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웃음이 잘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다. 어색하기 짝이 없다. 그래도 그가 웃는다. 나름대로 파안대소다. 사진 기자를 향해 포즈도 잡아준다. 오른손을 들어 흔들어주기까지 한다. 이 정도면 엄청 신경 쓴 거다.
갑가지 그 기억이 떠오른다. 90년대 초반 올스타전이었다. 덕아웃 안에 들어온 ENG 카메라가 심하게 들이댔다. 심기가 편치 않았던 그의 표정을 잡기 위해서였다. 가만히 놔둘 리 없다. 꼬고 앉은 발로 렌즈를 가려버렸다. 무려 300mm를 자랑하는 거대한 신발 바닥이 몇 초 동안이나 공중파에 고스란히 노출됐다.
김응용 전 감독이 다시 ‘등장’했다. 이번에는 회장이라는 직함을 얻게 됐다.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초대 회장에 당선된 것이다. 17대 국회의원을 지낸 이계안 후보와 대결에서 압승을 거뒀다. 선거인단 127명 가운데 85표를 얻었다. 44표나 우세했다.
야구인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결정적이었다. 투표 현장에는 김인식 WBC 대표팀 감독, 선동열 전 기아 감독, 윤동균 전 OB 감독 등이 자리를 함께 했다. 일구회, 한은회 같은 모임도 공개적인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75살의 나이에 아마 야구의 수장 자리에 오른 그는 “야구계에 문제가 많다. 화합과 저변 확대를 위해 헌신하겠다”고 밝혔다.
엘리트 대 언더독
한동안 초야에서 은거하던 인사였다. 다시는 전면에 나설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화려하게(?) 컴백했다. 비록 그라운드는 아니지만 무대의 앞 자리가 다시 그의 몫이 됐다.
아이러니다. 그의 갑작스러운 출현은 그걸 느끼게 한다. 왜? 절묘한 오버랩 탓이다. 바로 김성근 감독(74)과 대비하면 그렇다. 어쩔 수 없는, 그런 그림이 보인다.
(우리가 기억하는) 김응용 회장의 마지막 직함은 한화 이글스 9대 감독이었다. 꼴찌가 지긋지긋했던 그들은 전설적인 우승 청부사를 기대했다. 그러나 2년간 아무 것도 나아진 게 없었다. 치욕적인 기록만 쏟아냈다. 오히려 더 깊은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찬란한 야구 인생에 치명적인 오점이었다. ‘그냥 삼성 사장까지가 딱 좋았는데….’ 노욕이었다며 지탄의 대상이 됐다. 뒷날 “한화 감독을 2년 하면서 혹시 타이거즈 야구에 먹칠을 한 것은 아닌지 후회가 된다”는 발언이 알려져 쏟아지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그런 역사는 후임 감독 인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글스는 10대 사령탑에 의외의 인물을 캐스팅했다. 야신이었다. 공교롭게도 가장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었다.
김응용 감독은 이를테면 금수저였다. 야구판에서 최고의 엘리트 코스만 밟았다. 그가 활동한 한일은행은 양키스나 요미우리 같은 곳이었다. 거기서 4번 타자 홈런왕, 최연소 감독을 거쳤다. 국가대표 팀을 맡아 세계선수권대회(1977년) 우승도 시켰다. 화려한 꽃길만 걸었다.
반면 김성근 감독은 잡초였다. 한일은행보다 한 수 아래였던 기업은행에서, 그나마도 부상 탓에 현역을 일찍 접었다. 아마추어 지도자 생활도 고등학교가 대부분이었다.
프로에 와서도 신분은 달라지지 않았다. 김응용 감독이 우승컵을 10번이나 들어올리는 동안 김성근 감독은 철저히 언더독이었다. ‘조련사’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약팀을 맡아 어찌어찌 중위권까지 올려놓는 정도 능력이라는 한계점이 회자됐다. SK 시대를 맞아서야 비로소 대권에 대한 갈증이 풀렸다(2007년 첫 우승). 그러나 이미 김응용 감독이 일선에서 물러난 뒤였다.
한화 이글스를 매개로 일어난 인생 역전
냉정하게 말하면 야구사에서 둘 사이에 라이벌이라는 설정은 적합하지 않다. 견주기 어려운 성과의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뒤바뀐 시기가 딱 한 번 있었다. 2년 전, 한화 이글스가 매개였던 시국이다. 김응용 감독이 처참하게 실패한 모습으로 물러났다. 대안으로 등장한 김성근 감독은 어마어마한 열광의 주인공이 됐다. 모든 스포트 라이트가 한 사람에게로 향했다.
당시를 회상하는 내용 중에 흥미로운 얘기가 있다. 얼마전 <스포츠조선>이 김응용 감독을 인터뷰 하면서 주고 받은 대화 중 일부다.
(기자) 한화 지휘봉을 잡은 김성근 감독이 취임 직후 이건 팀도 아니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김응용) 사실대로, 느낀대로 얘기한건데 뭐. 다만, 나라면 그렇게 얘기 못했을 것 같아요. 자기 팀 이야기는 될 수 있으면 외부에 노출하면 안 되지. 선수 사기 문제도 있으니 배려를 해야지. 선수들이 ‘그러면 우린 뭐냐’고 생각하면 곤란하지.(웃음) 현역시절에 나는 팀이 약할수록 강하다고 했고, 우승 자신이 있으면 엄살을 피웠지. 우승 어렵다고.(웃음)
결국 김성근 감독에 대한 열풍은 2년을 넘기지 못했다. 커다란 반감으로 변질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무렵이다. 역사의 아이러니처럼 둘의 처지가 또 한번 극적으로 역전되는 시점이 찾아왔다.
야신은 3년 계약 마지막 해를 앞두고 위태로운 상황이 됐다. 해임이냐, 유임이냐 관심사로 떠오를 정도였다. 일단 생존은 확보했다. 하지만 거의 전권을 갖고 있던 리더십의 상당 부분을 잃고 말았다. 프런트의 영향력 아래서 1군 선수단에 대한 권한만 유지하게 된 것이다. 부임 초의 기세 등등함은 사라지고 말았다. 반대로 김응용은 화려하게 야구계에 복귀했다.
야신의 유래에 대한 저작권자의 설명
한쪽 값의 결정에 따라 다른 쪽의 값이 결정되는 것을 수학에서는 ‘함수 관계’라고 한다. 김응용과 김성근의 관계도 그런 것 같다. 한 사람이 돋보일 때는 반대편이 한없이 작아진다. 참 묘한 관계다. 승부의 세계라서 그런가? 어쩌면 주류와 비주류의 전형적인 대칭 탓인 지도 모르겠다.
<스포츠조선>의 인터뷰는 해묵은 논쟁에 대해서도 화두를 제시했다.
(기자) 2002년 한국시리즈 직후 김성근 감독(당시 LG)을 ‘야신’으로 치켜세웠지요. 지금도 ‘야신’이라는 칭찬이 유효한가요.
(김응용) 뭐, 그런것 보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승자는 패자를 보다듬어 줘야하잖아요. 그게 예의지. 어떻게 어떻게 해서 이겼다, 그러면 죽은 사람 한 번 더 죽이는 거잖아. 뭐 요즘 잘 하잖아. 꼴찌팀을 그 정도 올려놨으면. 투자한다고 해도 당장 성적 나는 것도 아니고.
“야신 김성근? 패자 배려차원에서 한 말.” 이 인터뷰의 헤드라인이었다. 그리고 그 제목 아래는 활짝 웃는 김응용 감독의 얼굴 사진이 실렸다.
백종인 / 칼럼니스트 前 일간스포츠 야구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