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르포> 개혁안 압도적 퇴짜놓은 伊국민 "포퓰리즘 때문만은 아니에요"

2016. 12. 6. 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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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난·민주주의 역행·이민자·비호감 렌치..국민들 갖가지 이유로 '반대표'
찬성 측 "변화 기회 놓쳐 아쉬워".."부결 후폭풍 별로 걱정 안 해"

(로마=연합뉴스) 현윤경 특파원 = "글쎄요. 포퓰리즘이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건 중요한 변수가 아니에요. 부결된 이유를 대라면 2시간이고, 3시간이고 이야기할 수 있다니까요."

상원을 폐지하다시피 하는 수준으로 축소해 정치 체계를 간소화하고, 중앙 정부에 지방 정부의 일부 권한을 넘겨 불필요한 중복과 관료주의를 해소한다는 명분으로 추진된 이탈리아 헌법 개정 국민투표가 4일 밤(현지시간) 압도적으로 부결됐다.

정치적 생명을 걸고 개헌안을 국민투표에 부친 마테오 렌치 총리는 출구조사 결과로 완패가 예고되자 심야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훔치며 사퇴를 선언했다.

전 세계 언론엔 "헌법 개혁 국민투표를 부결시킨 이탈리아가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결정을 내린 영국, 도널드 트럼프를 대통령에 당선시킨 미국에 이어 포퓰리즘의 3번째 희생양이 됐다"는 기사가 봇물을 이뤘지만, 날이 밝은 5일의 로마 시내는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AP=연합뉴스]

커피를 마시기 위해 들른 단골 바에서는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여 전날 국민투표 결과와 렌치 총리의 사퇴 등을 주제로 잠시 이야기 꽃을 피우다가 이내 화제가 같은 날 치러진 이탈리아 세리에A AS로마와 라치오의 라이벌전으로 옮겨갔다.

30대 후반의 프리랜서 다니엘레는 "이탈리아인들은 당연히 국민투표보다는 축구에 관심이 더 크다"며 "변화와 개혁에는 동의하지만 이런 식은 아니다 싶어 반대표를 던졌다. 의회 시스템을 바꾸는 게 이탈리아의 체질을 개선하는 데 무슨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어 "사실 이탈리아는 입법 체계보다는 지긋지긋한 관료주의가 더 문제"라며 "개혁을 하려면 제대로 된 처방을 내렸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러면서 "언론에서 자꾸 포퓰리즘, 포퓰리즘 하는데 다른 나라는 모르겠지만 이탈리아인들은 포퓰리즘 같은 모호한 개념에 선동돼 투표를 한 게 아니다. 각자 처한 구체적 삶의 상황에 근거해 나름의 판단으로 선택을 한 것이고, 복합적인 이유로 반대가 찬성을 압도한 것일 뿐"이라며 "이번 개헌안이 통과되지 못한 이유를 대라면 몇 시간이고 이야기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바티칸 인근의 신문 판매소에서 일하는 알레산드로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상원을 아예 폐지하려면 하는 거지, 일부는 남겨서 지방 의원이나 시장으로 채우는 것은 정치 시스템을 단순화하는 게 아니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라며 "바꾸려면 다 바꾸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도 안바꾸는 게 낫다는 게 나를 비롯한 일반적인 이탈리아인의 생각"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렌치에 대한 반감으로 반대하지는 않았다"라며 "렌치가 집에 간다고 해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나 마시모 달레마 전 총리와 같은 옛 정치인들이 다시 기회를 잡으면 안된다. 오성운동이 새로운 정당이긴 하지만 말만 앞서는 그들도 신뢰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렌치 총리에 대한 반감은 다른 젊은이들이 국민투표에 대거 반대표를 던지는 데에는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로마 시내 호텔에서 일하는 20대 초반의 청년 도메니코는 "고향이 나폴리인데 내려갈 시간이 없어 투표를 못했다"며 "아마 투표를 했다면 내 또래 대다수의 친구들이 그러하듯 렌치 총리에 대한 비호감 때문에 반대쪽에 표를 줬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탈리아 역사상 최연소 총리고, 기성 정치인과는 달리 트위터 등을 통해 젊은이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것 같아 그를 지지했는데 2년 반이 넘게 아무 것도 보여준 게 없다"며 "명품업체 사장이나 부유한 은행가들과 어울려 다니고, 백악관에 불려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국빈 만찬을 하는 모습에 젊은 사람들은 오히려 박탈감을 느낀다"고 꼬집었다.

청년 실업률이 40%에 달해 1개월에 1천 유로(125만원) 받는 일자리도 구하기 어려운 대다수 젊은이들에게 렌치의 이미지는 이미 '이질감 느껴지는 기득권'으로 고정됐다는 것이다.

헌법 개정안이 민주주의에 역행하기 때문에 지지할 수 없었다는 응답도 의외로 많았다.

바티칸 인근의 바에서 바리스타로 일하고 있는 잔루카는 "이탈리아 헌법은 이런 수준 낮은 정치인들이 고치기엔 너무 훌륭한 법"이라며 "괜히 손을 대 민주주의를 훼손하느니 가만히 두는 게 낫다"고 말했다.

피자를 파는 식당에서 매니저로 일하고 있는 50대 후반 여성 마리아는 "렌치를 지지했으나 난민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걸 보고 실망해 국민투표 반대쪽에 표를 줬다. 브렉시트를 결정한 영국인들이 부럽다"고 말했다.

마리아는 그러면서 "오성운동을 지지해서 반대표를 던진 것은 절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베페 그릴로의 꼭두각시인 로마 시장이 지금 로마를 더 망치고 있는 것을 봐라. 새벽에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아 테르미니 역에서 1시간씩 걸어서 출근할 때마다 화가 치밀어 오른다. 언젠가 비르지니아 라지 로마 시장을 만나면 항의의 표시로 교통카드 1년권을 흔들어보일 것"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로마의 한 식당에서 일하는 50대 남성 로베르토처럼 투표장까지 가놓고 투표를 아예 하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는 "국민투표에서 어느 쪽에 표를 던졌냐고 묻자 "투표장에 가서 투표 용지를 받긴 했지만 결국 찬성과 반대 어느 쪽도 찍지 않았다"고 답했다. 그는 "헌법 개정안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찬성표를 던질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노'쪽에 표를 주면 야당들이 짜놓은 반(反)렌치 투표라는 선동에 동의하는 게 될 것 같아 아예 어느 쪽도 택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번 투표에서 찬성표를 던진 사람은 변화의 기회를 놓쳐 아쉽다는 반응을 보였다.

밀라노에 거주하는 70대 연금생활자 에르마노는 "거만한 렌치를 좋아하지 않지만 이번에는 뭐라도 해보려는 용기를 지지해 찬성표를 던졌다"며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게 낫다. 이탈리아인들이 의지만 있다면 이탈리아는 독일보다 더 부유한 나라가 됐을 것이다. 이번에도 변화의 기회가 그냥 지나가 안타깝다"고 말했다.

개헌 투표 부결로 총리가 사임해 정치적 불확실성이 고조되고, 이는 경제에 큰 충격을 준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지만 이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은 찾기 어려웠다.

신문 판매소의 알레산드로는 "그건 언론이나 시장 분석가들이 떠드는 이야기일 뿐"이라며 "누가 총리를 하든, 어떤 정책을 펼치든 이탈리아는 지난 20년 동안 큰 변화가 없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담담히 말했다.

피자 가게 매니저 마리아는 "총리가 중도 사퇴하고, 정부에 공백이 생기는 건 이탈리아에서는 흔한 일"이라며 "우리는 이미 이런 일에 익숙하다. 경제적으로 큰 혼란이 오더라도, 우리처럼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은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ykhyun14@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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