 1998년 4월 대구 달성 보궐선거를 통해 정계에 입문했다. 시작부터 최순실씨와 전남편 정윤회씨 등 최태민 일가의 도움을 받았고, ‘문고리 3인방’(이재만·안봉근·정호성)도 그들이 발탁했다. 2000년 한나라당 부총재로 선출됐고, 당시 이회창 총재의 독선적 당 운영을 비판하면서 정치적 입지를 넓혔다.

2002년 2월 탈당해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지만 지지도가 오르지 않자, 2002년 12월 대선 직전 복당했다. 대선 패배 후 한나라당은 차떼기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난 데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밀어붙여 바닥으로 떨어졌다. 2004년 3월 대표로 추대된 그는 당을 천막당사로 옮기고, 전국을 돌면서 선거유세를 했다. 참패가 예상됐던 한나라당은 299석 중 121석을 얻었다.

한나라당 대표 시절인 2006년 6월 지방선거 유세 때 커터칼 피습을 당하면서도 선거 승리를 이끌었다. 당시 최씨가 병원을 지켰지만,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대표실에 근무했던 한 인사는 “웬 아줌마가 지극정성으로 간호를 하나 싶었다”고 했다. 2007년 1월 노 대통령의 ‘4년 중임제’ 개헌 제안을 거절하면서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 한 것은 지금껏 회자된다. 2년3개월 대표를 지내면서 각종 선거에서 집권여당 열린우리당에 ‘40 대 0’ 완승했고, ‘선거의 여왕’이란 호칭이 붙었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와 맞붙었지만 패했다. 당 후보 검증과정에서 최태민 일가 관련 의혹 제기를 번번이 부인했다. 2008년 18대 총선을 앞두고, 친박계 공천학살이 벌어지자 “국민도 속고, 나도 속았다”고 반발했다. 이명박 정부가 2010년 6월 세종시 수정안을 통과시키려 하자 부결을 주도했다.

2011년 12월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2012년 4월 총선에서 예상 밖 승리(152석)를 끌어냈다. 그 여세를 몰아 2012년 12월 대선에서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를 누르고 18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 ‘아버지 그늘’에 머문 대통령 박근혜

하지만 박 대통령은 권력을 잡은 후 아버지 시대로 돌아갔다. 경제민주화, 보편적 복지,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등과 같은 진보적 공약은 출범 직후 파기됐다. 2012년 대선 때 국정철학으로 내세운 ‘100% 국민대통합’도 없던 일이 됐다.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 때 “세월호로 경제가 다 죽는다”면서 유족들을 고립시키는 등 편가르기를 시도한 것이 대표적이다. 통합진보당 해산,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 등 종북몰이도 100% 국민대통합 약속에 위배된다.

아버지 시대의 인맥을 기반 삼아 아버지 시대를 연상시키는 정책과 통치술을 쓰는 등 역주행했다. 유신독재체제를 기획한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 기용은 상징적이다. 김 전 실장은 통진당 해산, 법원 견제, 야권 인사 고소·고발, 세월호 관련 여론조작과 언론통제 등 다방면에 손을 뻗었다.

남북관계는 체제 대결을 벌이던 과거로 돌아갔다. 대통령이 직접 개성공단 폐쇄 결정을 내리고, 북한 체제 붕괴론을 꺼내들었다. 안보위기를 강조해 국민들을 겁주고 ‘총화 단결’을 강조한 것도 아버지 때 수법이다. “역사를 잘못 배우면 혼이 비정상”이라며 국정교과서를 밀어붙인 것도 ‘독재자’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한 것이란 의심을 받았다.

정경유착 관행도 되살렸다. 박 대통령이 미르·K스포츠 재단 모금을 위해 대기업에 압력을 행사한 것도 정부가 기업들을 관 주도 사업에 동원했던 과거 습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다.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며 자신을 비판했던 유승민 전 원내대표를 지난해 7월 찍어낸 것도 집권여당을 청와대 출장소쯤으로 여기는 구시대적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난 5월엔 아버지 시대 수교를 맺고, 새마을운동에 우호적인 아프리카 3개국을 방문해 ‘아버지의 길 좇기’ 비판을 받았다.

<이용욱 기자 wood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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