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씨의 #오늘도_출근]회사 '익게'의 배신? 내 얘긴 아닌 줄 알았는데?
“굿모닝? 어제 익게(익명게시판)에 뜬 글 봤어? 와! 나 그 사람 얼굴 보고 싶네”
“누구요?”
“왜~ 그 489번째 글 있잖아. 제목 ‘여러분도 아시나요?’ 이거 말이야”
“아···뭐지?(오옷!! 이번엔 누구지?? 빨리 찾아봐야지!!)”
|
‘익명게시판? 에이··· 초딩 중딩도 아니고 ㅋㅋㅋ 어른이 뒤에서 무슨 말장난이야?’
하지만 나의 이런 생각과는 달리 회사 인트라넷 가입과 동시에 내 눈은 익게를 부리나케 찾기 시작했다.
구성원 보이스, 전사적 경영 공지, 품의서 쓰는 법, 익명 게시판(new)···.
저기 있다!! 익. 명. 게. 시. 판.
글쓴이의 이름이 공개되는 다른 게시판들과는 달리 익게에는 늘 ‘NEW’라는 빨간색 글씨가 반짝였다.
활발한 참여가 이뤄지고 있다는 뜻이다. (+_+좋았어)
|
“오~ 서경씨. 뭘 좀 아는구만? 가입하자마자 익게를 들어가네?”
“아···네 ㅋㅋ 여기 보물창고라고 하던데요??(이 정도면 가십을 어느 정도 즐길 줄 아는 융통성 있는 신입으로 보이겠지?)”
“어제도 한 건 누가 올려서 그거 신변잡기 하느라고 댓글이 막 100개 넘게 달리고~ 그거 읽느라 재밌어서 혼났네”
“아······네·········(오! 누구지?? 궁금궁금~~)”
그렇게 난 익게 게시물을 하나씩 하나씩 검색해 내려갔다.
수많은 회사의 과거 썰(소문)들이 있었다.
공포(와···!! 회사에 이런 사람이 있단 말이야?? 완전 드라마다! 이건!!)’와 ‘기대(나도 앞으로 힘든 일은 여기 털어놓을 수 있겠다 ㅋㅋㅋ)’ 속에서 일주일에 걸친 사내 탐방을 끝냈다.
|
회사의 웬만한 사건(?) 대부분에 능통한(?) 대리가 됐고 “우리 팀 대리님을 고발합니다”라는 제목만 봐도 누가 주인공인지 딱 감이 왔다.(오홋!!! 대단한 경지~~)
대부분 익게에 올라오는 글은 이 전부터 쭉 문제가 있다고 들어오던 게 대부분이다.(그래도 익게가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순기능을 한다는 사실...)
오늘 올라온 글.
“1,329번. <우리팀 대리님을 고발합니다> 게시자: 보고그만좀
아···.정말 짜증 나 죽겠습니다. 우리 회사 직원분들이 이 정도 밖에 못하는 사람들인가요? 정말 이런 사람을 뽑은 회사의 인사 시스템도 의심할 정도입니다.
저는 사업기획을 맡고 있습니다. 저희 팀은 보통 보고서를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내는데 정말 매번 보고할 때마다 미치겠습니다. 원래 과장님이 대면 보고를 하고 제가 그 PPT 작업을 하는데 초반엔 같이 회의하고 의논이라는 걸 하는가 싶더니 지금은 그냥 아무 대책도 생각도 없이 가만히 있어요. 부장한테 가끔 잔소리를 듣는 것 같긴 한데 전혀 바뀌는 게 없습니다ㅠㅠ 몇 번이나 질문하고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도 ‘야 대충 해~ 어차피 회사 생활 열심히 해봐야 알아주는 사람도 없어~’라고만 합니다. 도돌이표 상황에 늘 스트레스를 받는 제가 이상한 건가요?
그냥 일만 답답하게 굴면 몰라요. 가끔 옆에서 보면 모니터에 늘 주식, 게임, 사진보느라 정신이 없어요. 저 사람 때문에 우리 팀 전체 이미지가 별로 안 좋다니까요?? 그래도 이렇게 익명게시판이 있으니까 오늘도 한소리하고 갑니다... 시원하네요. 꾸벅”
뭐 늘 봐왔던 비슷한 글이다.
회사엔 왜 이렇게 이상한 사람이 많냐..
자뻑에 취한 대리가 있는데 남들 다 무시하는 데 본인만 모른다···이 사람을 어찌 해야 하냐··· 대화할 때마다 불쾌하게 말하는데 그 자리 좀 바꿔줄 수 없냐.. 등등 어느 조직에나 있는 아메바에 대한 하소연이다.
|
‘이상하다? 그냥 평범한 글인데?’
뭔가 본능적으로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는 걸 직감한 나는 빠르게 댓글을 읽어 내려갔다.
“저 그 과장님 누군지 알아요. 예전에 같이 일했었는데 저도 정말···..너무 힘들었어요 ㅠㅠ”
“힘내세요! 원래 다 그런 거죠. 그런 사람 겪고 제대로 된 상사 만나면 진짜 감사함을 느낀다니까요?”
“아···그 과장님 근데 집에 잘 안 들어가요. 뭐 다른 팀에 만나는 대리가 있다고 그러던데···?”
“저도 그 얘기 들었음”
“혹시 B팀에 그 여자 대리???”
“그 여자 대리 지금 솔로인데 그 과장이랑 월요일 아침마다 웃으면서 카페 가는 거 몇 번 봤음”
점점 익게는 신변잡기로 넘어갔다.
누군지 모호했던 사람들도 댓글을 읽어 내려갈수록 점차 머릿속에 뚜렷해졌다.
‘헉 예전에 엘리베이터에서 몇 번 인사했던 사람들?? 대박’
댓글들은 마녀사냥으로 번져갔다.
“그 대리 다른 남자랑도 아침마다 카페 가던데??”
“그 여자 대리가 예전에 만났던 남자가~ C팀이래요”
“여자가 주식을 그렇게 좋아하는데 맨날 그 과장한테 메신저로 물어봐서 그 과장이 주식창을 들고 산다던데??”
|
예전 같았으면 ‘아니 저런 사람이 회사를 다녀?? 인사팀은 조사 안 하고 뭐하는 거지??’라며 이를 아득바득 갈았을 터다.
그런데 회사를 3년 넘게 다니다 보니 왠만한 사건들은 ‘그럴 수 있지 뭐···’란 생각이 자주 든다.
그리고 오늘처럼 신변잡기로 번지는 글들을 보면 사실이든 아니든 당사자가 조금 불쌍해지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그런 건 각자 그냥 알아서 풀지···)
익게가 스트레스 풀고 자기 검열을 하는 장점도 있지만 이렇게 신변잡기로 밑도 끝도 없이 퍼지면 ‘읽고 재미있어하는 내가 뭐하는 건가’하는 씁쓸한 기분이 밀려온다.
안 읽자니 찜찜하고···
읽자니 괜히 어줍지 않은 정보만 알아서 일하기 껄끄러운 사람들만 늘어나고···
하지만 매번 고민을 하면서도 또 다시 인트라넷에 들어간다.
오늘은 무슨 또 누가 무슨 글을 올렸을까??
내가 아는 사람인가??
이 놈의 회사는 왜 이렇게 이상한 사람이 많아??
오늘도 출근 후 또 익게를 들어간다.
“경영 환경을 개선을 위한 고민 상담, 솔직한 수다창고. 익명 게시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갑자기 들리는 ‘까톡까톡’!)“야! 서경아! 익게에 너에 대한 글 올라온 것 같은데? 빨랑 들어가서 읽어봐!!!”
웅??? 요건 또 뭐지????
/정수현기자 value@sedaily.com
※‘#오늘도_출근’은 가상인물인 32살 싱글녀 이서경 대리의 관점으로 재구성한 우리 모두의 직장 생활 이야기입니다. 공유하고 싶은 에피소드가 있으시면 언제든 메일로 제보 부탁 드립니다.
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오늘도_출근] 자문자답형 오지라퍼 선배가 내 모습이 될줄이야
- [#오늘도_출근] 상사와 해외출장? 유럽 할애비라도 포기해야 편해요
- [#오늘도_출근] 내 정치성향? 그게 대체 뭣이 중헌디!
- [#오늘도_출근] 비혼이라서, 32살이라서, 그리고 여자라서
- [서경씨의 #그래도_연애] 300km 딱 그만큼 외로웠던 우리의 연애
- [서경씨의 #그래도_연애] 그남자의 속마음이 알고싶다 #소개팅편
- [서경씨의 #그래도_연애] 소개팅은 노동이다, 그것도 중노동!
- [서경씨의 #샤넬보다_재테크] "푼돈 재테크 놓치지 않을거에요!"
- [서경씨의 #샤넬보다_재테크]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연말정산 뽀개기
- [서경씨의 #샤넬보다_재테크] '싱글세' 피하려면..국세청 '호갱님' 탈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