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끝뉴스] 유체이탈 사과한 SNL '엄앵란 역풍'

양승준 입력 2016. 12. 5. 19:19 수정 2016. 12. 5.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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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인 정이랑이 3일 방송된 tvN 예능프로그램 ‘SNL코리아8’ 에서 유방암 수술을 받은 배우 엄앵란 분장을 한 뒤 “잡을 가슴이 없다”고 개그를 하고 있다. tvN 방송 캡처

사과를 하면 할수록 구설에 오르는 분이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입니다. 세 차례의 대국민 담화를 할 때마다 거리 속 촛불의 수는 늘었습니다. 사과가 역효과를 낸 겁니다. “주변 관리 잘못”한 것 외엔 크게 잘못한 것 없다는 식의 남 탓에 급급한 인상을 줘 불신만 커졌습니다. 사과를 제대로 하지 못해 일을 키운 겁니다.

최근 방송가에도 사과의 기술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게 해주는 일이 있었습니다. ‘엄앵란 패러디 논란’에 대처하는 tvN 예능프로그램 ‘SNL코리아8’(‘SNL’) 제작진의 어설픈 대응을 보고 난 뒤 박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가 떠올랐습니다. tvN 홍보팀을 통해 4일 받은 ‘SNL’ 제작진의 입장은 ‘유체 이탈 사과’의 진수가 따로 없었습니다. 제작진의 실수에 대한 사과는 단 한 줄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다음은 홍보팀을 통해 받은 ‘SNL’ 제작진의 입장 전문입니다.

“정이랑 씨 개그 소재 관련 해명 드린다. 이번 생방송 코너에서 엄앵란씨의 개인사를 모르고 캐릭터와 무관하게 정이랑씨 ‘셀프디스’로 애드리브를 하다가 오해가 생겼다. 재방송 분에서는 해당 장면을 삭제 조치했다.”

‘SNL’ 제작진은 지난 3일 KBS2 음악 예능 프로그램 ‘불후의 명곡-전설을 노래하다’를 패러디한 코너에서 고정 출연자인 방송인 정이랑이 배우 엄앵란 분장을 한 뒤 “가슴 얘기만 나오면 부끄럽다”고 한 개그를 여과 없이 내보내 시청자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었습니다. 엄앵란이 누굽니까. 지난해 유방암 2기 진단을 받고, 한 쪽 가슴 일부를 떼어 내는 수술을 받은 노배우 입니다. MBC ‘휴먼 다큐 사랑’을 통해 투병 생활이 공개되기도 했고, 이후 KBS1 ‘아침마당’에서 그의 사연이 소개되기도 했지요.

이를 고려하지 않고 엄앵란을 가슴 관련 성적 개그에 끌어 들여 논란을 일으킨 데에는 누구보다 제작진의 책임이 큽니다. 방송을 총괄하는 게 제작진입니다. 촬영이 제작진 일의 전부가 아닙니다. 방송 소재가 사회적 약자의 아픔을 건드리거나 보편적인 사회 정서를 거슬러 보는 이로 하여금 불쾌함을 주지 않는지를 방송에 내보내기 전 따져 봐야 하는 게 제작진의 중요한 일입니다. 헌데 입장을 보면, 제작진은 큰 잘못을 하지 않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이랑의 애드리브”라는 남 탓과 “오해”라는 변명 내지는 논란의 꼬리 자르기에만 여념이 없어 보입니다. 정이랑의 애드리브라고 해 끝낼 문제가 아닙니다. 출연자의 애드리브도 제작진이 사전에 챙겼어야 할 소재이자, 방송을 탔다면 책임져야 합니다.

논란이 된 내용이 과연 애드리브였는지도 의심스럽습니다. 정이랑은 가수 백지영의 ‘총 맞은 것 처럼’을 부르며 노래에 ‘가슴’이란 말이 나올 때 마다 성적 농담을 던집니다. “구멍 난 가슴에”에란 노랫말에 “가슴 얘기만 나오면 부끄럽다”고, “잡아보려 해도 가슴을 막아도”란 대목에서는 “잡을 가슴이 없어요”라고 대사를 하죠. 이 구성이 과연 정이랑의 애드리브로만 이뤄진 것일까요? 정이랑은 이미 한 달 여 전부터 ‘SNL’에서 김영란 전 국민권익위원장과 엄앵란을 모티프로 한 ‘김앵란’ 캐릭터로 출연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제작진이 사전에 ‘김앵란’과 가슴 관련 에피소드가 적절한 지 않은 지를 따져 봤어야 했습니다. 출연자의 애드리브 탓으로만 돌리는 건 제작진의 책임 회피일 뿐입니다.

tvN 'SNL코리아8' 시청자 게시판에 올라온 '엄앵란 패러디 논란' 비판 글들.

한 발 양보해, 홍보팀이 기자에 보낸 입장에서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겠다”는 제작진의 유감 표명을 빼 놓고 전달했을 수도 있습니다. 유감 표현이 들어갔다고 해도 ‘SNL’ 제작진의 입장에 ‘면죄부’를 주기 어렵습니다. 어떤 실수가 왜 문제인지를 제대로 반성하고 있지 않는 게 보여서입니다. 당혹스러웠던 대목은 “이번 생방송 코너에서 엄앵란씨의 개인사를 모르고 캐릭터와 무관하게”란 표현이었습니다. 물론, 제작진이 엄앵란의 유방암 수술 전력을 알고도 가슴 관련 성적 개그를 구성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몰라서 한 일이라고 실수가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닙니다. 자신이 모르고 한 일이지만 누군가에 상처가 될 수 있다면 그에 대해 충분히 해명하고 사과해야 합니다. 최근 가요계에서 아이돌그룹 방탄소년단 등이 여성 비하 가사 표현 논란이 일자 유감 표명을 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그런데 ’SNL’ 제작진은 ‘엄앵란 패러디’로 상처 입을 수 있는 이들에 어떤 위로의 말도 전하지 않았습니다. “모르고”와 “무관하게”에 앞서 해야 할 사과를 빼 먹은 겁니다. 잘못을 인정하는 사과의 첫 단계부터 실책을 했습니다. 실수가 얼마나 부끄러운 지와 비판을 수용하는 자세도 볼 수 없었습니다. ‘SNL’ 의 해명이 진정성 없게 들리는 이유입니다. ‘SNL’ 제작진이 해명을 한 뒤에도 프로그램 시청자 게시판에는 자신을 유방암 환자라고 밝히는 이들의 비판 글이 계속 올라오고 있습니다.

‘SNL’ 제작진이 참고했으면 하는 사과문이 있습니다. 논란의 중심에 선 정이랑이 같은 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사과문입니다.

정이랑은 자신의 실수에 대한 구차하게 변명을 늘어놓지 않았습니다. “어제 ‘SNL’을 통해 방송된 엄앵란 선배님의 성대모사에 대해 많은 분들이 불편해하고 계시다는 거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자신을 향한 비판을 먼저 인정한 뒤 “정말 부끄럽지만 제가 잘 알지 못해서 저지른 잘못”이라고 자신을 책망했습니다. “누군가를 표현해낸다는 것은 그만큼의 지식과 정보가 있어야 되는 것인데 제가 그 부분을 간과했다”며 자신의 실수가 왜 잘못된 일인지에 대한 방송인으로서의 책임도 언급합니다. ‘SNL’ 제작진이 놓친 부분입니다. “잘 몰랐다는 걸로 저의 잘못이 면피될 수 없다는 것 알고 있다”는 말도 잊지 않았습니다. 비판을 받아 들이고, 자신을 자책한 뒤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고 “방송에 나오는 사람으로서 앞으로 더욱 조심하고 신중에 신중을 기하도록 하겠다”는 약속으로 사과를 마무리합니다. ‘SNL’ 제작진의 해명과 비교해 마음을 움직이는 사과문임에는 틀림 없어 보입니다. 정이랑은 엄앵란의 지인을 통해 직접 찾아가 사과 드리고 싶다는 송구함의 뜻도 전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는 게 바로 사과입니다. ‘SNL’ 제작진은 ‘엄앵랜 패러디 논란’에 앞서 SNS에 ’그룹 B1A4 섭외 비화’란 제목의 영상을 올려 성희롱 논란에 휩싸여 두 번이나 사과문을 내는 홍역을 치렀습니다. 두 번이나 사과문을 발표 했던 건 사과를 제대로 하지 않아 비판이 사그라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과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건 제작진이 프로그램을 향한 비판을 제대로 귀담아 듣지 않거나,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넘겼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보름 사이 연달아 논란을 낳은 ‘SNL’ 제작진이 가장 먼저 고민해야 할 대목이 아닐까요?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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