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민규의 노동과 삶]맑고 아름다운 연대를 꿈꾸며

오민규 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 2016. 12. 7.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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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통상임금 문제 잘 해결하겠다.” 대통령 취임 직후인 2013년 5월8일, 미국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이 대니얼 애커슨 GM 회장에게 약속한 내용이다. 통상임금 소송 하급심에서 노동자들이 계속 승소하고 있었다. 거짓말처럼 박 대통령의 한마디가 나온 뒤 갑자기 대법원은 전원합의체를 소집하더니, 민법상 ‘신의칙’이라는 이상한 논리까지 동원하며 하급심 판결을 사실상 뒤집었다.

한국지엠은 통상임금 소송에서 패소할 것을 염두에 두고 6260억원의 비용을 2012년 회계장부에 미리 반영해둔 상태였다. 그런데 대법원 판결이 뒤집히자 다시 2013년 회계장부에 7890억원을 환입했다. 다시 말해 이 판결로 한국지엠은 무려 7000억~8000억원의 직접적인 혜택을 받은 것이다. 한국에서 재벌로 분류되지도 않는 한국지엠에 대한 정부와 사법부의 태도가 이 정도였으니, 재벌들에 대해서는 얼마나 많은 혜택을 주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앞에서 인용한 박 대통령의 약속은 당시 애커슨 GM 회장이 “엔저 현상과 통상임금 등 노동시장 문제만 없다면 한국시장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발언에 대한 답변으로 나온 것이었다. 민원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한국시장 포기 운운은 사실상 협박으로 느껴지는 대목이다.

청와대 집무실도 아니고 삼청동 안가에서 박 대통령이 재벌 회장들을 은밀하게 독대했는데, 과연 그 자리에서 단순히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출연 얘기만 있었을까? 재벌 회장들 역시 민원인지 협박인지 모를 얘기를 쏟아냈을 것이다.

국회 국정조사특위 윤소하 의원이 지난 5일 공개한 내용을 보면 재벌 회장들은 박 대통령과의 독대 자리에서 다양한 현안 문제 해결 등의 요구를 했음이 확인되었다. 이를테면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은 환율 안정과 불법 노동행위에 대한 엄격한 법 집행을 요구했다고 한다. 애커슨 회장이 3년 전에 했던 얘기와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는가!

재벌과 대기업은 박근혜 권력을 등에 업고 통상임금 문제 해결, 민주노조 탄압, 노동개악과 성과퇴출제 강행 등 수많은 ‘갑질’을 벌일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비정규직 양산과 초과 착취였다. 비정규직 노동자 수천명이 불법파견 판결을 받았는데도, 정규직 전환을 거부한 정몽구 회장은 형사처벌은커녕 벌금 한 푼 물지 않았다. 자신의 불법은 시정하지 않으면서 불법 노동행위의 엄격한 법 집행을 요구하는 뻔뻔함 뒤에는 박 대통령이 있었던 것이다.

지난 11월30일 한국지엠 창원공장 비정규직 노동자 360여명이 해고예고 통보서를 받았다. 창원공장 8개 사내협력업체 중 4개 업체에 대해 연말에 계약을 종료한다는 것이다. 사내협력업체 절반을 일거에 계약 종료하는 일은 이례적인 사건이다. 이 공장에는 비정규직노조가 결성되어 있는데, 조합원 대부분이 이들 4개 업체에 속해 있다. 이번 기회에 눈엣가시 같은 비정규직노조를 없애려는 목적 말고 다른 이유가 또 있을까?

권력의 뒷배를 둔 재벌과 대기업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이런 행태를 자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 재벌·대기업의 뒤를 봐주던 박근혜 권력은 이제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다. 저임금과 고용불안, 생활고에 시달려온 시민들은 박 대통령을 퇴진시켜야만 더 나은 세상이 열린다는 확신으로 추운 겨울 거리로, 거리로 내닫고 있다.

박 대통령과 재벌은 공범이다! 어떤 범죄에 대한 공범자들인가? 국민들에게 선출되지도, 검증되지도 않은 비선 실세·관료·재벌들이 이 나라 정치와 경제 권력을 독점한 범죄이다. 모든 사회적 부를 그들이 독차지하고 노동자·서민들은 하루하루 불안한 삶과 최저임금에 시달리도록 만든 범죄이다.

박근혜 퇴진 요구는 단순히 대통령 얼굴을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자는 뜻만 담긴 게 아니다. 비선 실세·관료·재벌들의 권력과 부에 대한 독점을 해체하고,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한국지엠 창원공장 비정규직처럼 해고 위기 앞에 처한 이들과 함께하는 것이 공범자들을 단죄하고 박근혜 권력을 제대로 퇴진시키는 길이 아닐까.

박근혜 퇴진 요구를 걸고 거리의 시민들이 연대하는 것처럼, 답은 더 넓은 연대에 있다. 만일 한국지엠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정규직이 연대하고, 아직 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노동자들과 연대하여 노조로 단결하고, 지역의 노동자·시민들과의 연대를 더욱 확대하고, 심지어 지역 촛불의 민심까지 모아내며 해고를 막아낸다면, 수많은 시민과 미조직 노동자들은 “우리는 할 수 있다. 이제 때가 왔다”는 신호로 받아들일 것이다. 박근혜 즉각 퇴진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될 것이다.

2000년대 초반 민주노총 서울본부 사무처장을 지냈던 고 박상윤 노동운동가를 기리기 위해 ‘맑고 아름다운 상’이 제정된 바 있다. 2005년 이 상의 첫 수상자로 지엠대우 창원공장 정규직노조 지부장이 선정되었다. 누구보다 비정규직 사업에 열심이었던 고인의 넋을 기리는 첫 수상자로 정규직 노동자가 선정된 것인데, 당시 지엠대우 창원공장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연대에 앞장섰던 모범을 기억하기 위해서이다.

저력이 있는 곳인 만큼 이번에도 정규직·비정규직의 ‘맑고 아름다운 연대’가 실현되기를 기대해본다. 그러한 연대가 다시 촛불항쟁에 나선 시민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노동자·시민의 연대로 승화시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소중한 승리로 이어지고, 그러한 감동이 더 많은 미조직 비정규직 노동자의 진출로 이어지기를.

<오민규 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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