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로읽다]쿠바, 야구, 그리고 피델 카스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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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스포츠]
피델카스트로와 파르티잔 동지들이 만든 야구팀 `수염달린 사내들`
"내가 공을 좀 던지냐고요? 내 커브는 아주 위협적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위협을 느낀 타자들은 타석에서 벗어나면서까지 내 공을 피하죠.(웃음)"

피델 카스트로가 1991년 어느 인터뷰에서 한 농담이다. 1959년 쿠바혁명 전에 피델이 메이저리그 워싱턴 세네터스의 트라이아웃에 참여했다는 소문은 그 자신이 밝힌 대로 사실이 아니다.

비록 야구 실력은 프로가 아니었지만 피델의 야구 사랑은 어떤 야구팬보다 뜨거웠다. 피델뿐 아니다. 쿠바 사람들의 야구 사랑은 신앙 수준이다. 시가를 안 피우는 쿠바인은 봤어도 야구를 싫어하는 쿠바인은 보지 못했다. 심지어 아바나 도심 공원에는 야구광들이 매일 나와 열띤 토론을 벌이는 ‘뜨거운 모서리’라는 명소가 따로 있을 정도다.

“댁은 어디서 왔소? 차이나?” 한 노인이 내게 물었다. “한국요.” “북한? 남한?” “남한요.” “그래? 반갑네. 거기도 펠로타(야구) 좀 하지?” “씨. 도스밀우초 베이힝 올림피코!”(네, 2008 베이징올림픽!)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다. 2008년 김경문 감독이 이끈 올림픽 대표팀이 결승전에서 쿠바를 꺾고 금메달을 딴 일을 나만 기억하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19세기 중반 미국에서 들어와 오늘날까지 국민 스포츠로 사랑받는 야구를 쿠바인들은 스페인어로 ‘베이스볼’(Beisbol)이 아닌 ‘펠로타’(Pelota·공)라고 부른다. 마치 미국인들이 야구 경기를 ‘볼 게임’, 그리고 야구장을 ‘볼 파크’라고 부르듯이.

쿠바의 첫 프로팀은 1872년에 창단됐고, 6년 뒤에는 쿠바리그가 탄생했다. 빠르게 성장한 쿠바 야구는 1881년 이미 미국팀과 친선경기를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카리브해의 기후상 가을에 시작해 봄에 끝나는 정규 리그는 현재 18개 구단으로 이뤄져 있다. 수도 아바나에는 두 개 팀이 있다. 혁명 전까지만 해도 ‘겨울리그’에서 몸을 풀기 위해 베이브 루스, 윌리 메이스, 토미 라소다 같은 메이저리그 ‘레전드’들이 쿠바에서 야구를 했다. 20세기 초부터 쿠바 선수들은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 쿠바 출신 스타 역시 한둘이 아니다.

▲사진=1953년 쿠바 야구 대표팀

혁명정부가 들어선 이후 피델과 파르티잔 동지들은 자기들끼리 ‘수염 달린 사내들’이라는 팀을 만들 정도로 야구를 좋아했다. 1957년 바티스타 정권과 무력 투쟁이 막바지로 치달은 가을, 그들은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 마지막 경기 중계를 듣기 위해 공세를 잠시 중단하기도 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따로 있다. 피델은 은퇴 후에도 아디다스 체육복만 입을 정도로 골수 반미주의자였다. 그가 반세기 이상 통치한 공산주의 국가에서 어떻게 야구가 성행할 수 있었을까? 일부 미국 야구사학자들은 '피델이 미국이 만들어 낸 스포츠로 미국을 제압하고 싶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합리적인 이유들이 있다.

첫째, 피델은 스포츠를 훌륭한 선전 도구로 활용했다. 혁명정부는 집권 초기부터 스포츠 정책을 우선순위에 두고, 모든 인민이 스포츠를 부담 없이 즐기고 참여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냈다. 개개인의 재능과 열정만 있다면 쿠바에서는 누구나 세계적인 운동선수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다.

쿠바는 야구 외에도 권투, 배구, 육상 등 분야에서도 세계 정상급 선수들을 배출해 냈다. 역대 팬암게임 메달 수를 집계해 보면 미국 다음이 쿠바다. 캐나다·브라질·아르헨티나·멕시코와 베네수엘라가 그 뒤를 따른다. 쿠바의 인구와 경제력을 고려하면 실로 엄청난 결과다. 역대 하계올림픽 성적 역시 놀랍다. 1992년부터 2000년까지 쿠바는 메달 순위 10위권에 꾸준히 진입했다.

이런 결실은 쿠바의 국위 선양에 크게 기여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국가 이미지를 개선한 것은 물론이고 기량이 뛰어난 운동선수들을 통해 쿠바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국제적으로 알릴 수 있었다. 세계인들은 쿠바의 예술과 더불어 스포츠를 통해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를 매력적인 문화 강국으로 인식하게 됐다.

▲사진=쿠바리그

둘째, 혁명정부가 들어섰을 때 야구는 이미 100년 정도 뿌리내려 쿠바의 전통문화로 자리 잡고 있었다.

1990년대 소련이 붕괴하자 쿠바는 극심한 경제난에 빠졌다. 쿠바의 수출입은 5분의 1로 줄고 GDP는 3분의 2로 줄었다. 그 고난의 시기에도 쿠바인들은 야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전기가 부족해 야간 경기가 사라졌고, 선수들은 글러브를 나눠 써야 했다. 관중은 파울볼은 물론, 홈런볼까지 경기 진행을 위해 다시 구장 안으로 던져 줘야 했다. 2000년 올림픽에서 준우승을 한 쿠바 대표팀 선수들이 그 시절에 성장했다.

셋째, 쿠바인들은 정부와 국가를, 또 국가와 국민을 분리해서 생각할 줄 아는 현명한 사람들이다. 반세기 이상 이어진 미국과 정치적 대립과는 무관하게 미국을 향한 적개심이나 증오심은 크지 않다. 이는 야구를 포함한 문화적 교류가 두 나라 간에 오랫동안 밀접하게 이어져 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비록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야구는 미국인들만의 스포츠가 아니다. 어차피 문화란 흐르고 진화한다. 문화적 교류는 단순한 소통을 넘어 정치적 갈등을 치유하기도 한다. 1999년 피델은 볼티모어 오리올스를 초청해 친선경기를 치렀고, 2002년 지미 카터 전직 미국 대통령이 쿠바를 방문했을 때도 야구가 큰 역할을 했다.

▲사진=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마운드에 올라와 시구하는 카터 대통령

카터는 쿠바인들에게 생중계된 연설에서 미국 정부는 대(對)쿠바 금수 조치를 풀어야 하고, 쿠바 정부는 인민에 언론과 집회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예상치 못한 카터의 발언에 쿠바 정부는 난감해했다. 피델은 이런 돌발 상황을 일체 언급 않고 카터를 야구 경기에 초대했다. 그리고 카터에게 경호원 없이 내야로 들어가 시구를 던져 달라고 부탁했다. 당연히 미국 측은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피델은 카터에게 쿠바 인민을 향한 신뢰를 보여 달라고 다시 청했고, 카터는 이를 받아들였다. 피델과 단둘이 마운드로 걸어 나와 시구를 던졌다. 그러자 쿠바인들은 열렬한 환호로 답했다.

피델은 트레이드마크인 '장시간 연설'처럼 시간의 제약을 전혀 받지 않는 야구를 ‘진짜로’ 좋아했다. 혁명가이자 사상가였던 피델은 방망이를 적에게 휘두르지 않고, 돌이 아닌 공을 던져서 공정한 승부를 겨루는 경기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었다.

11월 25일 피델 카스트로가 향년 9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젊은 시절 내란죄로 법정에 선 그는 "역사가 나를 용서할 것이다!"고 외쳤다. 피델 카스트로의 공과에 대한 평가는 아직 분분하다. 역사적 심판이 내려지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 그러나 적어도 야구를 사랑하는 여러 세계인들은 오래전에 그를 ‘용서’한 것 같다.

정승구

영화감독·작가. 미국 시카고대에서 경제학, 하버드대에서 정책학을 공부했다. <쿠바, 혁명보다 뜨겁고 천국보다 낯선>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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