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저 하늘까지..월악산 하늘재·만수계곡 트레킹

이슬기 기자 / 사진 양계탁 기자 / 장비협조 MSR 입력 2016. 12. 4.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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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계절, 가을의 옷자락 끝에서

천 년 사직의 신라가 저물고,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는 그의 누이 덕주공주와 함께 망국의 한을 품은 채 서라벌을 떠났다. 꿈속에서 관세음보살을 만난 마의태자는 미륵리에 석불입상을 세우고, 월악산 자락에 덕주사를 창건한 덕주공주와 함께 나라를 되찾기를 간절히 염원했다. 그러나 끝내 그들이 바라던 세상은 오지 않았다. 신라의 부흥을 기도하며 하늘재를 넘었던 마의태자는 결국 금강산을 향해 떠났다.

현세와 내세의 갈림길 위로

월악산 하늘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갯길이다. <삼국사기>에는 죽령 옛길보다 2년 앞서 열린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름에 ‘하늘’이 들어가지만, 실제로는 고갯마루의 높이가 해발 525m로 그리 높은 편은 아니다. 오르는 길도 험하지 않다. 다만 약 3.5㎞의 완만한 오솔길을 따라 정상까지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이곳이 왜 하늘재라고 이름 붙었는지 시나브로 느낄 수 있다.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한 하늘이 온몸에 맞닿는 듯한 느낌이다.
하늘재의 명물로 떠오르는 ‘연아 닮은 소나무’. 그 모습이 실제로 김연아 선수의 자태를 똑 빼닮았다.
하늘재로 오르는 길은 고려 초기 석굴사원터인 충주 미륵대원지에서 시작된다. 정상에서 경북 문경 방향으로는 널찍한 아스팔트 도로가 깔렸지만, 옛길의 매력을 맛보려면 미륵리에서 이어지는 등산로를 택하는 것이 좋다. 미륵대원지에는 석불입상, 석탑, 돌거북, 당간지주 등 많은 유물이 고스란히 남아있어 화려했던 절의 모습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마의태자의 미륵입상은 누이가 세운 덕주사 마애불상을 마주 보는 듯 북쪽으로 향해 있다. 지금은 내후년까지 이어지는 보수공사가 한창이라 미륵불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다.

“월악산 맑은 공기 먹고 자란 은행 주워 가세요.” 저만치서 문화 해설사의 목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려보니 관광객들이 하나둘씩 손에 비닐장갑을 끼고 허리를 굽힌다. 냄새는 지독하지만, 지천으로 깔린 노란 은행은 황금 융단을 펼쳐놓은 듯 황홀하다. 미륵대원지를 오른쪽에 끼고 5분 정도 걸으니 하늘재라고 커다랗게 적힌 비석이 산길을 일러준다. 나뭇가지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과 산들거리는 늦가을 바람, 그 아래 켜켜이 쌓인 계절의 흔적을 싸리비 든 승려가 가만히 쓸어내고 있었다.

만수계곡 자연탐방로는 2㎞ 남짓의 짧은 코스로, 쉬엄쉬엄 여유롭게 자연을 만끽하기에 더할 나위 없다.
숲길은 허연 배를 드러낸 굴참나무와 떡갈나무, 층층나무로 무성하다. 오랜 세월 잘 닦인 등산로 옆으로 구름다리를 건너자 호젓한 오솔길이 펼쳐진다. 칠 부 정도 올랐을까. “이것 봐, 연아를 닮은 나무래.” 이번 산행에 함께한 친구 승목이가 나무 하나를 가리킨다. “진짜 닮았어!” 하늘재의 명물로 유명해진 ‘연아를 닮은 나무’는 김연아 선수의 비엘만 스파이널 동작을 똑 닮았다고 이름 붙었다. ‘차마, 지상의 사랑을 떨치지 못하여 / 절정의 동작 그대로 / 한 그루 소나무가 되었구나’ 나무를 보고 읊은 박윤규 시인의 시구도 함께 적혀 있다.
하늘재 정상석과 함께.
충청도와 경상도 사이의 고갯길 중 가장 낮은 덕에 한반도를 남북으로 잇는 중요한 요충지였던 하늘재는 곧 문경새재가 문을 열면서 점점 그 역할이 축소됐다. 두 마을의 경계에 맞닿아 있어 만들어진 흥미로운 이야기도 있다. 하늘재를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는 경북 문경 관음리가, 서쪽으로는 충북 충주 미륵리가 자리한다. 불교에서 관음리가 현재를 사는 관세음보살의 세계라면, 미륵리는 미래의 미륵보살이 있는 내세를 의미한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하늘재를 현세와 내세를 이어주는 갈림길이라고 여겼다. 하늘재를 지나 북쪽 땅으로 간 마의태자는 꿈꾸던 내세를 향해 고개를 넘은 셈이다.

미륵대원지를 나선 지 1시간 반. 충주에서 문경으로 넘어가는 경계다. 정면에는 문경으로 내려가는 아스팔트길이 뻗어있고, 오른쪽으로는 하늘재 기념비까지 이어지는 언덕이 보인다. 나무 계단을 올라 정상에 도착하자 드디어 하늘재의 절경이 모습을 드러낸다. 우뚝 솟은 정상석 아래로 탁 트인 월악산의 풍광, 온몸 위로 쏟아지는 쪽빛의 하늘로 비로소 하늘재에 도달했음을 실감했다. 팔을 뻗으면 활짝 열린 하늘의 끝자락이 손가락에 정말로 닿을 것만 같다.

하늘재로 오르는 길은 충주 미륵대원지에서 시작한다. 이곳에는 보물 제96호 석불입상을 비롯해 5층 석탑, 3층 석탑 등 중요한 문화재들이 남아있다.
편리하고 깨끗한 시설의 닷돈재 야영장. 풀옵션 텐트를 선택할 수 있어 장비가 없어도 가볍게 찾기 좋다.
철을 맞아 흐드러진 만수계곡의 단풍.
자연탐방로의 일부는 무장애길로 조성돼 유모차, 휠체어를 타고도 손쉽게 만수계곡의 풍광을 즐길 수 있다.
떠나는 계절의 옷자락 끝에서

만수계곡은 물 맑기로 유명한 월악산국립공원 송계계곡에서 뻗어 나온 물줄기다. 서로 마주 보고 있는 포암산과 만수봉 사이를 흐르는 계곡으로, 이곳을 찬찬히 걸으며 숲의 기운을 마시면 만수무강한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 만수계곡 자연탐방로는 계곡을 끼고 한 바퀴 돌아 나오는 2㎞ 남짓의 원점회귀 구간이다. 길지 않은 코스라 느릿느릿 여유를 부릴 수 있어서 좋고, 특히 계곡과 어우러지는 단풍 경관이 아름다워 눈이 즐겁다.

쌀쌀한 늦가을 아침에는 뜨뜻하게 끓여낸 스프가 제격이다.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단풍과 초록의 이끼, 투명한 계곡물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만든다.
미륵대원지에서 597번 도로를 타고 만수휴게소에 도달하면 맞은편에 자리한 만수탐방지원센터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만수계곡 자연탐방로 초입에는 야생화 단지가 조성돼 좀개미취, 백리향, 까치수염, 참나리 등 월악산에 서식하는 들꽃 100여 종이 계절에 따라 자태를 뽐낸다. 안쪽에는 어린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잔디밭은 물론, 유모차와 휠체어로도 오갈 수 있게 만들어진 무장애길이 갖춰져 가족 나들이에 안성맞춤이다.

미래세대자연체험장을 지나자 계곡 옆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데크가 이어진다. 녹색으로 이끼 낀 바위들 위로 단풍나무와 당단풍, 생강나무가 화려한 색을 덧입힌다. 국립공원인지라 계곡까지 내려갈 수 없는 것이 아쉽지만, 막바지 단풍이 흐드러진 풍광만으로도 벅차다. 이곳에서 왕복 4시간가량 소요되는 만수봉 구간에 오르고 싶다면 마의태자교를 건너 가파른 등산로를 따라가면 된다.

‘달각달각’ 모가 진 자갈길은 얕은 경사가 있을 뿐이라 역시 다녀오기 수월하다. 만수계곡 자연관찰로에서는 야생화와 나무, 숲을 만끽할 수 있지만 사람이 살았던 흔적과 생채기난 역사까지 엿볼 수 있다. 탐방로 곳곳에 남은 소나무에는 일제강점기 때 강제로 송진을 채취했던 흔적이 고스란하다. 나무 허리에 V자로 깊게 파인 상처는 긴 세월이 지났어도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다. 어쩌면 아직도 온전히 해방되지 못한 우리의 모습을 말없이 보여주는 것 같다.

계곡 가까이 들어갈 수 없는 아쉬움을 계곡물 체험장에서 달래본다.
다가오는 겨울을 준비하기 위해 나무들은 가을 색을 털어내기 분주하다. 코끝으로는 서늘한 공기가, 발끝으로는 수명을 다한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전해진다. 내세를 꿈꾸며 하늘재를 넘었던 마의태자의 염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 겨울이 지나면 봄은 반드시 온다. 봄을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 것, 우리가 할 일은 그것뿐이다.

이슬기 기자 / 사진 양계탁 기자 / 장비협조 MSR / seulki@outdoor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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