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근 대신 뜨개질!

장일호 기자 입력 2016. 12. 2.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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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 대신 뜨개질> 은 30대 여성들이 만든 뜨개질 모임과 우리 사회의 노동조건이라는, 이어지기 힘든 것처럼 보이는 두 고리를 연결하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일상의 작은 싸움은 어떻게 세상과 연대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은 토요일 출근에서 시작됐다. 공정여행을 모토로 한 트래블러스맵이라는 사회적 기업의 사무실. 박소현 감독(38) 역시 못다 한 일을 들고 사무실에 나갔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화제는 자연스레 주말 근무와 야근으로 모아졌다. 출퇴근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내 진로를 방해하는 장애물처럼 여겨진다는 이야기, 지하철과 버스에서 짐짝처럼 다뤄지는 느낌에 대한 이야기….

30대 여성 네 명이 모여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이게 다 사람들이 일을 너무 많이 해서인 것 같아.” 야근이 꼭 지금 안 하면 큰일 나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우리끼리 ‘재밌는 야근’을 해볼 수 없을까? 각자의 전공도, 살아온 경험도 다 다른데 회사에서는 맡은 업무만 하게 되는 게 안타까웠다. 첫 번째 프로젝트는 뜨개질로 정했다. 모임 이름도 일사천리로 결정됐다. ‘야근 대신 뜨개질.’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몇 편의 영화에서 조감독으로 일한 경험이 있는 박 감독은 코바늘 대신 카메라를 잡기로 했다. “나는 뜨개질을 잘 못하니까 너희를 찍어줄게.” 그때만 해도 이게 자신의 첫 번째 장편영화가 될 줄은 몰랐다. 마음속에는 늘 영화에 대한 갈증이 있었지만 당장의 생계가 급한 날들이었다. 트래블러스맵에서 일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남탕’인 영화판에서는 번번이 거절당했다. 현장 통솔을 잘 못할 거 같아서, 목소리가 작아서 따위의 이유였다. 방송국에서 일했던 아버지의 장비를 갖고 놀며 자란 아이가 맞닥뜨린 세상이 그랬다.

ⓒ시사IN 신선영 박소현 감독(사진)은 코바늘 대신 카메라를 잡았다. 그녀의 작품 <야근 대신 뜨개질>은 11월17일에 개봉했다.

둘러앉아 실을 감고 패턴을 만들어나가는 동안 각종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회사 흉, 연애와 실연, 그리고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각종 사건과 사고들에 관한 이야기. “‘30대 여성’이라고 할 때 미디어가 좋아하고 사람들이 쉽게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잖아요. 골드미스이거나 육아맘이거나. 근데 ‘그렇지 않은 30대 여성도 있다’는 걸 보여줄 수 있겠다 싶었어요.”

‘스탠딩 뜨개질’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뜨개질’ 등 뜨개질 콘셉트는 매번 달랐다. 멤버들이 뜨개질로 만든 패턴이 모였을 때 제일 먼저 한 일은 일명 ‘도시 테러’였다. ‘도시에 꼭 광고만 있어야 하나’라는 문제의식에서 기획했다. 서울 영등포역 부근 버스 정류장에 뜨개질로 만든 패턴을 걸기도 했다. 박 감독 표현에 따르면 “놀랍도록 예쁘지 않은” 결과물이었고, 채 하루가 지나기 전에 철거됐지만 일단 재밌었으니까 그걸로 충분했다.

이들이 모여서 단지 뜨개질만 한 건 아니었다. 모인다는 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 될 줄 몰랐다. 영화에는 다 나오지 않았지만 박 감독을 비롯해 적은 월급으로도 ‘좋은 일’을 한다는 생각에 만족하던 사람들의 마음에 생채기를 낸 사건도 여럿 있었다. 연봉제 도입이었다. 연봉 협상 테이블에서 회사는 납득하기 힘든 조건을 제시했다. “둘러앉은 자리에서 ‘나도 사실은 이랬어’ 말하기 시작하는 순간 내가 경험한 일이 특별한 일이 아니라 보편적인 이야기로 변하더라고요.”

그사이 뜨개질은 방치되기 일쑤였다. 반복되는 야근과 심한 노동강도 때문이었다. 박 감독의 질문도 자연스럽게 다음으로 넘어갔다. “무엇이 이들의 뜨개질을 방해하고 있나로 생각이 이어졌어요. 그러던 어느 날 멤버 중 한 사람인 ‘나나’가 노동조합을 만들어야겠다고 나서기 시작했고, 이 시도를 이어서 찍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노동조합과 뜨개질이 무슨 관계냐고?

다큐멘터리 영화 <야근 대신 뜨개질>은 30대 여성들이 만든 뜨개질 모임과 우리 사회의 노동조건이라는, 언뜻 이어지기 힘든 것처럼 보이는 두 고리를 그렇게 이어간다. 뜨개질 모임에서도 노동조합에 대한 이견은 있었다. 노동법의 ‘니은(ㄴ)자’도 몰랐던 나나는 혼자 노동법 강의를 들으러 다니고 사내에 노동법 관련 강의를 연다. 그 균열 속에서 “너무 모르는 게 많았던” 사람들의 생각도 조금씩 변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변화는 거기까지다. 세 사람은 사회적 기업 최초의 노동조합을 만드는 대신 퇴사를 결정한다. “일정 부분 성과를 거둘 때까지 경주용 말처럼 가리개를 하지 않으면 함께 일하지 못한다”라는 대표의 말은 이들이 다 말하지 않은 퇴사 이유를 짐작하게 한다.

“노동조합을 만드는 사실이 외부에 알려졌을 때 회사가 투자받는 데 지장이 있지는 않을까, 노조가 필요한 건 알겠지만 대표가 상처를 받지는 않을까…. 영화 편집을 하는 저도 회사 걱정을 하고 있더라고요. 근데 회사는 얼마나 우리의 행복을 고민하고 있을까? 의문이 들었어요.” 영화가 완성될 수 있었던 데는 트래블러스맵 동료와 대표의 지원도 있었다. 자신들의 ‘치부’일 수도 있는 부분이 영화화되는데도 드러내는 쪽을 선택했다. 이렇게 이야기될 때 해결책도 찾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영화는 사회적 기업이나 시민단체에서 그동안 드러내놓고 이야기하지 않았으나 풀어야 할 숙제까지 기록했다.

<야근 대신 뜨개질>은 크고 작은 영화제 10여 곳에서 상영됐다. 최종적으로 배급사가 결정되고 투자가 이뤄지기까지 어려움이 많았다. 영화제에서 피칭(Pitching·일종의 투자설명회)을 마치고 나면 프로젝트 자체를 축소시키려는 시선과 만나곤 했다. “‘제작하는 데 돈 많이 안 들겠네’ ‘그냥 소소한 취미생활 아니냐’ 같은 평이 남성 감독들로부터 나왔죠(웃음). 신기하게도 여성 감독들은 한 명도 그런 말씀을 하지 않았어요.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 같다’고 말해주었거든요. 이 차이가 뭘까 계속 생각하고 있어요.”

결과적으로 이들은 노동조합을 만들지 못했다. 그래서 실패한 걸까. 박 감독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친구들이 집회나 이런 데 나가서 구호 외치거나 해본 적 없는 사람들이거든요. 할 수 있는 일이 SNS에서 ‘좋아요’ 누르는 것 정도였는데, 모이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느꼈던 무력감이 ‘우리 방식대로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쪽으로 변했어요.” 멤버들은 단지 사내의 변화에만 골몰하지 않았다. 함께 영등포 도시 테러를 해봤기 때문에 밀양 송전탑 현장으로 농활을 갈 수 있었고, 광화문광장 4·16 천막에 앉아 노란 리본을 뜰 수 있었다.

‘그렇고 그런’ 것처럼 보이는 다 큰 30대 여성도 계속 고민하고 성장한다. 내 일상을 조금 바꾸는 일이 세상과 연대하는 일이 된다는 걸 경험한다. 미국의 시인 마야 앤절루의 말마따나 “한 여성이 자기 자신을 옹호할 때, 그는 사실 자기도 모르게, 어떤 주장도 펼치지 않으면서, 모든 여성을 옹호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 잘 ‘짜인’ 여성 영화 한 편이 또 하나의 발자취를 남겼다.

장일호 기자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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