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최남선·홍명희.. 동경삼재의 다른 삶

강구열 입력 2016. 12. 3.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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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런던' 도쿄 유학 신지식인 3인 / 식민지 조국 문명화 위한 삶과 선택 조명 / 일제 정책 변화와 해방·분단의 시대 상황 / 친일의 길로.. 사회주의자로.. '다른 궤적'
류시현 지음/산처럼/1만6000원
동경삼재/류시현 지음/산처럼/1만6000원

20세기 초 일본 도쿄는 ‘아시아의 런던’이었다. 근대를 체험하고, 문명화를 이룰 수 있는 지식을 제공하는 곳이었다. 이즈음 근대 국민국가 수립을 염원하던 조선인들이 일본 유학생에게 주목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언론에서 유학생들의 활동을 지속적으로 보도할 정도였다.

일본 유학생 중에서도 가장 주목을 받는 세 명을 꼽으라면 단연 이광수, 최남선, 홍명희였다. 이들 세 명을 일러 ‘동경삼재’(東京三才)라고 했다. 전근대적인 기준의 신분은 달랐으나 근대, 교육, 서울, 동경이라는 공통분모 속에 세 사람은 개인적인 친분이 깊었고, 민족을 대표하는 신지식인으로 성장했다. 책은 이광수, 최남선, 홍명희의 삶을 정리한다. 동시에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이 끼친 영향을 분석한다. 이는 “당대 민족운동에 참여했던 지식인 내부의 균열과 분화 과정을 검토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일본유학생은 시대를 이끌 지식인으로 주목을 받았다. ‘동방삼재’로 불린 이광수, 최남선, 홍명희(왼쪽부터)는 그중에서도 가장 큰 기대를 받은 인물이었다.
산처럼 제공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들은 처참한 식민지 조선의 현실 앞에서 동포를 계몽할 계획을 세운다. 이광수는 오산학교의 교사가 되었고, 최남선은 잡지 ‘소년’을 발간하는 등 출판과 인쇄문화에 힘썼다. 홍명희의 선택은 중국 지역의 민족운동가와의 교류.

3·1운동에서는 주도적인 역할을 맡기도 했다. 이광수는 조선 지식인 청년의 대표로서 ‘조선청년독립단선언서’를 썼고, 최남선은 민족의 대표로 ‘기미독립선언서’를 작성했다. 고향인 충북 괴산에 있던 홍명희는 충북 지역에서 최초의 만세 운동을 주도했다.

비슷한 궤적의 길을 걷던 동경삼재는 1920년대 서서히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19년 3월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 최남선에게 투옥의 시간은 “자신의 의지와 사고를 단련하는 기간”이었다. 1910년대 서구 근대 문명을 소개하는 데 주력했던 그는 감옥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역사학자, 민속학자로 변모했다. 1922년 발간한 ‘동명’은 3·1운동을 통해 역량이 확인된 식민지 조선인을 겨냥한 잡지였다. 그는 이를 통해 근대적 지식과 나아가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했고, 독자들을 민족 구성원으로 계몽시키고자 했다. 역시 수감 생활을 거쳤던 홍명희는 언론 활동과 함께 민족운동의 가장 선진적인 사상 단체에 적극 참여하여 신사상을 학습했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 귀국을 한 이광수는 “일제가 귀국을 종용했다는 등 여러 풍문에 휩쓸리며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즈음 그는 민족의 발전 가능성에 대한 비관적인 평가를 내렸다. 조선의 지식인 가운데 가장 앞서 이런 태도를 취했다. 민족운동의 토대인 민중에 대한 기대감, 조선 독립의 가능성을 부인했던 것이다. 책은 “이광수는 3·1운동에서 확인된 민족적 단결력을 우연한 변화로 보았다. 그리고 이를 ‘무지몽매한 야만 인종’의 행동과 동일시했다”며 “한말 지식인이 보였던 민중에 관한 불신을 기반으로 한 전형적인 우민관의 논리였다”고 분석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홍명희는 사회주의를 수용해 해방 후 월북까지 하게 되고, 이광수와 최남선은 일제와 타협하며 친일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1930년대 중반에 홍명희는 ‘임꺽정전’ 집필에 몰두하고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글을 쓰면서도 암중모색했다. 반면 최남선과 이광수는 민족 독립의 전망이 사라지자 당대 현실을 외면하고 일제와 타협하는 정치적 입장을 보였다. 이광수는 ‘동우회 사건’으로 친일로 돌아섰다. 동우회는 안창호가 만든 흥사단의 국내 지부. 독립 정신을 고취하고 민족운동을 전개했는데 1937년 이광수를 포함한 41명이 재판에 회부되고 일본 경찰에 검거됐다가 풀려났다. 이광수의 전향은 이때였다. 최남선은 1930년대 중후반부터 만주와 관련을 맺고 ‘만선일보’ 고문과 만주 건국대학의 교수가 됐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후에는 최남선과 이광수는 창씨개명, 학도병 동원 등 일제의 ‘내선일체’ 정책을 적극 지지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1945년 해방이 되어 홍명희는 좌우의 분열을 막아 하나가 된 민족국가를 수립하고자 했으나 이광수와 최남선은 일제 말 친일 행위로 실추된 문화적 권위를 해방 공간 안에서 복원하려고 했다. 1948년 반민특위가 조직되면서 두 사람은 체포됐다가 반민특위 활동이 주춤한 사이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홍명희는 1948년 북으로 갔다. 1948년 북한의 부수상에 올랐고 과학원 원장을 지내고 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임됐다.

저자는 “동경에서 이들은 학교 및 서점, 도서관 등에서 근대 학문의 세례를 받은 뒤 귀국하며 다양한 분야에서 조선의 문명화를 위해 활동했다”며 “식민지의 지배 정책 변화와 해방, 분단의 시대 상황에서 판이하게 다른 삶을 살았다”고 머리말에 적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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