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슬플 땐 힙합을 춰..

중림로 새우젓 2016. 12. 2.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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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만화가 천계영의 데뷔 20주년이다. 천 작가의 첫 작품 <언플러그드 보이> 는 10대의 사랑과 우정이 빛났다. 그가 그려주는 꽃미남을 볼 동안만이라도 우리, 행복하자.

“얘들아, 큰일 났어. 교문에 엄청나게 멋있는 남자애가 서 있어! 얼굴이 주먹만 해!” 1학년4반 반장 반고호의 외침 그대로 1996년의 소녀들에게는 정말 ‘큰일’이 터져버렸다. 그해 11월15일, 순정만화 잡지 <윙크>에서 천계영 작가의 <언플러그드 보이> 연재가 시작되었다.

‘주먹만 한 얼굴’의 주인공 강현겸은 만 16세임에도 아직 사춘기가 찾아오지 않은 소년. 반면 현겸이의 동갑내기 여자친구 채지율은 이마에 난 여드름, 그리고 자신에게 전혀 이성적 감정을 느끼지 않는 듯한 현겸이가 최대 고민거리인 사춘기 소녀다. 지율이가 필요할 때마다 풍선껌을 불며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나타나는 현겸이는 순식간에 소녀들의 다이어리와 편지지 한쪽을 차지했다. 내친김에 풍선껌 광고 모델까지 꿰차며 최고의 ‘종이 남친’이 되었다.

초등학생이던 내게 <윙크>는 중고생 언니가 있는 친구의 집에 놀러 가서 언니가 없을 때 몰래 볼 수 있는, 딱 그 정도 거리감과 신비감에 싸인 잡지였다. 우리 또래들은 <밍크> <나나> <파티>에 열광하고 있었으니까. 현겸이와 지율이의 놀이터 데이트,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위태롭게 선 이락, 이뤄지지 못할 짝사랑에 가슴앓이하는 반고호와 여명명까지. <언플러그드 보이> 속 인물들이 엮어내는 세상은 나에게 다가올 10대의 사랑과 우정은 이런 거라고 슬며시 문틈을 열어 보여주는 듯했다.

조금씩 지율이를 ‘그냥 친구’라고 말하기가 어려워지는 현겸이를 보며 마음이 간질간질해지는 재미도 있었지만, 더 깊숙이 와 닿았던 것은 사실 성장의 서사였다. 지율이가 고교생 이상 관람가 등급이 매겨진 비디오테이프를 빌려오자, 현겸이는 “몇 살이 되면 봐도 되고, 몇 살이 되면 해도 되는 그런 기준은 누가 정하는 건지”라고 묻는다. 지율이는 그 기준은 자기가, 우리가 정하는 거라고 되뇌인다.

그리고 지율이의 생각처럼 <언플러그드 보이>의 인물들은 저마다의 기준과 방식대로 가족 간의 갈등, 꼬여버린 짝사랑, 세상에 대한 복수심을 해소하며 한 뼘씩 성장해 나간다. 심지어 담임선생님인 중년의 폭력 교사 ‘신디’마저도 문제아 이락을 뒤늦게나마 이해하게 된다. 막연하게 “공부 잘하고 엄마 말씀 잘 듣고~”라고만 말하는 어른들 틈에서, 조금 서툴더라도 네 힘으로, 네 생각으로 직접 너의 문제에 부딪쳐보라고 말하는 만화를 만난 것은 돌이켜보면 10대에 누릴 수 있는 큰 행운이었다.

성장의 서사를 그려낼 줄 아는 성장하는 작가

<언플러그드 보이> 2권을 열며 천계영 작가는 “몇 년 후 이 만화는 유행이 지나버린 상당히 촌스러운 만화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라고 적었다. 그녀의 말대로 딱 달라붙는 티셔츠에 통 넓은 힙합 바지 차림의 현겸이를 요즘 10대들이 본다면 ‘패션 테러리스트’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언플러그드 보이>를 관통하던 성장의 서사만은 20년이 지나도 여전히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그것은 성장의 서사를 그려낸 천 작가 스스로가 여전히 성장하는 만화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출판 만화에서 웹툰 중심으로 지형이 바뀌는 가운데서도 새로운 그림체와 프로그램을 끊임없이 연구하며 성공적으로 적응해낸 그다. 지난 6월에는 유튜브 생방송으로 시네마 4D 프로그램을 활용한 작업 과정을 공개하기도 했고, 최근 시즌 5를 마친 웹툰 <좋아하면 울리는>은 <동아일보>의 ‘가장 좋아하는 연재’ 설문조사 결과, 웹툰 부문 5위에 오르기도 했다. 무엇보다 천 작가가 1999년 이래로 단 한 번도 원고를 펑크 낸 적이 없다는 점이 더없이 존경스럽게 느껴진다.

장래 희망에 또박또박 만화가 세 글자를 적어내며 “천계영처럼 되고 싶어요”라고 말했던 초등학생은 꼬박 20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천계영처럼 되고 싶다”라고 말한다. “언니가 꽃미남 많이 그려줄게. 그거 볼 동안만이라도 너희는 행복해야 해!” 하는 마음으로 일하고 있다는 천 작가. 2016년에서 또다시 20년이 흘러도 자신의 만화로, 삶으로 계속 소녀들 곁에서 든든한 응원을 보내주길.

중림로 새우젓 (팀명)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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