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괴의 에너지 [자괴] : 스스로 창피하고 부끄러워 함

2016. 12. 7.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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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자괴 시대다. 한자인 자괴는 스스로 ‘자’와 부끄러울 ‘괴’가 합쳐진 말이다. 이 명사에는 함정이 있다. 보통 자괴를 표현할 때는 뒤에 감을 넣는다. 번역하면, 스스로 부끄러워 하는 것 같은 느낌, 이렇게 해석된다. 보통 사람들이 자괴를 자괴감으로 표현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곧 법정에 서거나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자괴’ 뒤에 ‘감’을 붙이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자괴와 자괴감 사이의 엄청난 괴리에 자괴감을 느낀다

스스로 부끄럽다고, 내가 언제 그랬습니까. 스스로 부끄럽다는 ‘느낌’이 왔다는 뜻이었죠. ‘부끄럽다’와, ‘부끄러운 느낌’이 어떻게 같은 뜻이란 말입니까. 자괴감을 유행어로 만든 박근혜 대통령이 훗날 이런 말을 할 수도 있다. 정치인의 수사란 그런 것이다. 손석희가 고백과 자백의 차이, 퇴진과 진퇴의 괴리를 이야기할 때 시청자들은 정치인들의 말장난에 분노했다. 사실은 그게 다가 아니다. 공인의 공적 발언은 공적 기록이라는 힘을 갖고 있다. 좋은 결말을 만들면 영웅이 되기도 하지만, 실수로 법정에 설 경우에는 그 어떤 발언이 치명적 증거가 될 수도 있다. 자괴와 자괴감은 분명 다른 뜻이다. 이렇게 단어 하나에도 정치적 수사가 담겨있거나 법률 적용 시의 차이를 접하는 마음, 그 또한 자괴감으로 연결된다. 이렇게 행간의 의미까지 헤아리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국어 공부를 왜 그렇게 열심히 했는지 자괴감이 들 수 밖에.

대통령의 표현이 불을 지른 면도 있지만 요즘 세상은 도처에 자괴감드는 일 투성이다. 유권자들의 자괴감은 청와대에만 머물지 않는다. 자식을 잃은 부모를 조롱하는 국회의원을 뽑은 지역 시민, 비상식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 그리하여 도대체 내가 지역 민의의 대표를 뽑은 건지, 지역 대표 망나니를 뽑을 건지 헛갈리는 순간 밀려오는 자괴감은 건강에 나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잠시라도 웃자며 SNS에 올라온 ‘대국민담와 – 담화가 아니라 담와’ 사진은 웃음이 나오는 짤이지만 실제로 정치인의 어처구니 없는 막말을 접하는 시민은 분노하며 위산을 분출하게 된다.

시민의 자괴감에 불을 지르는 존재는 정치인 뿐이 아니다. 그동안 친근한 느낌을 갖고 있던 건강식품회사 회장이 국민 주권을 외치는 시민을 ’데모’, 취재팀을 옛날 이야기나 파헤치는 언론으로 폄훼하는 것을 보며, 소비자들은 ‘서민적 이미지’가 꼭 ‘서민편’은 아니라는 사실을 또 다시 확인하며 자괴감에 빠진다. 젊은층에게 꽤 인기있는 패션브랜드의 사장이 “백만 명이 시위하고 있을 때 다른 4900만명은 무언가 자기 일을 하고 있다”고 발언한 사실이 알려졌을 때 트렌드, 그것도 매일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야 하는 SPA 패션 브랜드를 진보적 개념으로 알고 있었던 소비자들은 ‘진보적 브랜드’와 ‘진보적 브랜드 사장’과는 아무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인간의 외로움과 벗과 위로를 노래해 가슴 찡한 메시지를 던져주었던 왕년의 인기가수는 시위 시민을 ‘빨갱이 사탄’으로 칭했다는 논란으로 스스로 셀프 안티가 되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발언이나 트윗 내용이 문제가 되자 사실은 그게 아니라며 변명을 늘어놓지만 그런 사과와 궤변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별로 없다. 오히려, 이럴 때 자기 입장을 분명히 밝히는 것도 좋은 일, 바람직한 커밍아웃이라는 의견이 올라고 있다.

▶패러디로 잠시 웃지만 분노가 꺼지는 건 아니다

대형 사건이 터지고 정치인이나 재벌이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을 때마다 그랬듯, 이번에도 자괴감을 주제로 하는 패러디들이 봇물처럼 터졌다. 담화문의 ‘자괴감’ 부분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 꼴 보려고 조선을 침략했었나’ 하며 염장을 질렀고, 환웅의 자손들은 ‘이런 인간 세상 보려고 쑥 마늘을 그렇게도 많이 먹었던가’ 후회했다. 구글 지도 공개 불허가 최순실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미확인 소문에 대해서 포켓몬은 ‘이러려고 포켓몬이 되었나’ 하며 슬퍼했고 최순실 굿판 관련해서는 영화<곡성>에 등장했던 황무당이 출연, ‘이러려고 무당 연기했나’ 하며 허탈해 했다. 최순실 딸의 이화여대 부정입학을 놓고는 신데렐라가 나서서 ‘그 비싼 신발 흘린 것을 후회한다’고 했고, 이마에 선글라스를 쓰고 등장하는 푸우는 최순실과 자신이 비교되는 것에 대해 큰 자괴감을 느낀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담화 패러디의 최고봉은 역시 하지원이다. 이러려고 길라임 했나 자괴감 들고 괴롭다는 패러디가 나온 직후, 실제로 하지원은 기자들에게 ‘새영화 <목숨 건 연애>의 주인공 이름이 ‘한제인’이’라며 그 이름만은 사용하지 말아달라며 꼬집었다. 국민을 가슴아프게 만든 패러디도 등장했다. 수능 끝낸 고3들의 ‘이러려고 공부했나’가 그것이다. 전교 순위권에 들어가지 못하면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갈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입시 상황에서 최순실 딸은 학칙까지 바꿔가며 수도권 주요대학에 입학시켜주었고, 교수가 학점 관리까지 해주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청소년들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졌을까. 학생들은 자괴감 정도가 아닌 폭발 직전의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자괴감에서 시작된 패러디는 광화문 광장으로 이어졌다. 패러디는 주로 깃발이나 보드를 통해 표현되었다. 패러디성 깃발을 유행시킨 ‘장수풍뎅이연합’(장수풍뎅이와 무관한 깃발로 밝혀짐)을 비롯 청와대의 비아그라 구입을 풍자하는 고산병연구회, 비아그라가 웬말이냐 거세하라 모형, 치킨이 뭔 죄냐, 하야하그라, 한국고산지발기부전연구회, 전국주름살연대, 연극뮤지컬단두대연합, 문고리3인방을 패러디한 전국삼형제연합, 민주묘총, 범야옹연대, 범깡통연대, 얼룩말연구회, 거시기산악회, 일못하는사람유니온, 트잉여운동연합(트위터를 하는 잉여인간), 전견련(전국견주연합), 국경없는 어항회, 화실련(화분 안죽이기 실천시민연합), 허물없는 연합(파충류 덕후 모임) 등 기발한 문구가 광화문 광장 하늘을 펄럭였다. 깃발의 종류가 점점 많아지는 현상도 뚜렸했다. 재미있어서 나름 만들어 나오는 면도 있지만, 지금 온 국민이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무슨무슨 연합, 연구회 등 단체를 상징하는 이름을 통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시국에 패러디는 매우 중요한 순기능으로 작용한다. 사람은 분노할 때마다 ‘노르아드레날린’이 분비된다. 이 호르몬은 혈액을 뇌에 집중시키는 작용을 한다. 노르아드레날린은 각성과 흥분, 전투력을 키워주는 효과가 있지만 너무 심하게 분비될 경우 오히려 우울증을 유발할 수도 있다. 뉴스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보도를 접하고 분노게이지가 수직 상승하면 즉시 노르아드레날린이 뿜어나오며 피가 쏠려 어질어질해지기도 하고 몸 상태에 따라 얼굴이 창백해지기도 한다. 때로는 심박수가 급격하게 빨라져 호흡 곤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 심장마비 증상이 오기도 하고 뒷목이 뻣뻣해지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이럴 때 패러디는 분노 호르몬을 줄여주고 마음의 평정을 찾게 하며 낙관적인 생각을 불러일으켜 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부글부글하던 마음에서, 그래, 이렇게 축제처럼 즐기면서 원하는 것을 해내면 우리 국민 모두가 노벨상을 받을 지도 몰라, 이런 긍정이 마음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적당한 자괴감은 병이 아니다

자괴감은 절대적 자괴감과 상대적 자괴감으로 나눠진다. 절대적 자괴감은 자신의 부족함, 실수에 근거한다. 얼마 전 메선지를 통해 지인들에게 자괴감의 순간을 물어본 뒤 얻은 나름의 결론이다. 필자의 경우 주로 절대적 자괴감을 많이 겪었다. 날짜 가는 줄 모르고 있다 어제 탔어야 할 비행기를 오늘 타겠다며 공항에 나갔을 때, 여권 유효기간이 끝난 것도 모르고 유럽 여행 가겠다며 공항에 나갔다 집으로 돌아갔을 때, 점심 약속이 있는 걸 깜빡하고 또 다른 약속을 잡았다 밥을 두 번 먹었을 때, 부산행 고속버스를 탄다는 게 대구행을 타고 룰루랄라 했을 때 등 주로 여행 중 실수로 자괴감에 빠졌던 기억이 많다. 한편 메신저 질문에 대한 답변들은 다소 심각한 것들도 있었다.

고등학교 절친을 10년 만에 만나 다시 과거의 우정을 불태웠는데, 무엇에 홀렸는지 그만 사기를 당한 50대 남자는 절대적 자괴감에 빠져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상항이 되었다. 딱 오 분 거리에서 무슨 일이 있으랴 하며 음주운전을 했다 수백만 원의 벌금을 내게 된 공무원은, 돈은 고사하고 중징계를 받게 될 처지에 놓여있다. 빈대떡 식당을 해서 큰 돈을 벌던 은퇴남이 꽃뱀으로 의심되는 여자에게 사기를 당해 가게를 들어먹기도 했다. 최근 귀농한 40대 부부는 농부학교에서 그렇게 강조한 예초 작업 안전 대책을 꿰고 있으면서도 단 하나의 사소한 규칙을 챙기지 못해 구경하던 할머니 이빨을, 그것도 이미 절반 밖에 남지 않은 앞니에 돌을 날렸다. 큰 손해를 봄은 물론 동네 사람들에게도 찍히는 결과를 가져왔다. 40대의 한 미용실 원장은 잔소리가 많은 편인데, ‘이런 말 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텐데’ 하면서도 툭 던져버린 지적질의 결과가 늘 손해로 이어지고, 그런 행동이 거듭되고 있는 자신을 볼 때 자괴감에 빠진다고 했다. 꼰대로 늙어가는 게 죽기보다 싫었던 부장급 직장인은 자신이 30대 시절 혐오했던 부장이 저질렀던 모든 악행을 답습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죽어버리고 싶었다며 탄식했다. 아직도 자신이 젊다고 착각하며 사는 50대 이모 씨는 마트나 가게 직원이 ‘아버님’이라고 부르면 발끈하며 ‘당신같은 딸 둔 적 없다’고 면박하곤 하는데, 해외여행 때 다른 사람 좌석에 앉았다 주인에게 지적질 당한 게 벌써 네 번째라며 훌쩍였다. 자녀들을 쥐잡듯 잡는 30대 여성 성모 씨는 초등학생 딸이 어느날 ‘딸래미 쪽 주는 게 그렇게 즐거워? 이제 소재 좀 바꾸시든가’라며 덤볐을 때 자괴감에 빠졌다고 했다. 절대적 자괴감은 스스로의 반성과 노력을 통해 극복할 수 있는 게 대부분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실수를 거듭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상대적 자괴감은 스스로 극복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 문제가 된다.

30대 직장인 조모 씨는 공군을 제대했는데, 공동 목욕탕에서 미군 병사와 마주친 뒤로 상대적 자괴감에 빠져 인생의 자신감을 상실했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질문에는 나중에 소상히 말씀드릴 기회를 만들겠다며 메신저방을 나갔다. 맥주광 30대 박모 여인은 박스 원피스 차림으로 모임에 나간 적이 있는데, 대동강 에일을 잔뜩 마시고 2차를 가는 도중 바람이 불어 치마가 뱃살에 붙어버렸다. 그걸 본 누군가가 몇 개월이냐고 물었을 때 죽어버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원치 않는 비혼 신세도 짜증나는데, 눈치도 예의도 없는 인간이라며 발언자를 저주했다. 50대 남자들은 상대적 자괴감을 주로 지하철에서 겪는 것 같다. 아직 멀쩡하다고 생각하며 사는데, 젊은 사람이 자리를 양보하면 심장이 멎는 것 같다는 게 대부분 경험자들의 이야기다. 그럴 경우 어떻게 대처하냐는 질문에 대해, 괜찮다고 손사레를 친 뒤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버리기도 하고, 괜히 휴대폰을 귀에 대고 다른 칸으로 달아나기도 한다.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염색을 하는 경우도 있다. 공식적 조사 수준은 아니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자괴감을 느끼는 일들은 누군가에게 결정적 피해를 주는 일도, 자신을 저주할 정도의 낭패도 아닌, 소소한 일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다고 매사 가볍게 넘길 수만도 없는 일이다. 자괴감의 사전적 뜻은 스스로 부끄럽고 창피함이지만, 한 발 더 들어가면 그 기저엔 자신에 대한 실망이 깔려있다. 시험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사람이 시험을 망치면 사실 자괴감까지 들지는 않는다. 놀았는데 잘 보는 게 더 이상한 거라는 걸 본인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열심히 했는데 망했을 땐 심한 자괴감에 빠진다. ‘내가 이것밖에 되지 않는가’ 라는 실망감이다. 여기서 사람은 두 가지 심리 사이에서 고민하게 된다. 첫째, ‘인정’이다. 늘 열심히 하지만 결과 또한 늘 이 정도이군, 나의 한계는 여기까지야, 그걸 알고 ‘맞춰 살자’,로 결론내리는 쪽과, 내가 이것밖에 되지 않다니, ‘실망스럽다, 칵 죽어버릴까!’ 쪽이다. 전자의 경우 차근차근 발전할 여지가 있지만 후자는 더욱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심리학자들은 자괴감이 우울증으로 가는 일은 거의 없다고 말한다. 자괴감을 느끼는 것 자체가 자신을 사랑하는 뜻이고, 사소한 자괴감은 금세 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망각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유리한 기억만 하는 본능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엄청난 실수까지 쉽게 잊어버리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뼈저린 실수의 경우 창피하다고 숨기고 사는 것보다 오히려 개그 소재로 만들어 주변 사람들을 웃겨주는 게 차라리 도움 된다고 한다. 타인의 실수를 비웃으며 좌중을 웃기려 하는 것은 오히려 비웃음만 당할 수 있지만 자신의 실수담을 털어놓는 것은 웃음도 주고 학습효과도 줄 수 있으니 일석이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자괴감보다는 충만한 자애감을 키우라는 게 심리 상담가의 공통된 조언이다. 잘 하는 자신을 늘 칭찬하고, 자신의 실수에 대해 모든 사람이 비난하더라도 자신만큼은 ‘그럴 수도 있지 뭐, 다음엔 잘하자!’ 이런 습관이 자애심을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자괴감의 이유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손해를 보지 않았을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상대, 또는 집단의 가슴에 총질을 해놓고 ‘괜찮아, 그럴 수도 있어, 죽을 죄 아냐’라고 하는 뻔뻔함과는 질적으로 다른 이야기다.

[글 아트만(텍스트씽크) 사진 픽사베이]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557호 (16.12.14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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