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사 '콕 찌르기] (44) 플레밍과 이항복 전설

2016. 12. 2.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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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재 박사의 '그것이 알고 싶지?'
"페니실린 만든 플레밍과 이항복의 영웅담 사실과 전설이 섞여 아름다운 이야기가 됐죠"

스코틀랜드 농장에서 일하는 휴 플레밍은 성실한 농부였다. 어느 여름날 아침 ‘살려달라’는 외침을 듣고 그는 농기구를 집어 던진 뒤 사고현장으로 달려갔다. 허리 높이의 진흙 늪에 한 소년이 빠져 들어가는 중이었다. 플레밍은 늪으로 뛰어들었고 소년을 구했다. 다음날 귀족 한 사람이 플레밍의 집 앞에 마차를 세웠다. 소년의 아버지였다. 귀족은 아들의 목숨을 구해줘서 고맙다며 보답의 표시로 무언가를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플레밍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이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때였다. 플레밍의 아들이 호기심어린 눈으로 현관을 나와 아버지 옆에 섰다. 생전 처음 보는 귀족의 ‘실물’이었다.

플레밍이 항생제로 처칠을 살렸다?

귀족은 플레밍에게 “이 아이가 아들이냐”고 묻고 “그렇다”는 대답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를 데려다 최고의 교육을 받도록 학비를 대겠습니다. 아이가 아버지와 닮았다면 우리가 자랑스러워 할 남성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플레밍은 동의했다. 가난을 탈출할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플레밍의 아들은 런던 세인트메리의과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귀족의 아들이 훗날 폐렴에 걸려 생명이 위독했을 때 자신의 발명품인 페니실린으로 그의 목숨을 한 번 더 구했다. 귀족의 이름은 랜돌프 처칠, 귀족 아들의 이름은 나중에 영국 총리가 돼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윈스턴 처칠이다.

이 이야기는 당대 유럽에 널리 퍼졌을 만큼 유명한 일화였으나, 알렉산더 플레밍이 쓴 책 《페니실린 맨-알렉산더 플레밍과 항생제 혁명》에는 나오지 않는다. 아니 나오기는 나온다. 다만 ‘놀랍도록 꾸며낸 이야기다’라는 구절을 덧붙여서. 2차 대전이 끝나고 1년쯤 지난 1946년 6월 처칠이 포도상규균 감염으로 알렉산더 플레밍과 상담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질병은 페니실린으로 치료할 수 없는 질병이었다.

담장 넘어간 감나무 홍시 소유권

조선 중기의 한양. 소년은 화가 났다. 감나무가 가지를 뻗어 담장을 넘어갔는데, 이웃집 대감이 홍시를 모두 차지했기 때문이다. 며칠을 두고 고민하던 소년은 그 집을 찾아갔다. 대감의 사랑방에 구멍을 뚫고 ‘이것이 누구의 주먹입니까’라고 물었다. ‘네 녀석의 주먹이지’라는 대답을 듣고 소년은 대감의 논리를 역이용해 자기 집 감나무에 열린 홍시의 소유권을 분명히 했다. 대감은 소년의 기개와 지혜를 기특하게 여겨 사위로 삼았다.

이 일화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펴낸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실린 유명한 이야기다. 소년의 이름은 이항복, 우정과 신뢰의 대명사 ‘오성과 한음’의 주인공 바로 그 사람이다. 이 설화는 물론 ‘지어낸 이야기’다. 다만 등장인물의 품성이 실제와 일치하기에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사실’처럼 전해지는 것이다. 이웃집 대감 이름은 권철. 권철의 아들이 임진왜란 행주대첩의 명장 권율. 이항복이 장성해서 권율의 사위가 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이항복이 소년 시절부터 성격이 호방하고 ‘노는 아이’의 풍모를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사실과 다르게 전해지는 것은 한음 이덕형과의 ‘소년시절 우정’이다. 두 사람은 성인이 되고나서 처음 만났다. 20대 초반 한양 과거시험장에서였다. 두 사람의 우정은 학연과 당파를 뛰어넘었다. 이항복은 서인, 이덕형은 동인이었다. 훗날 이덕형이 세상을 떠나자 이항복은 직접 친구의 시신을 염했다. 당시에는 모두 있기 어려운 일이었다.

감염사고 줄인 플레밍

다시 플레밍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플레밍을 의학으로 이끈 것도 우연의 연속이다. 삼촌에게서 받은 유산 관리를 위해 전문직을 갖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해 다니던 선박회사를 나와 의대에 진학했다. 의과대학 연구부서에서 면역학을 전공한 것도 ‘대학 사격동아리’의 주장이 플레밍을 팀에 장기간 남겨놓기 위해 힘을 쓴 결과다. 1914년 1차 대전 참전 때 목격한 수많은 ‘감염사고’는 항생제 개발의 동기가 되었다. 항생제의 위대한 점 가운데 하나는 ‘감염 걱정 없이 마음 놓고 수술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실과 전설을 섞으면 ‘아름다운 이야기’가 된다. 우리가 아는 일화 가운데는 ‘순도 100%의 사실’이 아닌 경우가 많다. 역사적 기술이나 신문기사라고 예외는 아닐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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