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 위의 세계] (9) 농사지을수록 빚 수렁..인도 농민에게 녹색혁명은 재앙
[경향신문] ㆍ함께 씨 뿌리고 거두고…달리트 여성들, 재앙을 갈아엎다
ㆍ데잠마의 씨앗
인도 남서부 카르나타카의 마이소르 평야는 모내기가 한창이었다. 6~8월 바르샤(몬순) 동안 내린 비로 코베리강 수위가 높아지면서 댐들이 때맞춰 물을 방류했다. 기자를 안내한 아킬레쉬(26)가 유행가를 흥얼댔다. 택시기사는 지역 방언 칸나다어로 따라 불렀다. “누가 너희를 먹이는가. 우리가 당신들을 먹인다네. 인류 문명은 어떻게 탄생했나. 바로 우리가 만들었지.” 1983년 영화 <카마나빌루(무지개)>에 소개돼 인기 끈 ‘쟁기질 하는 사람들’이라는 노래다.
코베리강을 따라 논과 사탕수수 밭이 펼쳐졌다. 힌두 신화는 벼락과 전쟁의 신 인드라가 거인족 아수라와 싸울 때 물의 여신 코베리가 인드라를 도왔다고 전한다. 인드라가 이기면 풍요와 평화가 오고, 아수라가 이기면 빈곤과 재앙이 온다. 인도인들은 이 평야를 마주할 때마다 인드라에게 승리를 안겨준 코베리를 찬양했다.
인도는 1970년대 개량종자와 화학농법을 도입한 ‘녹색혁명’의 모범 국가였다. 1970년 이후 30년 동안 인도의 곡물 생산량은 곱절 이상 증가했다. 하지만 코베리의 축복인 줄 알았던 풍요는 아수라가 내린 재앙이었다. 농민들은 글로벌 생명공학 회사의 종자와 농약이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됐고, 빚에 허덕이기 시작했다. 1993년부터 2003년까지 농민 10만명이 자살했으며 지금도 매년 수천명이 목숨을 끊는다. 인도 인구의 17%인 2억명이 굶주리지만 전 세계에 쌀과 밀을 수출하는 식량 공급기지이기도 하다. 세계가 마주하는 농업의 모든 문제가 이 나라에 집결돼 있다.
녹색혁명과 세계화의 최전선에 내몰린 인도 농민들은 저항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글로벌 종자회사 카길과 화학기업 몬샌토에 맞선 싸움을 주도한 것도, 세계무역기구(WTO)와 자유무역협정(FTA)들에 반대하는 소농들의 연대를 이끈 것도 인도 농민이었다. 그들을 만나기 위해 지난 8월 인도를 찾았다.
■농사를 지을수록 쌓이는 빚
농업혁명이 막 시작된 1975년, 한국의 고등학교 1학년에 해당하는 10학년을 마친 레찬나(57)는 호사말랑기 마을에서 농사를 지었다. 1980년대 중반 마을 부근에 저수지가 생기고 물길이 만들어졌다. 집집마다 전해지던 토종종자는 사라지고, 글로벌 종자회사들의 고수확 종자가 땅에 뿌려졌다. 레찬나는 “젊었을 때만 해도 우리 세대는 과학의 수혜를 받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고소득 종자는 물을 많이 먹고, 화학비료와 특정 농약이 필수다. 수확 뒤 채종해 다시 심으면 열매가 잘 달리지 않아 다시 종자를 구입해야 한다. 농사를 지을수록 빚은 쌓여갔다. 몬샌토의 유전자변형(GM) 목화 종자를 구입했다가 빚더미에 앉아 자살하는 농민도 생겼다. 가뭄은 점점 잦아졌다. 엘니뇨 때문이라고 했다. 결국 레찬나는 “생태적으로, 경제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은 화학농법을 버렸다”. 2000년대 초반의 일이다.
그는 5.3㏊(1만5914평)의 땅에서 200여종의 ‘샬리(벼)’를 재배한다. 둘째아들 요기샤(21)가 올해 수확한 벼 이삭들을 바닥에 늘어놨다. 벼의 발상지는 인도다. 길쭉하고 찰기 없는 인디카(Indica)와 한국에서 자라는 짧고 찰진 자포니카(Japonica) 품종은 모두 인도 벵골의 자생종인 ‘오리자 니바라(Oryza nivara)’라는 야생 벼에서 파생됐다. ‘뎀바샬리’는 잎에 검은빛이 돌고, ‘칼라지라’는 낟알이 검다. ‘카기샬리’는 밥을 하면 짙은 갈색을 띠는데 산모들이 먹으면 젖이 많이 나온다고 했다. ‘아내 네르말라에게 바치는 마드렐리 농민 샹카르고다의 쌀’이라는 뜻의 ‘N.M.S’ 품종도 꺼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귀한 쌀은 ‘샤스티카’다. 500여종의 생약을 다룬 기원전 6~3세기 의학서적 <차라카 삼히타>가 소개한 붉은 쌀이다. “고서에는 심장병에 특히 좋다고 적혀 있는데 아예 사라졌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케랄라주 농부들 사이에서 이 종자가 전해지고 있더라”고 했다. 얼마 전에는 이 종자를 심고 싶다는 시모가 지방 농부에게 종자를 우편으로 부쳐줬다. 농민들은 종자 1㎏을 빌리면 다음 수확기에 2㎏으로 갚는다.
요기샤가 벼이삭들을 치우더니 이번에는 아주까리, 조, 오크라 등을 펼쳤다. 칸나다어로 ‘홍게’라 부르는 검은 씨앗은 기름을 짜서 살충제로 활용한다. 습진·가려움·여드름 같은 피부질환에도 쓴다.
수백종의 종자를 모두 구경하다가는 밤을 새겠다는 걱정이 앞설 즈음 아내 라데시와리(42)와 여동생 샤라뎀마(52)가 저녁 식사를 내왔다. 이웃집 라비와 사촌동생 서티스쿠마, 요리사이지만 집에서는 전혀 요리를 하지 않는다는 조카 나테샤가 묽은 삼바르를 밥 위에 붓고 손으로 비볐다. 삼바르는 온갖 채소와 렌틸콩, 코코넛파우더 등을 넣고 만든 수프다. 후식으로는 소젖에 코코넛파우더를 넣어 만든 달콤한 파야삼이 나왔다. 모두 그의 농장에서 나온 재료들로 만든 것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전해준 설탕
마이소르에서 옆 도시 만디야로 가는 길, 쿠마르(21)가 에뚜 두 마리에 사탕수수를 한 가득 실었다. 농장에서 수확한 사탕수수를 8㎞ 떨어진 설탕공장으로 옮기는 길이다. 그 뒤로 사탕수수를 끄는 또 다른 에뚜 무리가 보였다. 에뚜는 인도에서 수레를 끄는 데에 많이 쓰는 소다. 비쩍 마른 소의 몸통에 영양의 뿔 같은 흰 뿔이 달렸다.
사탕수수의 원산지는 남태평양의 뉴기니섬이지만, 세상에 사탕수수 존재를 알린 건 인도다. 기원전 326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인도 원정을 갔을 때 그리스군은 처음으로 사탕수수를 봤다. 알렉산드로스의 수하인 네아르코스 장군은 고향에 돌아가 “인도에서 자라는 갈대는 벌의 도움 없이도 꿀을 만들어낸다”고 전했다. 인도 사람들은 사탕수수를 씹어 단맛을 보는데 산스크리트어로 ‘달콤한 조각’을 ‘칸다(Khanda)’라 불렀다. 이 말은 유럽에서 사탕을 뜻하는 캔디의 어원이 됐다.
만디야 굴룰루도티 마을에 사는 크리슈나(48)는 4㏊에 일곱 종류의 사탕수수를 키운다. 아내 몬줄라(34)가 커피를 내왔는데 심심한 단맛이 났다. 설탕 대신 ‘벨라(원당)’를 넣었다. 사탕수수는 시간이 지나면 마르기 때문에 다른 작물과는 달리 바로 가공해 원당이나 설탕을 만든다. 크리슈나는 수확한 사탕수수를 설탕공장에서 가공하지 않고, 동네 주민 시다파가 운영하는 재래식 가공장인 알레마네에 가져간다. 시다파는 사탕수수를 잘게 잘라 즙을 내고, 솥으로 끓여 결정을 만든다. 350년경 굽타 왕조시대 인도인들이 개발한 방식 그대로다. 크리슈나는 “설탕공장보다 알레마네가 값을 더 후하게 쳐준다”고 말했다.
시다파가 토막을 낸 사탕수숫대를 착즙기에 집어넣었다. 작은 수숫대에서 1ℓ 정도의 즙이 나왔다. 시다파가 사탕수수즙을 흰 천에 거른 뒤 한 잔씩 돌렸다. 사탕수수 재배에는 물이 많이 들어간다. 이번 몬순철에는 비가 충분히 와서 사탕수수 농사가 잘됐지만, 올 초만 해도 가뭄이 심해 마을 전체에 농사 지을 물이 부족했다.
동네에서 물을 가장 적게 쓰는 크리슈나의 사탕수수밭은 가뭄 피해가 적었다. 크리슈나는 나무줄기와 수숫대를 밭에 묻어 물을 머금게 했다. “이렇게 하면 필요한 물의 양이 4분의 1로 줄어든다”고 했다. 그루터기를 남기고 수숫대만 잘라 수확하는데, 그루터기에서 다시 자란 것을 열 차례 베어낸 뒤에는 밭을 뒤엎고 콩을 심는다. 돌려짓기다. 콩은 땅속에 필수영양소인 질소를 고정시켜 준다. 양과 염소 배설물을 뿌려 땅심을 키운다. 크리슈나의 밭에서는 장마철을 제외하고 두 달에 한 번씩 7t의 유기농 원당이 나온다. 크리슈나는 70종의 벼와 잡곡도 함께 재배한다. 섞어짓기다.
인도는 브라질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설탕을 많이 생산하는 나라다. 인도산 설탕은 내수용으로 팔리거나 중국, 미얀마로 수출된다. 대규모로 경작하다보니 가뭄이라도 들면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플랜테이션을 하는 대농장들은 가뭄이 들면 지하수를 파서 사탕수수밭에 물을 댄다. 이 때문에 농민들과 주민들이 쓰는 공동 우물이 마르는 일이 잦다. 전통 농법인 돌려짓기와 섞어짓기는 사라지다시피 했다.
땅을 가진 대지주와 설탕공장들은 중앙정부와 주 정부의 농업정책에 깊숙이 관여해 입김을 행사하곤 한다. 크리슈나는 “설탕회사들이 정부에 로비를 해 사탕수수 농사에 보조금을 지급하도록 하다 보니 사탕수수 농장이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벼와 채소를 키우던 농민들은 대지주들이 만든 사탕수수, 목화 플랜테이션 농장의 일꾼으로 전락한다. 다국적 농업기업에 종자와 비료 값을 내다가 빚에 몰려 몰락한 소농들이 그런 저임금 농업노동자가 되는 것이다.
■코베리강의 물 전쟁
반누르 마을에 사는 크리슈나파(46)의 논에는 방금 내린 빗물이 자박자박하게 차 있었다. 빗물에 의존하는 천수답이다. 깊은 물길을 파고 코베리강의 물을 받아 쓰는 이웃 논은 복숭아뼈가 잠길 정도로 물이 가득했다. 크리슈나파는 가뭄에 강한 토종 벼를 심는다.
그는 “전통방식으로는 물을 이렇게 많이 쓰지 않았다. 옛 농사법을 알지 못하는 이웃들은 오히려 내게 미쳤다고 손가락질을 한다”고 했다. 크리슈나파는 이웃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만디 뚬바 니루, 에데 뚬바 살라(물이 발목까지 차면, 빚은 가슴까지 찬다).”
여신이 준 풍요의 강물은 탐욕의 상징이 됐다. 코베리강 상류의 카르나타카와 하류의 타밀나두는 서로 자기네 주가 물을 더 많이 써야 한다며 분쟁을 벌였다. 타밀나두 농민연합이 1983년 카르나타카 주정부에 물을 더 방류하라고 소송을 내면서 시작된 법적 분쟁은 대법원까지 갔다. 법원의 결정에 의해 ‘코베리강 분쟁조정 재판소’까지 만들어졌지만 33년이 지난 지금도 분쟁은 계속된다. 물 분쟁으로 1991년 카르나타카의 주도인 방갈로르에서 폭동이 일어나 타밀나두 사람들이 쫓겨났고, 타밀나두에서는 카르나타카 사람들이 공격을 받았다. 2006년에는 유명 배우 라즈쿠마르가 납치됐는데 당시 납치범은 “타밀나두에 강물을 더 흘려보내라”고 요구했다.
크리슈나파는 “녹색혁명 이후 사람들은 댐을 더 지었고, 살던 사람은 내쫓겼고, 강을 서로 차지하려고 싸웠고, 환경문제는 심해졌다”고 말했다.
크리슈나파는 16년 전부터 논 뒤편 작은 언덕에 코코넛, 아르카넛(Arecanut), 바나나, 커피, 글리리시디아(Gliricidia), 후추, 오렌지 등을 심었다. 다양한 작물을 같이 심고 재배 환경을 야생숲과 유사하게 만들어 작물들이 야생의 힘을 회복하도록 한다.
한국 농민들 사이에서 <짚 한 오라기의 혁명>이란 책으로 잘 알려진 일본의 소농 후쿠오카 마사노부(福岡正信)의 ‘자연 농법’이다. 은행 빚에 시달리는 인도 농민들은 ‘돈 안 드는 농법’이라고 부른다.
5m 간격으로 야자의 일종인 아르카넛 네 그루를 심고, 그 안에 커피나무 두 그루와 땅속에 질소를 공급하는 글리리시디아 나무 두 그루를 키운다. 덩굴식물인 바닐라를 심어 글리리시디아를 타고 오르도록 하고, 나무 아래에서는 후추와 생강, 강황 등을 키운다. 5㏊ 면적의 언덕 전체가 이런 방식으로 조성됐다. 그가 하는 일은 소똥 10㎏, 소 오줌 10ℓ, 콩가루 2㎏, 원당 2㎏, 흙 한 줌, 물 200ℓ를 섞어 발효시킨 친환경 액체비료를 매일 아침, 점심, 저녁마다 숲에 뿌리는 일이다.
카르나타카 소농들은 어깨에 녹색 수건을 걸친다. 인도 최대의 농민단체 카르나타카 농민연맹(KRRS)의 표시다. 농민연맹은 크리슈나파와 레찬나 같은 소농들을 위해 남부 혼다라발루에 ‘암리타 부미(영원한 지구)’라는 농업학교를 세웠다. 현대 과학기술의 부작용으로부터 지구를 살리고, 미래를 위한 농업을 이어가자는 취지다. 레찬나의 큰아들 아빌라쉬(22)는 이곳에서 토종 벼종자를 이용한 농사법을 연구하고 있었다. 바산타(31)는 채소밭 곳곳에 금잔화를 심었다. 해충들은 금잔화의 향기를 싫어한다.
■달리트 여성 농민들의 공동체
텔랑가나주의 메닥 지역은 데칸고원 한가운데 자리 잡았다. 한 줌 손에 잡힌 빨간 흙이 알알이 부서졌다. 건조하고 양분이 많지 않아 수수나 조 같은 잡곡을 주로 심는다. 메닥의 마치누르 마을은 인도에서 가장 천대받는 ‘달리트’로 이뤄진 마을이다. 브라만·크샤트리아·바이샤·수드라로 나뉘는 힌두교 4개 카스트 계급에도 포함되지 못하는 불가촉천민이다. 녹색혁명 직후 달리트들은 소작료를 낮추고 농사지을 토지를 배분하라며 달리트 운동을 시작했다. 1983년 마치누르와 주변 75개 마을 달리트들이 모여 데칸개발협회(DDS)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마치누르 마을에서 데잠마(45)를 만났다. 데잠마는 1.2㏊(3673평)의 땅에 농사를 짓는다. 0.4㏊에는 24~25종의 작물을 심었다. 데잠마는 “가족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거의 모든 종류의 잡곡을 심는다”고 말했다. 나머지 0.8㏊에는 칸둘루(비둘기콩)를 심었다. “요즘 칸둘루가 가격이 좋지. 세 배나 올랐거든.” 수확한 종자는 햇볕에 말려 재와 섞은 뒤, 방충 효과가 있는 님나무 잎을 넣어 다음 파종기에 쓴다. 데잠마는 잡곡 사이사이에 공구라도 심었다. 무궁화과 나무인 공구라는 버릴 게 없다. 줄기로는 옷감을 짜고, 잎으로는 ‘공구라 파푸’라는 스튜를 만든다. 빨간 꽃은 결혼한 인도 여인들이 이마에 빨간 점을 찍을 때 사용하기도 한다.
인도는 여성의 조혼이 만연해 있다. 부유한 남성들로부터 돈을 받고 어린 딸을 시집보내는 부모도 있다. 데잠마는 이웃 사톨리 마을에 살다가 열 살 때 남편의 고향 마치누르에 왔다. 학교는 다니지 못했다. 얼굴에 솜털도 다 빠지지 않았을 열네 살 때 어머니가 됐다. 지금은 세 딸과 아들 하나, 9명의 손주가 있다.
마을이 바뀐 건 데잠마와 같은 마을 여성들이 ‘상감(공동체)’이라는 데칸개발협회 의사결정기구에 대거 참여하기 시작하면서다. 상감은 주변 마을의 농사일과 조직 내 대소사를 결정한다.
이웃과 함께 쓰기 위해 토종 종자를 모으고, 친환경 농사를 짓는다. 땅이 없는 달리트 농민들을 위해 공동 경작지를 조성했다. 달리트 여성 농민들은 글로벌 종자회사, 정부, 상위 카스트, 남성들이 만들어낸 농업시스템이 자신의 삶을 구속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마을 안쪽 붉은 돔 모양 건물의 ‘파차살라(녹색학교)’에 15명의 남녀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지역 언어인 텔루구를 배우는 시간이다. 5학년 니로니카(12)가 칠판에 적힌 글씨를 읽었다. “남자와 여자는 평등합니다.” “거짓말하면 안돼요.” 1학년 니루바(6)가 대단하다는 듯 니로니카를 바라봤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10학년까지 공부한다. 조혼 풍습은 사라지는 추세이고 이곳의 젊은 여성들은 대안학교 덕분에 학력이 높다. 데잠마도 늦은 나이에 이곳에서 글을 배웠다.
■종자은행과 마을 라디오
마을에는 ‘비타날라(종자) 은행’이 있다. 은행장과 부은행장 모두 여성이다. 은행장 센드라마(60)와 부행장 락슈마마(50), 아니샴마(45)는 주변 밭에서 좋은 종자를 보면 밭 주인과 흥정해 사들인다. 다른 마을에서 시집온 여성들로부터 종자를 얻기도 한다. 모두 85가지 종자가 보관돼 있다. 종자를 보관하는 큰 항아리 ‘빼다굼미’에 종자를 넣고 소똥으로 밀봉해 3년간 보관한다.
상감은 농작물을 시세보다 10% 비싸게 사들여 시장에 내다판다. 시내에는 친환경 매장과 유기농 전문 식당을 만들었다. 상감 구성원들에게는 사업자금도 지원한다. 상감은 한국의 농협이 맡은 자금 지원·농산물 유통 등의 차원을 뛰어넘어 주변 지역의 농산물 생산량과 가격, 마을 사업 등을 결정하는 농업회의소 역할까지 하고 있었다.
나르샤마(35)는 상감 라디오방송국의 프로듀서 겸 작가이자 엔지니어다. 마을 방송국은 1999년 상감에서 “마을 이야기를 서로 나누자”며 추진됐고 2008년 10월15일 ‘마을 여성의 날’에 맞춰 첫 전파를 탔다.
방송사 직원의 90%가 마을 여성이다. 나르샤마는 여덟 살에 결혼할 뻔했다. 집에서 도망쳐 이 마을에 정착했다. 마치누르 녹색학교에서 10학년을 마치고 상감의 지원을 받아 방송기술을 배웠다. 25세가 되던 해에 결혼했다. 지금은 일곱 살 딸과 네 살 아들을 둔 엄마다.
방송국 반경 20㎞ 안에 있는 40여개 마을 주민들은 나르샤마의 열혈 청취자들이다. 사람들이 집에 모여 있는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마을 뉴스, 주민들의 편지, 음악, 요리 프로그램을 내보낸다. 가장 인기 있는 방송은 ‘주민들의 편지’. 사실 편지보다는 전화가 더 많이 오는데, 이날은 “우리 집 버펄로가 사라졌다”는 전화가 방송을 탔다.
땅에 뿌리내린 인류의 초창기 직업은 농민이었다. 국제노동기구(ILO)에 따르면 전 세계 노동력의 3분의 1은 여전히 농업에 종사한다. 일을 하는 아이들의 70%는 농업에 동원된다.
인도처럼 개발이 진행 중인 나라에서는 농업이 여전히 나라의 생명줄이다. 인도의 국내총생산(GDP)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7%뿐이지만 인도 노동력의 49%는 농민이다.
비아캄페시나 활동가들이 모로코 마라케시에서 기후변화협약을 지키라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비아캄페시나 제공 |
거대 기업, 그들의 로비로 움직이는 정부, 거대 기업과 결탁한 대지주들에 맞선 소농들의 연대 조직 ‘비아캄페시나(Via Campesina·소농의 길)’는 인도의 농민운동이 단초가 됐다. 카르나타카 농민연맹이 1992년 12월 인도 종자 시장을 노리는 카길의 방갈로르 사무실을 점거했는데 이것이 50만 농민의 세계무역기구(WTO) 반대 시위로 번졌다.
연맹을 이끌던 고(故) 난준다스와미 박사 등의 주도로 1993년 비아캄페시나가 만들어졌다. 지금은 세계 73개국에 회원단체를 둔 글로벌 기구로 발전했다. 카리브해의 최빈국 아이티의 ‘파파야농민운동’부터 농업대국 미국의 ‘전국가족농연합’까지, 전 세계 농민단체들이 ‘식량주권’을 외친다.
지난달 각국의 비아캄페시나 활동가들은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2)가 열리는 모로코 마라케시에 모여 시위를 벌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집권 뒤 파리협약에서 탈퇴하겠다고 한 것에 반대하기 위해서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모두에 온실가스 감축을 의무화한 파리협약은 석유에 기반을 둔 대규모 농업시스템을 지향하는 글로벌 농화학 기업들에는 재앙과도 같은 일이다.
기업의 힘은 거칠 것이 없어 보인다. 농민의 손에 쥐여진 것은 한 줌의 흙과 씨앗뿐이다. 농민들이 씨앗과 먹거리와 환경을 지켜낼 수 있을까. 카르나타카 농민연맹 여성분과위원장 난디니 자이람이 말했다. “우리는 연대하는 법을 알았고, 우리 목소리를 낸다. 자본가들이 만드는 규칙에 균열을 내고 일방적인 흐름에 제동을 건다. 우리는 세상을 조금씩 변화시키고 있다.”
부메랑은 고스란히 돌아왔다. 1970년대까지 7~30m만 땅을 파도 우물에 물이 솟구쳤는데, 화학농법과 함께 물은 점점 줄어들었다. 과학자들에 따르면 인도 밀의 60%와 쌀의 50%가 생산되는 펀자브주의 경우 지하수위가 연간 3m씩 낮아졌다. 지금은 땅속 300m를 넘게 파야 물이 나오는 곳도 있다.
특별취재팀
구정은 박경은 이인숙
정환보 남지원 이재덕 기자
취재 지원 : 한국언론진흥재단
<마이소르·메닥(인도) | 이재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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