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360°]마지막 혁명가 카스트로

강희경 2016. 12. 3. 0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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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마지막 혁명가인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가 세상을 떠났다.

지난달 25일 자정(현지시간)을 조금 넘긴 시각 쿠바 국영TV에서 갑자기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 평의회 의장이 등장했다. 그는 침통한 표정으로 “쿠바 혁명의 최고 사령관이 25일 밤 10시29분에 세상을 떠났다”며 친형이자 ‘혁명 동지’인 피델 카스트로의 부음을 전했다. 향년 90세.

사인은 쿠바 정부에서 발표하지 않아 알 수 없다. 유골은 망자의 유언에 따라 화장됐고 9일간 애도 기간을 거쳐 4일 장례를 치른다. 쿠바는 이 기간 음악 틀기, 술집 영업, 야구 관람 등을 금지한 채 온 나라가 그를 추모한다.

피델 카스트로는 1926년 8월 13일 쿠바 동부 바란의 스페인 출신 이주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19세때인 1945년 아바나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등 외신에 따르면 “피델은 191㎝의 큰 키만큼이나 무모하리만치 용맹했고 대담했으며 타협을 모르는 고집쟁이”라고 평가했다. 어릴 때 패기를 보여주려고 오토바이를 탄 채 벽에 돌진했고, 대학 시절 미국 프로야구인 메이저리그 진출을 고려할 만큼 운동 신경이 좋았다.

카스트로는 대학 입학 후 학생 운동에 뛰어들어 남미를 휩쓸던 사회주의 혁명운동(MSR, Movimiento Socialista Revolucionaria)에 적극 참여했다. 1947년 독재 정권 아래 고통받던 이웃 도미니카공화국 국민들을 위해 해방혁명군에 참여했고, 1948년 여행을 간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좌익 지도자 암살에 항의하는 폭동이 일어나자 망설이지 않고 가담했다.

카스트로는 1953년 7월 쿠바의 친미파 독재자였던 풀헨시오 바티스타를 쓰러트리기 위해 MSR 대원 140명과 함께 몬카다 병영을 습격했다. 그러나 무장투쟁이 실패하며 카스트로는 15년형을 선고 받았다.

당시 쿠바의 대통령이었던 바티스타는 1952년 3월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쿠바의 제 11대 대통령 카를로스 프리오 소카라스를 죽이고 정권을 장악했다. 친미.반공주의자였던 바티스타는 반미.좌파민족주자의였던 카스트로와 대립했다.

변호사 출신인 카스트로는 몬카다 병영 습격 사건에 대한 재판 당시 직접 변호했다. 그가 재판정에서 외친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는 말은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언이 됐다. 이 사건 이후 카스트로는 쿠바 민족주의자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게 됐다.

카스트로는 1954년 특별사면을 받아 출소 후에도 계속 게릴라전을 펼치며 민중의 지지를 쌓아 갔고 1959년 혁명에 성공했다. 이후 그는 반세기 가까이 총리, 공산당 제1서기, 국가평의회 의장을 연이어 맡으며 2008년 공식 직위에서 완전히 물러나기까지 49년간 쿠바의 최고 지도자로 군림했다.

카스트로는 평생 철저한 사회주의자였다. 그는 쿠바의 국부로 존경받는 19세기 독립 혁명가 호세 마르티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마르티는 스페인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독립 투쟁을 벌이며 “단 한 사람이라도 불행한 국민이 있다면 그 누구도 편안하게 잘 수 있는 권리가 없다”며 약자를 챙겼다.

카스트로는 마르티의 철학을 무상 교육과 무상 의료 등 각종 정책을 통해 실현했다. 또 전면적인 농지개혁과 기간 산업의 국유화를 통해 부의 평등한 분배를 위해 노력했다.

반면 미국에 대해서는 적대적이었다. 미국의 독점 산업 자본들이 쿠바 국민들의 고혈을 착취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인 소유 기업과 은행을 몰수했다.

이에 맞서 미국은 국교를 단절하고 경제 제재를 가했다. 1961년 케네디 대통령 시절에 미 중앙정보부(CIA)는 용병 연합군을 피그만에 침투시켜 카스트로 정권을 뒤집으려다가 실패했다. 카스트로는 사로잡힌 용병들의 목에 팻말을 달아 아바나 시내를 행진시키는 수모를 줬다. 이후 미국은 카스트로의 시가에 독을 바르는 방법 등 모두 638차례나 암살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미국과 쿠바의 관계는 악화 일로를 걸었다. 카스트로는 미국의 경제 제재에 맞서 구 소련의 핵 미사일을 배치하려 했으나 이를 알게 된 미국이 쿠바를 봉쇄하면서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가는 위기를 겪기도 했다. 결국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흐루시초프가 핵 미사일의 쿠바 배치를 철회하면서 위기를 모면했다.

카스트로는 2008년 권력을 동생 라울 카스트로에게 넘긴 뒤에도 ‘헤페 막시모(jefe maximo.최고지도자)’로 남아 있었다. 그만큼 그는 강력한 리더십으로 쿠바의 독자 노선을 견지했다.

하지만 쿠바 내에서 무상 교육, 무상 의료 등 카스트로의 일부 정책은 높은 평가를 받지만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가장 큰 비판은 경제 성장을 이루지 못하면서 전체적으로 쿠바 경제를 하향 평준화 시켰다는 지적이다. 물론 미국의 경제 제재 등이 가장 큰 원인이지만 부의 고른 분배가 경제적 성장으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한계를 안고 있다.

카스트로의 타게는 미국과 쿠바 관계에 새로운 전환점이 될 전망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과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이 쿠바에 대해 강경노선을 펼 것이라는 우려도 있지만 냉전의 상징인 카스트로의 사망으로 적대관계가 청산될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

이미 양국은 조금씩 관계 정상화를 모색해 왔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지난 2014년 12월 쿠바와 국교를 정상화했다. 1961년 미사일 위기로 국교가 단절 된 지 53년 만이다.

이후 미국은 지난해 아바나에 대사관을 개설했고 상업교류 활성화와 여행제한 해제, 환전절차 간소화 등을 추진했다. 특히 지난 3월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으로는 88년 만에 쿠바를 방문해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과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 간 정기 항공 운항이라는 상징적 합의까지 이끌어냈다.

반면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은 대선 후보 시절 “오바마 대통령이 아무 대가 없이 쿠바를 경제.정치적으로 지원했다”고 비난하며 당선 이후 쿠바 민중과 미국을 위해 더 나은 협상에 나서겠다고 공언했다. 공화당 역시 국교 정상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 쿠바 금수조치 해제를 반대하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트럼프도 오바마 정부보다 노선이 다소 강경 기류로 바뀔 수 있지만 양국간 국교 정상화의 흐름을 완전히 뒤집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카스트로보다 동생인 라울 의장이 국정을 더 편안하게 운영할 것”으로 기대했다. 텍사스대의 쿠바 전문가인 아르투로 로페스 레비 교수도 AFP통신과 인터뷰에서 “피델이 없어져 라울이 시장 중심 개혁에서 힘을 얻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강희경 기자 ksta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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