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단독]"목사들 최태민에 이용당했다..구국선교회 순수한 줄 알았는데"

유영대 기자 2016. 12. 7.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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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로복지회 회장 변창남(75·사진)목사가 감회에 젖었다.

변 목사는 7일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1975년 박근혜 영애와 최태민이 만든 대한구국선교회는 ‘십자군’ 군복을 입고 계급장을 달았다. 부산 단장인 나는 별이 세 개였다"고 회고했다.

그는 "근혜 영애와 최태민이 부산 쪽 야간무료병원 개원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목회자인 나는 선교회가 영세민을 위한 무료병원을 운영하는 등 순수한 단체인 줄만 알았다. 대부분 목사들이 이용당한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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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십자군 부산사령관, 한국경로복지회장 변창남 목사 인터뷰
1976년 5월 15일 부산 야간무료의원 개원식 후 오찬 모습. 오른쪽 세번째가 부산 사령관 변창남 목사. 맨 왼쪽이 최태민. 한국경로복지회 제공


㈔한국경로복지회 회장 변창남(75·사진)목사가 감회에 젖었다. 최근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으로 복지회 설립 당시의 일화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변 목사는 7일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1975년 박근혜 영애와 최태민이 만든 대한구국선교회는 ‘십자군’ 군복을 입고 계급장을 달았다. 부산 단장인 나는 별이 세 개였다”고 회고했다.

별세개를 단 변창남 목사(왼쪽), 오른쪽은 박영수 당시 부산시장.

그는 “근혜 영애와 최태민이 부산 쪽 야간무료병원 개원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목회자인 나는 선교회가 영세민을 위한 무료병원을 운영하는 등 순수한 단체인 줄만 알았다. 대부분 목사들이 이용당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선교회가 정치적으로 변질되지 않았다면 이번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1975년 설립한 대한구국선교회는 이듬해 구국선교단으로, 79년 새마음봉사단으로 단체 명칭을 바꿨고 전두환 신군부가 해산시켰다.

변 목사는  “되도록이면 언론에 나오지 않고 조용히 있으려 했다”면서 "선교회는 해산됐지만 유일하고 순수하게 사업을 계속하는 곳이 있음을 알리고 싶었다. 바로 부산 연제구 중앙대로에 있는 한국경로복지회”라고 말했다. 

인터뷰는 이메일과 전화 등으로 이뤄졌다. 다음은 변 목사와의 일문일답이다.

1976년 2월 박정희 전 대통령이 근혜 영애와 함께 갑자기 서울 북아현동 야간무료의원을 방문했다.

-선교회가 순수한 단체인줄 알았다고 했는데.
“대한구국선교회 출범 당시 정신은 나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아시다시피 70년대 초 국내·외 정세가 무척 혼란스러웠다. 당시 ‘반공’과 ‘구국’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대 상황이었다. 이것을 이용한 사람이 최태민이다. 최태민이는 당시 박근혜 영애의 후원으로 75년  대한구국선교회를 조직하고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에 야간무료의원을 개원했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낮에 일해야 했고 몸이 아파도 병원에 다닐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야간무료의원은 서민들에게 큰 인기와 호평을 얻었다.”

-야간무료의원 업무가 순수했다고 말하는 것인가.

1977년 6월 3일 경로의원 개원식 모습. 오른쪽 세번째 박근혜 영애가 개원 테이프를 끊고 있다. 맨 왼쪽이 변창남 목사


“그렇다. 정말 순수한 업무였다. 무료로 영세민들에게 진료해 주고 약을 제공하는 사업이니 그것이 순수한 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76년 2월 박정희 전 대통령이 근혜 영애와 함께 갑자기 서울 북아현동 야간무료의원을 방문했다. 박 전 대통령은 몰려드는 환자를 보고 크게 놀랐다. 박 전 대통령은 관계자들을 불러 ‘병원은 많아도 돈 없는 사람은 갈 데가 없다. 필요한 일인 것 같다. 이런 야간 무료의원을 전국 곳곳에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16개 시·도에 야간무료의원을 개원했다. 지방의사회 등의 도움을 받아 오후 6시부터 다음날 7시까지 운영했다. 이런 순수함에 박 전 대통령과 근혜 영애도 큰 감동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의 의료보건정책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일에 어떻게 관여하게 됐는지.
“당시 대한예수교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73년 부산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교계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었다. 그걸 최태민이 눈여겨 본 것 같다. 74년 한번은 나를 서울로 부르더니 대한구국선교회 조직을 하는데 부산 조직을 맡아 달라고 했다. 쉽게 말해 부산지회장을 맡았다. 야간무료의원 개원도 도와달라고 했다. 구국선교회 끝날 때까지 맡았다. 당시 선교회는 십자군이라고 해서 군복을 입고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30대 후반, 부산사령관인 나는 별이 세 개였다.”

2007년 3월 4일 한국경로복지회와 경로의원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가운데).

-당시 박근혜 영애가 이 일로 부산에 왔다던데.
“최태민을 만난 뒤 한 달 뒤인가,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다. 근혜 영애가 부산에 가니 수영공항에 마중 나오라는 것이었다. 공항에 나가니 당시 박영수 부산시장과 구용현 교육감, 법원장 검사장들이 나와 있었다. 근혜 영애는 나를 환대했다. 그리고 동래관광호텔 식사에 초청했고 이 자리에서 야간무료의원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76년 3월 2일로 기억한다.
의료기기와 비품은 근혜 영애가 해 주셨고, 운영비는 부산시장이 만들어 주었고, 장소는 교육감이 빌려 주었다. 나는 운영 책임자였다. 이후 두 달 뒤인 76년 5월 15일 부산 초량에 위치한 부산공예고등학교 별관에 ‘대한구국선교회 부산 야간무료의원’이 개원했다. 부산 야간무료의원은 1년 정도 열고 영세민과 노인들에게 무료 진료를 해주는 정부의 의료시혜정책 발표로 폐업했다. 그래서 다음달에 주간에 진료하는 경로의원 간판을 걸었다. 박근혜 대통령도 와서 테이프 커팅을 해 주었다.”

요양병원 진료 모습.

-다른 곳은 모두 없어졌는데 부산은 어떻게 계속 남을 수 있었는지.
“경로의원은 무료 진료를 했기 때문에 부산시의 운영비 지원이 절실했다. 처음엔 4000만원 정도 지원이 있었다. 하지만 운영비 감당이 쉽지 않았다. 많게는 하루 1200명까지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시장이 바뀌고 박정희 대통령도 돌아가시니 시 지원도 줄어들었다. 기업체 건강진료 등으로 운영비를 충당했지만 직원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98년에 시 운영비 지원이 끊겼다. 10번이나 이사를 다녔다. 결국 77년 12월 사단법인을 만들었다. 근혜 영애의 지시였다. 전국 16개 시·도에 야간무료의원이 운영됐지만 법인화는 부산이 유일했다.
 서울 쪽도 법인을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최태민이는 병원 법인화보다 혈액원 허가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담당 공무원이 곤혹스러워했다고 들었다. 결국 최태민 뜻대로 되지 못했고 서울 법인 설립은 무산됐다. 이후 전두환 정권 때 대한구국선교회가 해체되면서 부산을 제외한 전국의 야간 무료의원들이 문을 닫았다.”

1976년 6월 23일 박근혜 대통령이 명예총재 시절 부산 야간무료의원을 방문했다. 박 대통령 뒤가 변창남 목사. 그 뒤가 최태민.

-변 목사가 본 최태민은 어떤 사람이었나.
“지금 언론에 나오는 그런 최태민은 상상도 못했다. 최태민이 어느 신학교를 나왔는지, 어느 교단에서 안수 받았는지도 몰랐다. 목사라니 그런 줄만 알았다. 수시로 대한구국선교회 야간 당직으로 서울에 올라와 최태민을 만났지만 그렇게 비리를 많이 저지른 사람인 줄 꿈에도 몰랐다. 목사인데 설교는 안했다. 인사말이나 축사 등은 잘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 목사들은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선교회 일을 했던 것인데…. 목사들은 최태민에게 이용당한 것이다. 교회와 목사들도 그런 측면에서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최태민이 중앙정보부 조사를 받을 때 나도 조사를 받았다. 70억 비리 혐의였다. 나는 평소 ‘권력은 인분’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몸에 인분을 묻히고 다니면 날 파리들이 날아든다. 당시 최태민은 청와대를 들락 달락한 인물이다. 인분이 많이 묻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달라 들었고 이권개입을 하게 된 것이다. 나는 권력에 가까이 가지 않으려 노력했고 지금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라고 생각한다. 최태민에게 돈을 받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부산 연제구 중앙대로 한국경로복지회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변창남 목사.

 -최태민과 함께 일했다고 비난받은 적도 있는지.
“지난 40년간 ‘정부 앞잡이’ ‘어용목사’라는 말을 듣곤 했다. 최순실 게이트 때문에 대한구국선교회가 비난을 받고 한국경로복지회가 욕을 먹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경로복지회는 그동안 영세민 270만여명에게 무료 진료를 하고 약을 제공해 주었다.
노인들을 위한 입법활동도 했고 일부 법안은 통과됐다. 학계에선 나를 ‘노인복지의 선구자’라고 부른다. 공(公)과 과(過)는 구별해 주었으면 한다. 
 거듭 말하지만 초창기 대한구국선교회 활동과 설립 정신은 순수했다고 생각한다. 최태민이란 사람이 사리사욕만 채우지 않았다면 한국교회와 사회에서 좋은 평판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지금 최순실 게이트가 한창 벌어진 상황에서 변명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돌보겠다는 초창기 선교회와 병원의 순수한 마음만은 알아주었으면 한다. 나 개인을 비난하는 것은 감수할 수 있다. 하지만 교회가 오해를 받고 비난 받는 일은 절대 없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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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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