癌으로 쓰러진 '155km의 남자'.. 사랑이 일으켰다

이순흥 기자 2016. 12. 8. 03:0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영광의 2016년] 원종현
작년 1월 대장암 수술 뒤 재기
NC를 한국시리즈까지 이끌고 생애 첫 WBC 국가대표로 뽑혀
장에 좋은 음식 삼시 세끼 해준 여자친구와 모레 웨딩마치
"그녀는 나를 일으킨 에너지"

2015년 1월 29일, 스물여덟 살 남자는 대장암 수술을 받았다. 동갑내기 여자 친구에겐 간단한 시술이라고 거짓말했다. 비밀은 오래가지 못했다. 프로야구 선수인 남자의 이야기가 곧 신문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여자는 기사를 보고 소식을 알았다고 한다. 창원에 사는 여자는 바로 서울행 버스를 탔다. 4시간을 넘게 달려 병원에 도착했을 때 남자는 이미 수술방에 있었다. '꼭 살려 주세요' 간절한 기도 덕분이었을까. 마취에서 깨어 반쯤 눈을 뜬 남자 앞에 어슴푸레 그녀가 보였다. "왜 말 안 했어?" 눈물 섞인 목소리에 그는 아무 답을 하지 못했다. 둘은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그로부터 꼬박 16개월이 흐른 지난 5월 31일. NC 다이노스 원종현(29)은 창원 마산야구장(두산전)에 다시 섰다. 주변에선 '인간 승리의 아이콘'이라며 치켜세웠지만 정작 본인은 비뚤게 눌러 쓴 모자,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였다. 그는 9회 마운드에 올라 세 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관중은 '원종현'의 이름을 연호했다.

이날 경기를 시작으로 그는 정규 시즌 54경기에서 3승3패3세이브 평균 자책 3.18을 올렸다. 암을 극복하고 돌아온 선수라고는 믿기 어려운 기록이었다.

기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LG와의 플레이오프에서 호투하며 팀을 창단 첫 한국시리즈로 이끈 원종현은 내년 3월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 국가대표 최종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다. '재기(再起)상' 타이틀이 붙은 상도 5개나 받았다. 그는 "그저 다시 공을 던질 수 있기만 바랐는데 생애 첫 태극마크까지 달게 됐다"며 "아직 이 모든 일이 믿기지 않는다. 2016년은 내 인생 최고의 해로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3주 정도 남은 2016년, 원종현에겐 또 다른 선물이 남아 있다. 그는 2년 7개월 사귄 여자 친구 박효연(29)씨와 오는 10일 결혼을 앞두고 있다. 원종현은 "예비 신부는 내가 다시 마운드에 설 수 있도록 만든 에너지"라고 했다. "수술을 마치고 눈을 떴을 때, 여자 친구가 가장 먼저 보였어요. '이 사람이랑 꼭 결혼해야지'란 생각이 들었죠."

원종현은 대장암 수술 후 12번의 항암 치료를 받는 동안 고향 군산에 머물렀다. 긴 거리 때문에 여자 친구는 2주에 한 번 찾아왔지만, 두 사람은 매일 2시간 넘게 영상통화를 하며 사랑을 키웠다.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돼 창원으로 돌아온 뒤엔 여자 친구의 '내조'가 더 빛났다. "장에 좋은 음식을 배워 삼시 세끼 해줬어요. 전골이나 불고기, 양배추 요리 등등 다양하게요. 한국 사람은 밥심으로 산다잖아요. 그 밥 먹고 힘내 성적도 잘 나온 것 같아요(웃음)."

큰 파도를 겪으며 원종현이 가장 깊이 깨달은 건 '일상의 감사'다. "병원에서 죽만 먹다가 처음 반찬을 먹었던 날이 기억나요. 김치 한 조각을 씹는데 그렇게 맛있더라고요. 내가 아무 생각 없이 했던 행동, 먹었던 음식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때 알았습니다."

야구를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다. 2006년 데뷔한 그는 LG에서 한 번도 1군 무대를 밟지 못하고 방출됐다. 이후 여기저기를 떠돌았다. 그땐 야구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지금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마운드에 오른다. 원종현은 "공을 던질 땐 모든 잡념이 사라지고 완전히 집중하게 된다"며 "내가 여전히 야구 선수로 뛸 수 있다는 생각에 행복하다"고 말했다.

원종현은 2012년이 돼서야 NC에 자리를 잡았지만 생각도 못 했던 암 발병으로 그라운드를 떠나야 했다. 그때 NC 선수들은 모자에 숫자 '155'를 새겼다. 그의 최고 시속 155㎞ 강속구를 뜻하는 문구였다. 그는 지난달 플레이오프 2차전(LG전)에서 또 155㎞를 찍었다. 그에게 '155'는 어떤 의미냐고 묻자 주저 없이 답이 돌아왔다.

"저의 투지와 투혼이 담긴 숫자죠. 그 공을 던지기 위해 제가 어떤 노력을 했는지 스스로 잘 아니까요." 순간 원종현 생애 '최고의 해'는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