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아, 남은 곡은 네가 불러주겠니?

김학선 2016. 12. 2.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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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국화의 원년 기타리스트 조덕환씨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장에는 전인권, 이영재 등 1980년대 한국 대중음악을 빛낸 이들이 모였다. 조씨의 음악적 역량은 눈부셨지만 정작 그는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11월14일 새벽 4시,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들국화의 원년 기타리스트였던 조덕환씨가 십이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3세. 장례식장 10호실 방명록에는 ‘이영재’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젊은 시절 조덕환과 함께 그룹 ‘조·이’로 활동했던 그 이영재였다. 오전 8시께 장례식장을 찾은 가수 전인권은 조문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영재와 전인권, 그리고 조덕환. 그들의 이름을 한꺼번에 마주하자 한국 대중음악이 가장 빛나던 때를 만들어낸 전설이 스쳐 지나갔다.

전인권은 SNS에 조덕환의 사망 소식을 알리며 그와의 인연을 말했다. “1970년대 신촌 등지에서 어울렸고 특히 우리가 만들어낼 수 없었던, 그 당시에는 충격적인 노래”를 지었다고. 그 노래는 들국화의 대표곡이기도 한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세계로 가는 기차’ ‘축복합니다’ 같은 곡이다.

전인권은 서울 종로구 비원 앞에 위치한 한 카페에서 노래하던 조씨를 처음 보았다. 전인권은 그의 음악에 금방 매료됐고, 특히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를 좋아했다.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를 전인권보다 멋지게 부를 수 있는 보컬리스트는 없었다. 자연스럽게 그 곡은 들국화의, 그리고 전인권의 대표곡이 되었다.

ⓒ연합뉴스 기타리스트 조덕환은 들국화의 대표곡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세계로 가는 기차’ 등을 만들었다.

조덕환은 특별한 음악가였다. 당대의 국내 음악가들과는 다른 서구적인 감성을 갖고 있었다.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배드핑거의 ‘캐리 온 틸 투모로(Carry On Till Tomorrow)’나 조지 해리슨의 ‘마이 스위트 로드(My Sweet Lord)’처럼 분위기를 내기 어려운 곡들을 기막히게 소화해냈다고 공통적으로 증언했다. 단순히 서구화된 음악만 들려준 게 아니었다. 한국인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정서를 더했고, 로큰롤과 블루스와 포크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체화해냈다. 전인권이 말한 “그 당시에 충격적인 노래”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이유다. 훗날 전인권과 조덕환이 나란히 자신의 앨범에 실은 ‘(아버지) 웃고 살아요’ 같은 노래 역시 한국적 정서가 가득 담긴 로큰롤이었다.

그렇게 조덕환은 들국화의 한 영역을 책임졌다. 멤버 네 명이 전면에 등장하는 들국화 1집 재킷은 그래서 상징적이다. ‘들국화’ 하면 전인권과 최성원의 이름을 먼저 떠올리지만 조덕환과 허성욱의 존재도 그에 못지않았다. 곡 수만 따져도 최성원이 네 곡, 조덕환이 세 곡, 전인권이 한 곡을 만들었다. 게다가 조덕환의 곡은 최성원과는 다른 색깔로 앨범에 긴장감을 주고 생기를 더했다. 허성욱의 건반 연주 또한 노래 전체를 감싸며 들국화 사운드에 중추적인 구실을 했다. 그의 연주가 없는 들국화 음악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네 명의 조화로 들국화 1집은 완벽해질 수 있었다.

이는 조덕환의 불운을 뜻하기도 했다. 모두가 한국 최고의 명반이라 칭하는 들국화 1집에서 그는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했다. 아니, 조명받을 기회가 없었다. 앨범을 발표하고 그는 곧바로 미국으로 떠났다. 그 폭발적 인기를 누리지도 못했다. 조덕환은 들국화를 떠나 미국으로 간 ‘공식’ 이유로 보수적이고 완고한 집안 분위기를 들었지만 꼭 그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룹 들국화의 1집 앨범 <행진>(오른쪽). 원년 멤버인 조덕환, 최성원, 허성욱, 전인권(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그의 개성에 매료되었던 우리는 그 개성이 너무 강해 밴드를 계속 해나가기가 힘겨웠다”라는 전인권의 말에서 어느 정도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그들은 조금도 양보할 수 없는 음악적 고집과 자존심이 강했고, 그로 인한 다툼도 잦았다. 또 명목상 조덕환은 들국화의 기타리스트였지만 그가 리드 기타리스트가 되기에는 기술적으로 부족했다. 결국 조덕환의 자리는 기타를 더 잘 치는 최구희와 손진태가 대신했다. 하지만 우리는 음악이 기술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조덕환이 빠지며 창작의 빈자리도 함께 생겨났고, 들국화의 2집은 확연하게 생기를 잃은 모양새였다. “그의 음악적 성정은 굉장히 뛰어났다. 그런데 테크닉이 약간 모자랐다. 그 뒤 테크닉이 뛰어난 연주자가 들어왔지만 본래의 빛남은 깨졌다”라는 이주원(그룹 ‘따로 또 같이’)의 말이 당시 상황을 함축적으로 말해준다.

미국 뉴욕으로 건너간 그는 평범하게 살았다. 다양한 일을 했고, 한국이었다면 절대 볼 수 없었을 밥 딜런, 폴 사이먼, 슈퍼트램프 등 다양한 아티스트의 공연을 찾아다녔다. 평온한 날들이었다. 하지만 음악을 향한 열정은 어쩔 수 없었다. 안정을 찾아 한결 여유로웠던 미국 생활을 정리했고, 부인을 설득해야 했다. 음악에 대한 목마름뿐 아니라 들국화 재결성이라는 목표도 있었다. 미국 생활 26년을 청산하고 귀국한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러나 한국에 돌아온 그는 또 한번 불운과 마주했다. 2012년 들국화는 언론과 대중의 뜨거운 조명을 받으며 활동을 재개했다. 재결성 자리에 ‘원년’ 멤버 조덕환은 없었다. 앞서 멤버 간 많은 이야기가 오갔을 테고, 대중이 그들의 사연과 감정을 모두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조덕환은 배제되었다. 오랜 시간 들국화의 재결성을 꿈꿔온 그에겐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는 눈을 감기 전까지도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 누구보다 들국화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진심이 실현되지 못하고 상실감만 쌓였다.

2012년 들국화 재결성 때 배제되기도

20년이 지나도 그의 음악적 역량은 여전히 빛을 잃지 않았다. 귀국한 뒤 발표한 <롱 웨이 홈(Long Way Home)>(2011)은 공백이 무색할 만큼의 역작이었다. 들국화 재결성만큼 주목받지 못했고 메이저 레이블에서 발매되지도 못했지만 비평가들 사이에서는 들국화의 재결성 앨범보다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한국에서 흔히 들을 수 없는 서던 록 스타일의 ‘수만 리 먼 길’과 먼저 세상을 떠난 허성욱을 기리는 프로그레시브 록 ‘제한된 시간 속에서 영원의 시간 속으로’를 앨범의 시작과 끝에 두고 그 사이에 자신의 재능과 스타일을 채워넣었다. 그는 이 재능을 들국화를 통해 펼쳐 보이고 싶어 했다.

세브란스병원 18층의 한 병실. 지난해 8월 암을 발견하고 이후 항암 치료를 반복해오던 그는 급격하게 상태가 나빠져 입원했다(올해 3월 처음 암을 발견했다는 ‘단독’ 기사는 오보다). 투병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던 까닭에 위독해지고 나서야 주위에 전해졌다. 소식을 들은 전인권은 날마다 병실을 찾았다. 길게 이야기를 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저 손을 잡고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조덕환이 세상을 떠난 뒤, 아침부터 장례식장을 지키면서 전인권은 “조덕환과 함께 들국화를 하지 못한 게 후회된다”라고 말했다 한다. 그렇게 들국화는 조덕환과 전인권에게 회한으로 남게 됐다.

전인권은 조덕환이 ‘수만 리 먼 길’을 만들고는 “인권이가 부르면 잘 어울리겠다”라며 좋아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까? 조덕환은 자신이 그동안 만든 20곡을 악보와 함께 깔끔하게 정리해놓았다고 한다. 이 곡들이 어떤 형태로 공개될지는 모르겠지만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가 그랬던 것처럼 조덕환의 남겨진 곡을 전인권이 다시 부른다면 그 회한은 조금이나마 옅어질 것이다.

김학선 (음악평론가)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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