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1할짜리 타자 출신 6할짜리 팀 만들고..왜 사표 던졌나

전현석 기자 2016. 12. 3.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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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현석 기자의 觸 <촉> ] 만년 하위 넥센 상위로 이끈 염경엽 前 감독

염경엽(48)이 2012년 겨울 넥센 히어로즈 감독에 선임됐을 때 프로야구계는 그를 '1할9푼5리짜리 감독'이라고 했다. 염경엽의 선수 시절 통산 타율이었다. 스타 선수 출신이 감독이 되는 경우가 많은 한국 프로야구계에서 그는 감독으로 성공하기 힘들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그때까지 넥센은 2008년 창단 이후 하위권만 전전하던 팀이었다.

염 감독은 부임 첫해 넥센을 4위로 끌어올렸다. 이듬해인 2014년엔 2위, 2015년 4위를 기록했다. 올 시즌을 앞두고는 넥센이 꼴찌를 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작년 강정호에 이어 4번 타자 박병호와 에이스 투수 밴 헤켄이 각각 미국과 일본에 진출하고, 마무리 투수 손승락은 롯데로 이적했다. 핵심 투수 한현희·조상우도 부상으로 빠졌다. 올 시즌 팀 전체 연봉은 40억5800만원으로 10개 프로야구팀 중 가장 적었다. 연봉 1위팀 한화(102억1000만원)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넥센은 이런 상황에서도 3위를 기록했다. 신인급 선수들이 급성장했기 때문이다. 4년 간 승률은 0.567로 삼성(0.569)에 이어 2위다. 2014년 승률은 0.619까지 치솟았다. 염 감독에겐 '염갈량'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하지만 염 감독은 올해 준플레이오프에서 넥센이 LG에 패하자 곧바로 감독직을 사퇴했다. 계약 기간이 1년 남은 상태였다. 그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 "팀을 맡은 4년 동안 한국시리즈 우승을 하지 못해 죄송하다. 실패의 책임은 나에게 있다"고 했다.

1할9푼 타자에서 '염갈량'으로

―4년간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는데 실패한 겁니까.

"한국시리즈 우승을 못 했으니 실패입니다."

―약팀으로 평가받는 팀을 이끌고 이 정도면 잘한 것 아닌가요.

"제가 제일 듣기 싫은 말 중 하나가 '이 정도면 잘했다'입니다. 언론과 팬은 넥센을 두고 항상 그 정도면 잘했다고 칭찬합니다. 이게 선수들한테 독이 됩니다. 그 정도에 만족해 버리면 1등을 못 합니다. 더 할 수 있는데 칭찬을 하면 거기 안주해 버립니다."

올 시즌 막판 넥센의 이장석 구단주와 염 감독의 불화설이 끊이지 않았다. 이 구단주가 경기 운영에 적극 개입했고, 염 감독이 계속 반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염 감독은 사퇴 당시 "구단이 추구하는 이상과 내가 하고 싶은 야구 사이의 차이를 느꼈다. 그렇다면 감독이 물러나야 한다"고 말했다.

―구단주와 사이가 안 좋아져서 물러났다던데요.

"그 부분에 대해선 더 얘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퇴(10월 17일)하고 한 달 보름 정도 지났는데, 돌이켜보면 서로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상대 입장을 헤아리지 못한 부분이 있죠. 누가 잘했다 누가 못했다, 이런 건 이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저는 정말 좋은 이별을 하고 싶습니다. 어쨌든 이 구단주가 저에게 감독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줬으니까요. 4년 동안 함께 성장해 온 게 분명한 사실입니다. 리더가 조직의 사람들을 100% 수용할 순 없어요. 70%만 따르게 해도 성공이고, 나머지 30%는 리더를 나쁘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70%의 지지가 있으니까 30%를 접고 갈 수 있는 거지요. 그 비율이 이번에 70% 밑으로 내려갔기 때문에 헤어져야 할 때라고 판단했습니다."

지난 29일 서울의 한 식당에서 염 감독을 만났다. 유니폼이 아닌 옷차림의 염 감독은 뭔가 어색해 보였다. 그는 "1991년 프로야구 선수로 데뷔한 후 처음 맞는 긴 휴가"라고 했다.

―살이 좀 빠졌습니까.

"아니요. 시즌 때보다는 쪘습니다. 겨울에 65㎏까지 나가다 시즌이 시작되면 57㎏까지 빠지지요. 그해 야구가 끝나면 다시 찌고요. 지금은 62㎏입니다."

―쉬는 동안 뭘 했나요.

"사람들 만나고, 가족들하고 시간 보내고. 그런데 여유가 있어도 마음이 편하지 않네요. 앞으로 최소한 1년 쉴 텐데. 우선 4년 동안 제가 수첩과 컴퓨터, 휴대전화에 기록해 놓은 내용을 한데 모아서 정리하려고 합니다. 보름씩 두 차례에 걸쳐 정리하려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메모광으로 알려져 있죠.

"19년 동안 매일 정리한 전술 노트가 6권 있죠. 머리로는 다 기억할 수 없으니까, 야구 이닝이 끝날 때마다 떠오르는 작전, 생각을 수첩에 적고요. 가지고 다니면서 봐야 할 건 휴대전화에 따로 정리하지요. 집에 가서 컴퓨터에 투수, 타자, 리더십, 육성 등으로 분류해서 다시 모아 놓습니다."

―그걸 코치들과 공유합니까.

"코치한테 줘도 50%를 못 가지고 가죠. 자기가 한 게 아니니까. 직접 연구해서 자기 걸로 소화한 뒤에 가르쳐야 합니다. 코치들이 그렇게 못 하면 항상 잔소리를 하게 됩니다."

―한 인터뷰에서 "코치진을 조진다"고 말했죠.

"숙제를 많이 내주는 거죠. 선생님이 좋아야 좋은 제자가 나오니까요. 코치들이 기본기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면 심하게 얘기를 합니다."

―코치들 불만이 많겠군요.

"4년 동안 저뿐 아니라 코치, 선수가 다 같이 성장했어요. 그게 성적으로 나왔고 연봉에 반영됐어요. 지금 넥센 코치들은 다른 팀 비슷한 나이의 코치에 비해 연봉이 더 많아요. 물론 결과가 안 나왔으면 저를 따르지 않았겠죠."

―새벽에 경기 비디오를 본다고요.

"경기에 이겼을 때는 새벽 3시까지, 졌을 때는 새벽 5시까지 봅니다. 박빙 승부에서 졌을 때는 잠을 거의 못 잡니다."

―선수 때부터 이렇게 노력파였나요.

"아니요. 한량이었습니다."

"이 정도면 잘했다" 제일 듣기 싫어

염 감독은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광주광역시에서 이름난 변호사였다고 한다.

―야구는 어떻게 시작했나요.

"아버지께서 시켜서 했어요. 집에 여유가 있으니까 야구를 직업이 아니라 취미로 했죠."

―천재 선수로 불렸다던데요.

"야구 명문인 광주제일고를 갔죠. 연습 대충 해도 시합 나가서 2, 3안타를 쳤고. '그래도 야구 했는데 연·고대 가야지' 생각해서 좀 연습하니까 고2 때 고려대 입학이 정해졌죠. 고대 가서도 처음엔 프로야구 선수가 될 생각을 안 했어요."

―언제 프로를 꿈꿨나요.

"대학 4학년 때 LG와 해태 경기를 보러 잠실야구장에 갔는데, 진짜 야구가 멋있어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반짝 연습해서 1991년 태평양 돌핀스에 2라운드 1차로 지명이 됐죠."

그는 데뷔 첫해 주전 유격수가 됐다. "시즌 초반에 3할 가까이 쳤어요. 4월에 '신인왕 후보 0순위'라는 보도가 나가자 팬클럽이 만들어졌어요. 이제 시작인데 그렇게 타성에 젖어 버린 거죠. 그만큼에 딱 만족해 버리는 선수가 됐지요. 그후 매년 1할대 후반, 2할대 초반 타율을 기록했어요. 타격이 안 된다고 해도 수비와 주루가 되니까 출전했습니다. 타격 연습하느라 손바닥 한번 까진 적이 없었어요. 그래도 주전이었으니까요."

―언제 정신을 차렸나요.

"1996년 팀이 태평양에서 현대 유니콘스로 바뀌고 유격수 박진만 선수가 들어오면서 제가 후보 선수가 됐어요. 설마설마했는데 개막전 전광판에 제 이름이 없어요.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데 그냥 나와 버렸어요. 어쩌다 경기에 나가서 집중을 하는데도 방망이에 공이 안 맞아요. 눈에는 볼이 잡히는데 운동을 열심히 안 해서 체력이 안 되니까 몸이 따라주지 않는 거예요. 어느 날 더그아웃에만 앉아있다가 집에 들어갔는데 아내하고 어린 딸이 자고 있는 모습을 봤어요. 이제 내 인생의 바닥이 시작됐는데 식구들은 어떻게 하나, 직장에서 존재 가치가 없어졌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비참할 수가 없어요. 그때 '이제부터라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1년간 정말 손바닥에서 피나는 노력을 했죠. 그런데 안 되더라고요."

―왜 안 된 것 같습니까.

"그냥 많이만 하면 되는 줄 알고 막연한 노력을 한 거예요. 나쁜 폼 가지고 밤새워 스윙을 하면 폼이 더 나빠지죠. 연습이 아니라 몸만 축내는 노동을 한 셈이죠."

―타격 코치가 있었을 텐데요.

"그때 여러 코치를 찾아다닌 것도 문제였어요. 나쁜 폼이라고 해도 한 가지 폼으로 1년 동안 했으면 나았을 텐데 마음이 급하니까 이 코치 저 코치 찾아다니면서 배웠거든요. 코치가 선수에게 맞춰야 하는데, 자기 것만 가르치니까 혼동만 오는 거죠. 그때 알았어요. '코치와 감독은 자기 야구만 고집해선 안 되는구나. 감독은 선수와 팀에 맞춰서 야구를 해야 한다'는 걸요."

―그때 캐나다 이민을 꿈꾼 겁니까.

"캐나다 단풍나무로 만든 야구 방망이를 한국에 들여오는 사업을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이민 서류를 잘못 작성해서 그것마저도 안 됐지요." 염 감독은 "그때부터 벤치에 앉아 코치와 선수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코치가 되려고 준비한 건가요.

"꼭 그렇다기보다는 야구 공부를 시작한 거죠. 이 선수는 왜 저런 폼으로 던지고, 저 선수는 왜 저렇게 때릴까. 초시계 들고 투구 시간, 견제 시간을 재 보기도 하고. 어떤 코치가 잘 가르치나 지켜봤죠."

―그때부터 자료를 수집한 겁니까.

"한국 야구 책뿐만 아니라 미국 야구 서적을 구해서 번역하고 정리했어요."

염경엽은 2000년 시즌을 끝으로 선수에서 은퇴하고 현대 유니콘스 운영팀장이 됐다. "운영팀장을 하면서 사람을 보는 판단 기준이 생겼어요. 구단 청소하는 60대 아주머니부터 열아홉 살 2군 선수까지 만나볼 수 있었어요. 그때 조직이 성과를 내려면 인재를 만들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스포츠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 하는 거잖아요. 교육 시스템을 잘 갖추고 직원 개개인을 위한 구체적인 목표와 계획을 세워서 몸값을 높이고, 이들이 샛길로 빠지지 않고 고속도로를 반듯하게 달릴 수 있도록 지켜보는 게 조직 관리자가 할 일이라는 걸 깨달았죠."

19년 동안 쓴 전술 노트

그는 현대 유니콘스 수비코치와 LG트윈스 운영팀장, 수비코치를 거쳐 2011년 넥센 히어로즈 작전·주루코치를 맡았다. 이듬해 겨울 넥센 구단은 그에게 감독 자리를 제안했다. 만 44세 최연소 감독이었다.

―언제부터 감독 꿈을 꾸었나요.

"저는 감독이 될거라고 생각 못 했어요. 잘해야 수석코치가 될 거라고 생각했지요. 당시엔 선수 시절 야구를 못했던 사람은 절대 감독이 될 수 없었습니다."

―경험하면서 좋은 감독이 될 수 있지 않습니까.

"리더는 경험하는 자리가 아니라 성과를 내는 자리입니다. 제가 스타 선수 출신도 아닌데 덜컥 감독직을 맡았다가 못하면 앞으로 야구 못했던 사람이 감독 하는 게 더 어려워질 거라 생각했어요. 구단한테 일주일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어요. 제가 선수 때부터 정리한 매뉴얼을 보고 시즌 구상을 해봤죠. 정말 잘하면 4등은 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염 감독 부임 첫해에 넥센은 4위를 기록해 창단 후 처음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1년 만에 팀을 바꾼 비결이 뭡니까.

"선수들이 왜 야구를 열심히 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했어요. 저는 대놓고 얘기해요. '성공하고 싶지? 네가 지금부터 10년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앞으로 인생 50년이 바뀐다' 이렇게요."

―꿈을 심어주는 거군요.

"꿈이 아니라 목표이고 계획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위인전 같은 거 읽고 막연한 꿈만 그리다 끝이에요. 실천을 안 한다는 거죠. 실천을 하려면 하나하나 목표와 계획이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걸 매 순간마다 기록하고 실천해 가면서 다시 체크를 해야 합니다."

―박병호, 서건창처럼 넥센에 와서야 잠재력을 터뜨리는 선수들이 유독 많았습니다. 선수를 어떻게 키웁니까.

"저는 포지션별로 경쟁을 안 시킵니다. 시즌 들어갈 때 누가 주전인지 얘기하고 큰 일이 없으면 이걸 그대로 유지합니다."

―경쟁을 해야 실력이 늘지 않나요.

"신참이 고참과 경쟁하면 절대 못 이겨요. 신참은 스프링캠프에 모든 걸 다 쏟아부으니까 시범경기 할 때 다 고꾸라져 버려요. 설사 시즌 초반에 잠시 잘한다고 해도 다른 팀에서 분석해서 대응하면 곧 못합니다. 이렇게 좌절하면 다시 일으켜 세우기 힘들어요. 후보는 시간을 정해놓고 피나는 훈련을 시킵니다. 후보 선수가 2군에서 충분히 성장했다고 판단했을 때 다음 시즌에 올리는 거죠."

―그러면 주전이 나태해지지 않습니까.

"주전한테는 경쟁 대신 책임감을 줍니다. 자기 역할은 자기가 해내라는 거죠. 아무리 못해도 3개월이라는 시간은 줍니다. 그래도 못하면 바꾸는 거죠. 선수 본인이 자신을 버리는데, 팀은 당연히 그 선수를 포기하는 게 맞습니다."

―야구장에 나오는 게 즐거워야 한다고 강조하죠.

"연습하고 경기하는 게 여자 친구 만나듯 설레야 합니다. 그러려면 경기장에서 배우는 게 있어야 해요. 저는 아프면 무조건 쉬라고 해요. 직원이 감기 걸려 죽을 것 같은데 출근시킨다고 일이 됩니까? 눈치만 보지요. 저는 선수가 하루 쉰다고 하면 이틀 쉬라고 합니다. 그러면 선수들은 복귀해서 펄펄 날아다녀요. 왜? 미안하거든요. 최상의 컨디션에서 연습하고 경기를 뛰어야 최고의 실력이 나오는 거죠."

―넥센에는 감독과 코치, 선수들 사이에 특별한 신뢰가 있다고 하더군요.

"신뢰는 존중과 배려가 있을 때 생겨납니다. 선수는 감독이 부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감독이 큰 기업체라면 코치는 중간 기업체, 선수는 작은 기업체입니다. 대기업이 중소기업 기술 빼먹고 이익을 독차지하면 서로 신뢰가 생겨날까요? 함께 성장하고 있다고 믿을 때 감독과 선수 간에 신뢰가 생깁니다."

'안 되는 것이란 없다'는 신념

인터뷰 내내 염 감독은 야구장 더그아웃에서 늘 그렇듯 무표정했고 목소리는 일정했다.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을 때가 있다. 2014년 한국시리즈에서 넥센이 삼성에 2승4패로 패했을 때다. 그는 기자회견 도중 눈물을 흘렸다. "남자 화장실에 사람이 있어서 여자 화장실 들어가서 혼자 엉엉 울었습니다. 너무 아쉽고 화가 나서요. 우승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고 제 모든 걸 쏟아부었으니까요. 야구는 투수 놀음이라지만, 강정호·박병호의 타격으로 한 번은 우승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더 좋은 선수들이 있었다면 우승했을까요.

"훨씬 선수가 좋았던 팀들도 우승 못 했던 적이 많았죠. 선수뿐 아니라 감독과 구단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됐을 때 우승할 수 있다고 봅니다. 저도 부족했고 구단도 부족했으니 좋은 결실을 못 낸 거죠."

염 감독은 내년 봄 메이저리그 연수를 간다. 이후 일본에서 3개월 더 공부하고 돌아오겠다고 했다. 그는 "다시 감독으로 돌아와 꼭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뤄내겠다"고 했다. '1할9푼5리짜리 감독'의 수첩에는 이같이 적혀 있었다. "안 되는 것은 없다. 자신이 포기하기 때문에 안 되는 것이다. 지금이 가장 행복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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