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BI 블랙리스트 화가, 정보권력의 천박함을 고발하다

최윤필 입력 2016. 12. 3. 0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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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한 당신] 아놀드 메쉬

미국 화가 아놀드 메쉬에게 그림은 여느 예술가와 달랐다. 그는 말 그대로 먹고 살기 위해 그림을 그렸고, 그림을 그리면서 그림을 배웠다. 그의 그림은 예술 이전에 생업이었고, 세속적 의미에서 가장 삶에 닿아 있는 예술이었다. 그는 그림을 통해 자신이 살았던 시대와 권력의 어둠을 표현했다. 2015년 11월 뉴욕 Life on Mars 갤러리 전시회 때의 그. 유튜브.

미국 연방수사국(FBI)의 전신인 법무부 내 비밀수사과는 인종테러단체 KKK(Ku Klux Klan)를 소탕하기 위해 1871년 만들어졌다. 노예상인과 소유주들의 지원과 든든한 네트워크를 갖춘 KKK 지도부는 주 경계와 국경을 넘나들며 군과 지역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곤 했고, 미 법무부는 신분 위장과 잠입수사 및 이동이 자유로운 연방수사관들이 필요했다.

자금원을 캐는 과정에서 기업ㆍ금융 비리 수사를 해야 했고, 배후를 쫓다 보니 정치인과 관료가 표적이 되기도 했다. 아나키스트들의 테러, 전국 단위 노동운동 등에 대처할 필요도 있었을 것이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정부가 비밀수사과를 독립 수사국(BOI, FBI로 개칭된 건 1935년이다)으로 승격시킨 건 1908년이었다.

영국 에든버러대의 미국사학자 로드리 제프리스 존스는 책 ‘FBI 시크릿’(정연희 옮김, 휴먼앤북스)에서 FBI가 사실상 독립한 1908년을 기점으로 조직의 기원적 성격이 변질되기 시작했다고 평가한다. FBI의 지향이 미국 사회 안전과 민주주의 수호가 아니라 정권의 안정, FBI 정보 권력 자체의 강화로 기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두 차례 세계대전과 50년대의 이른바 적색공포(Red Scare)시대, 60~70년대 인권ㆍ반전운동과 80~90년대 냉전ㆍ소비에트 해체, 9ㆍ11 이후 ‘애국법’의 시대와 오바마 정권의 상대적 견제를 거쳐 차기 권력(트럼프)의 탄생에 ‘기여’하기까지, FBI는 국내ㆍ외 여러 사건과 계기에 따라 정권에 협력하고 배신도 하면서 성장해왔다.

FBI의 역사는 1924~72년의 근 반백 년 동안 조직을 이끈 존 에드거 후버(1895~1972)의 야심과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 그는 정치권력 위에 군림하는 정보권력의 지배자가 되고자 했다. 그 목적을 위해 테러(공포)를 진압하는 한편 테러를 양산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동성애자를 억압하기 위한 ‘라벤더’ 공포, 좌파ㆍ자유주의자를 겨냥한 ‘적색’공포, 시민권 운동을 짓밟기 위한 ‘흑색’ 공포…. 38년 설립된 ‘비미활동위원회(HUAC)’를 비롯, 상원 국내안보소위, 정부활동위원회조사상설소위 등 다양한 의회와 정부 위원회의 배후, 다시 말해 그 공포 시스템의 중추는 대개 FBI였다. 후버는 직속 상관이던 법무부장관과 대통령 영부인(엘리노어 루스벨트)의 숙소까지 도청해 캐낸 정보들을 선별적으로 누설하면서 반(反)FBI 정치인ㆍ인권운동가들을 견제했고, 33만여 쪽에 달했다는 유력 정치인들의 성(性) 사생활 정보를 야비하게 활용했다. 전쟁을 준비하던 37년, 라인하르트 하인리히 체제의 나치 친위대 보안방첩대가 덜 협조적인 군부 권력자들을 숙청하기 위해 성추문을 퍼뜨리고 동성애자라는 거짓 정보를 유포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FBI는 52년 대선 민주당 후보 아들레이 스티븐슨의 동성애 소문을 퍼뜨렸다. 마틴 루터 킹의 성 사생활을 폭로한 것도 그들이었다.

FBI가 거물 관료ㆍ정치인만 사찰한 건 아니었다. “1953년 1월 FBI는 유급 정보원 5,000명으로 시민 600만 명을 조사했다. 비상시 구금시킬 강경파 2만6,000명의 명단을 작성했고, 그들의 고용주들에게 은밀히 그 사실을 귀띔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테러가 미국 전역에 퍼져 나갔다. 수백만 명의 시민들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이웃이나 동료들을 밀고했으며 적어도 겉으로는 자유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불관용의 원칙에 동조했다.(…) 1946~52년 사이 FBI 요원 수는 3,754명에서 6,451명으로, 예산도 3,710만 달러에서 9,070만 달러로 각각 증가했다.”(책 225쪽, 일부 수정) FBI의 현재 요원은 약 3만 명이다.

화가 아놀드 메쉬(Arnold Mesches)는 그 시절 FBI가 사찰한 민간인 600만 명 중 한 명이었다. 밥을 벌기 위해 할리우드 영화사에 취직해 스크립트 장면 삽화를 그리던 20대 무명의 그는 1946~47년 할리우드 파업이 터지자 피켓 시위에 가담했다. 동료들과 함께 무더기로 연행돼 3일 구류를 살고 25달러 벌금을 낸 게 그의 유일한 전과였다. 당시 할리우드 영화판은 좌파 아성이었고, 메쉬가 만난 영화인들 대다수가 좌파였다. 그림 솜씨가 좋았던 그는 피켓을 만드는 일에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NYT, 2016.11.9(http://www.nytimes.com/2016/11/10/arts/design/arnold-mesches-artist-who-was-recorded-by-the-fbi-dies-at-93.html?_r=0))

메쉬가 정보공개위원회를 통해 자신에 대한 FBI 사찰 파일을 입수한 건 1999년이었다. ‘피라미 급’이었을 그의 파일 분량이 무려 780쪽에 달했다. 아이가 언제 몇 파운드로 태어났고, 대학 강의 주제가 뭐였고, 강의에 어떤 영상을 부교재로 썼고, 어느 날 옷차림은 어땠고…. 밀고자 중에는 그의 친구와 제자, 이웃, 심지어 연인도 있었다. 그런 ‘잡스러운 정보’에 FBI가 지급한 돈이 보고서 장당 75달러였다고, 그게 다 시민들이 낸 세금이었다고 그는 말했다.(brooklynrail.org, 2010.3(http://brooklynrail.org/2010/03/art/in-conversation-arnold-mesches-and-jill-ciment-with-robert-storr-and-phong-bui))

메시는 이듬해부터 그 ‘잡스러운’ 사찰 보고서의 일부와 당시의 잡지 기사, 사진 등을 직접 그린 그림과 콜라주해 ‘FBI Files’라는 제목을 단 50여 점의 연작 작품을 제작, 2003년 뉴욕현대미술관 계열 ‘PS1’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2001년 9ㆍ11테러와 조지 W. 부시의 이라크전 개전 직후였다. 그는 새로 도래한‘애국법’의 시대와 자신이 겪은 50,60년대 메카시즘의 시대를 그렇게 대비(對比)했다. 60여 년을 화가로 살면서 “시대의 궤적을 예술로 대변하고자(https://jillthayer.wordpress.com/2013/05/09/the-cultural-contexts-of-arnold-mesches/)” 했던 아놀드 메쉬가 11월 5일 별세했다. 향년 93세.

메쉬는 1923년 8월 11일 미국 뉴욕 브롱크스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유대인 박해를 피해 리투아니아에서 이민 온, 끝까지 이디시어만 고집하던 유대 원리주의자였다. 그런 가풍과 1차대전의 그늘 속 가난한 이민자의 외아들로 그는 성장했다. 유년시절 그의 가족은 뒹커르트(Dunkirt)에서 의류 할인매장과 수선업을 하던 고모 집에 얹혀 그럭저럭 살았지만, 29년 대공황으로 고모 가게가 망하면서 버팔로 시로 이사했다. 당시 부모는 일당 9달러짜리 일을 그나마 주 사흘 정도밖에 못 구했고, 메쉬는 7살 무렵부터 많은 걸 혼자 해내야 했다고 한다. 학교 현장 수업 중 버팔로미술관에서 렘브란트의 그림(‘손톱 깎는 노파(http://www.metmuseum.org/art/collection/search/437412)’) 속 사실주의적 어둠과 가난을 본 뒤부터 화가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고 그는 말했다.

10대 땐 좌파 시오니즘 운동 진영을 기웃거리기도 했지만, 그는 종교가 적성에 맞지 않더라고 했다. 2013년 인터뷰에서(http://www.huffingtonpost.com/mary-crescenzo/arnold-mesches_b_3733028.html) 그는 “나로선 종교가 허튼소리 같았다. 예컨대 바 미츠바(Bar Mitzvahㆍ유대 성인식)도 우습고 어처구니 없었다(nonsense). 내게 성인이 된다는 건 손목시계를 갖는 거였다”고 말했다. 그는 여호와보다 유머를 더 섬겼고, 권위와 억압을 못 견뎌 했다. 대신 운동을 좋아했고, 그림 그리기만큼 싸움도 곧잘 했다고 한다. 그 무렵 별명이 ‘더티 진 Dirty Jeans’이었는데, 괴롭히는 아이들과 싸움질을 하도 해대서 얻은 거였다.

그가 기술학교(Buffalo Technical High School)로 진학한 것은, 돈벌이가 급해서였다. 41년 졸업 후 군수업체에 취직, 전시채권 홍보 포스터를 그렸고, 미국의 참전 결정 직후 통신대 훈련소에 자원 입대했지만 편두통 판정을 받아 퇴소했다. 그는 43년 뉴욕을 떠나 LA ‘Art Center School’ 광고 디자인 과정에 등록했다. 커리큘럼에 스케치 등 순수미술 과목도 있었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고 한다. 45년 학교를 중퇴하고 캘리포니아 컬버(Culver)의 RKO 영화사에 스토리보드 일러스트레이터로 취직한 건 돈을 벌면서 그림에 한 발 더 다가서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그는 그림을 독학했다. 훗날 그는 다른 작가들의 수채화 작업을 어깨 너머로 보면서 붓질 요령을 익혔다고 말했다. 첫 결혼을 한 것도 그 해였다.(72년 이혼)

메쉬의 2000~2003년 연작 'FBI파일'의 하나. 그는 자신에 대한 FBI 사찰보고서를 작품에 콜라주해, 매카시즘의 시대와 부시의 애국법 시대를 대비했다.

FBI 블랙리스트에 오른 게 그 무렵이었다. 그는 2014년 매거진 ‘white hot’인터뷰에서(http://whitehotmagazine.com/articles/mesches-at-life-on-mars/3056) “나의 정치의식은 할리우드 파업 경험에서 비롯됐다”고 말했다. “피켓 시위는 약 1년간 이어졌고, 그 사이 감독 프로듀서 배우 등 많은 이들을 알게 됐다. 그 과정이 내겐 교육이었다.” 그는 연행된 800여 명의 파업 참가자 중 한 명이었다.

메쉬는 48년 가을 유타주 솔트레이크시 한 기관의 그림 강사직을 어렵사리 구했지만 ‘정치활동’ 전력 때문에 20개월 만에 쫓겨났다. 아내가 첫 아이(Paul Robeson)를 임신해 있던 때였다. 캘리포니아로 돌아온 그는 그림 강사 일 외에도 온갖 일을 다 하며, 자투리 시간에 그림을 그렸다. 2010년 ‘Brooklyn Rail’인터뷰에서 그는 새벽 4시에 일어나 푸드트럭을 몰고 나가 샌드위치와 커피를 팔고, 오후 2시쯤 돌아와서는 잠깐 눈을 부친 뒤 그날 본 노동자들의 모습을 그리다 9시쯤 잠들던, 그 무렵의 일상을 행복하게 회고했다. “썩 나쁘지 않았어요. 당시 주된 관심사는 노동자들을 그리는 거였어요. 내가 만든 거친 음식을 먹고 끔찍한 커피를 마시며 점심시간을 보내던 그들의 모습을 100여 점 가량 스케치했죠. 그 작품들로 1953년 패서디나(Pasadena) 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어요.” 노동자들이 주사위 도박을 하는 장면을 그렸다고 캘리포니아의 좌파 ‘동지’들로부터 “노동계급을 폄하하지 말라”고 비판 받은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피켓과 플래카드 작업을 돕고, 친구였던 포크 가수 피트 시거(Pete Seeger)의 앨범 디자인을 거들기도 했다고 한다. 그 해 그는 둘째(Susan)를 얻었다.

53년 소련 스파이 혐의로 체포돼 처형당한 로젠버그 부부(Julius and Ethel Rosenberg)를 소재로 한 ‘패밀리 백그라운드’ 연작은 자신처럼 유대인 이민자 가정 출신인 그들 부부와 자신의 가계를 관통하는 불의의 흔적을 드러낸 작품들이었다. 56년의 홀로코스트 연작, 60년대 베트남 반전운동 연작과 다국적 작가들이 함께 제작한 LA평화탑(Peace Tower, 1966) 디자인, 도시의 비인간화 등 제도ㆍ문명의 비참과 우울을 광대 웨이터 버스검표원 순교자 동물 등을 등장시켜 침울하게, 또 자주 풍자적으로 담곤 하던 80년대 이후 말년까지의 작업 중에는 유년에 본 렘브란트의 초상화를 연상케 하는 작품들이 많았다. 그는 13개 연작 등 여러 작품을 남겼고, 130여 회 개인전을 가졌다. 1990년대의 그는 리얼리즘 계열의 화가로 꽤 알려진 작가였다.

2000~2003년의 ‘FBI Files’연작은 그의 목소리가 가장 직설적으로 담긴 작품이었다. 사찰 보고서는 1945년부터 72년까지 27년 동안 작성됐는데, 거기에는 “물감으로 얼룩진 티셔츠에 바지를 걷어 입고 낡은 진 재킷을 즐겨 입는 걸 보면 공산주의자가 틀림없다”는 내용도 있었다고 한다.(artcentral.com, 2004(http://artscenecal.com/ArticlesFile/Archive/Articles2004/Articles0204/AMeschesA.html)) 메쉬에겐 유대원리주의나 시오니즘 못지않게 FBI의 그 행태가 어처구니 없었을(nonsensical)것이다. 그는 “굵은 펜으로 군데군데 문장을 지운 FBI 보고서에서 프란츠 클라인의 작품 같은 미학적 아름다움을 느꼈다”(NYT,2002.10.18(http://www.nytimes.com/2002/10/18/nyregion/public-lives-uncovering-art-in-the-ache-of-being-spied-upon.html))고 말했는데, 그게 진지하게 한 말인지 풍자였는지 알 길은 없다.

하지만 그의 작업은(http://culturalpolitics.dukejournals.org/content/11/1/36.full) 진지한 풍자였다. 그는 버스에 앉은 로자 파크스의 사진과 자신을 공산당원으로 추정한 FBI 보고서를 나란히 콜라주하고, 마릴린 먼로의 유명한 지하철 환풍구 사진(영화 ‘뜨거운 것이 좋아’의 스틸컷)과 인도차이나 정글의 미군 사진을 병렬 배치하기도 하고, 집회 현장의 붉고 희고 푸른 깃발들과 흰 두건을 쓴 KKK단의 사진을 대비시키기도 했다. 그렇게 그는 보고서와 잡지, 저명 정치인과 인권운동가의 사진 등을 다채롭게 콜라주해 시대와 권력의 야비를 고발했다. 그는 9.11 이후 내ㆍ외국인에 대한 정보당국의 광범위한 감시 사찰 권한을 허용한 ‘애국법(PATRIOT ACT)’의 시대에서 “50년대 이후 베트남전쟁 시기를 관통하며 내가 겪은 통제ㆍ감시 사회의 데자뷔를 경험하고 있다”고 말했다.( jillthayer.wordpress.com, 2013.5(https://jillthayer.wordpress.com/2013/05/09/the-cultural-contexts-of-arnold-mesches/))

그는 60세이던 83년, 32년 연하의 소설가 질 시먼트(Jill Ciment, 1955~, 플로리다대 영문학 교수)와 재혼했다. 남편의 ‘FBI Files’와 그 시대 인물들을 소재로 쓴 시먼트의 2009년 소설‘Heroic Measure’는 그 해 오프라 윈프리 북클럽 도서로 선정됐고, 2015년 모건 프리먼과 다이앤 키튼 주연의 영화 ‘5 Flights Up’으로 만들어졌다. 2010년 인터뷰에서 시먼트는 “우리의 삶은 서로 너무 밀착돼 있어서 어떨 땐 그의 작업과 내 작업을 구분하기 힘들 때도 있다”고 말했다.

2003년 메쉬 부부는 이라크전 반전 집회가 열린 뉴욕 센트럴파크에 물감과 화구 등을 챙겨 나가 즉석에서 시민들이 원하는 문구를 넣은 피켓을 개당 5달러에 제작ㆍ판매해 225달러를 번 적이 있다고 자랑스러워했다. 그 작업은 화가 메쉬의 삶의 은유이기도 했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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