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에 우승컵 안은 홍진주, "신데렐라보다 엄마로 불리는 게 더 좋다"

이영미 스포츠 칼럼니스트 입력 2016. 12. 1. 16:02 수정 2016. 12. 1.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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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미의 생생토크] "아들과 함께 우승컵 들고 사진 찍는 꿈 이번에 이뤄"

“모든 워킹맘에 용기를 주고 싶었다.”

지난 11월6일 ‘팬텀클래식 with YTN’에서 우승한 홍진주(33·대방건설)는 우승 후 소감으로 ‘워킹맘’이란 키워드를 꺼내들었다. 3살 아들을 둔 ‘엄마 골퍼’ 홍진주는 KLPGA투어에 3명뿐인 주부 선수들은 물론 세상의 워킹맘들을 향해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무려 10년 만에 우승컵을 받아들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기념사진까지 찍은 ‘워킹맘’ 골퍼 홍진주. 그가 한때 ‘필드의 패션모델’로 불리며 최고의 인기를 끌었고, LPGA에서도 활약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사연 많은 우승 스토리를 갖고 있는 홍진주를 만났다.

© 이영미 제공

어느새 2016 시즌이 막을 내렸다. 올 시즌을 마친 소감이 이전과는 차이가 있을 것 같다.

“처음 시즌 들어갈 때는 시드권만 유지하는 게 목표였다. 우승하기 전에 시드권을 확보했기 때문에 ‘팬텀클래식 with YTN’ 대회는 마음 편히 임했었다. 그러다 덜컥 우승을 하게 된 것이다. 마음을 비우면 채워진다는 게 맞는 말인가 보다. 진짜 아무 욕심 없이 대회에 출전했는데 그토록 바라던 우승이 내게 왔다.”

 

대부분의 선수들은 우승을 목표로 한다. 그런데 왜 시드권을 유지하는 걸 목표로 삼았나.

“어린 나이에는 어떻게 해서든 우승하려고 발버둥을 쳤었다. 한창 때(전성기 때)는 미디어들로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터라 조금이라도 성적이 떨어지면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투어에서 ‘홍진주’의 존재감이 사라졌다. 스포트라이트는 후배들의 몫이었고, 사람들은 내가 대회에 참가했는지조차 몰랐다. 관심 밖의 선수가 돼 버린 것이다. 그런 변화에 의기소침해졌고, 표정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골프가 재미없다 보니 계속 도망 다니고 싶었는데 시드권 유지를 목표로 삼고 마음을 내려놓으니까 부담이 사라지면서 골프가 다시 좋아지더라.”

 

2006년 9월 SK엔크린 솔룩스 인비테이셔널대회에서 생애 첫 우승을 차지한 이후 10월 한국에서 열린 LPGA 투어 코오롱·하나은행챔피언십에서 깜짝 우승을 거두는 바람에 이듬해 미국으로 진출했다. 그러다 2010년 KLPGA로 복귀했는데 미국에서의 생활이 어려웠던 건가.

“한국에서 좀 더 투어 생활을 하고 미국에 갔더라면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프로 경험이 적고 투어도 많이 해 보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LPGA에 도전했다가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치렀다. 내가 접한 현실은 TV에서 봤던 LPGA 무대와는 거리가 있었다. 세계적인 실력의 선수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내가 좋은 성적을 내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박세리, 박지은, 안니카 소렌스탐, 로레나 오초아 등이 버티는 투어에서 난 길을 잃고 헤매었다. 모든 게 새로웠고, 모든 선수들이 낯설었으며, 모든 대회가 부담스러웠다. 한마디로 미국은 나와 맞지 않았다.”

 

LPGA 데뷔하던 해 개막전 때 잊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졌었다고 들었다.

“하와이에서 열린 대회였는데 화장실 문제로 웃지 못할 일이 생겼다. 미국 골프장은 한국처럼 중간에 그늘막이 없다. 간이화장실만 있을 뿐이다. 그늘막을 떠올리며 참다가 그늘막이 없는 걸 확인하고 급해지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자원봉사자가 운전하는 카트를 빌려 타고 간이화장실에 다녀왔다. 이후 동반 라운드를 펼쳤던 선수가 경기 도중 필드를 벗어나는 행위는 벌타가 주어진다고 얘길 하더라. 처음 알았다. 그런 룰에 대해서. 그 후론 경기 전에 꼭 화장실에 다녀온다. 가급적 물도 많이 마시지 않는다.”

 

데뷔한 해에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후에는 우승만 못했을 뿐 꾸준히 성적은 냈었다.

“처음엔 겁을 많이 먹었기 때문에 소극적으로 움직였던 게 사실이다. 그러다 시즌 초반을 지나니까 조금씩 눈이 떠지고 귀가 열렸다. 나만 못하는 게 아니라 나보다 못한 선수들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감이 생겼다. 세계적인 실력의 선수라고 해도 못 칠 때가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당시 LPGA에 한국 선수들만 40여 명이 활약하면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부모들 사이에서도 경쟁이 대단했다는 얘기도 들었는데.

“시기와 질투가 많았다. 한두 명 친해지기도 힘든데 40여 명이 다 친해질 수는 없었다. 그 사이에서 자연스레 파벌이 형성됐다. 난 언니들이랑 친했는데 강수연·정일미 프로가 동생처럼 잘 챙겨주신 덕분에 덜 고생스러웠다. 그땐 철이 안 들어서 한국의 친구들이 보고 싶을 땐 대회 없는 일주일 동안 한국에 자주 나왔었다. 외로움을 미국에서 혼자 버티지 않고 아예 한국에 다녀오는 걸로 해소했다. 언니들이 체력이 정말 대단하다고 입을 모을 정도였다.”

© 이영미 제공

LPGA에 진출하면서 SK랑 3년 계약을 맺었었다. 2009년에 계약이 끝나는 시점이었는데 SK와 재계약이 안 되면서 국내로 돌아올 생각을 했던 건가.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었지만 기업의 후원 없이 개인 돈으로 투어 생활을 이어 나가긴 어려웠다. 3년 동안 외롭고 힘들게 생활했는데 더 이상 그런 마음가짐으로 미국에서 버티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한국 투어가 그리웠고, 한국 집이 그리웠다. 고민 끝에 과감히 미국 투어를 접게 된 것이다.”

 

2011년에 자신의 SNS에 ‘나이 많아서 안 돼! 결혼해서 안 돼! 예전 같지 않아서 안 돼! 당최 나이 먹고 결혼하고 실력 없으면 골프 치지 말라는 거야? 예쁘고 어린 것들만 찾는 이 더러운 현실!’이란 내용의 글을 올린 적이 있었다. 외모 지상주의에 잠식당한 골프계와 스폰서 기업들의 현실을 정면으로 비판했다며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뛰어난 외모로 인해 덕을 본 선수 중 한 명이 자신 아닌가.

“하하, 그렇게 말씀하시면 틀렸다고 대답은 못한다. 2006년 스물세 살의 나이에 SK와 계약 맺을 당시 몸값을 많이 받았다는 얘길 들었으니까. 이전에는 이런 현실을 잘 몰랐다가 한국 돌아와서 새로운 회사와 계약을 맺으려다 보니 나이 많고 실력 없고 결혼까지 한 선수에게 스폰서를 해 주는 회사가 거의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스폰서들은 어리고 예쁜 선수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그땐 이런 현실을 인정하지 못해 그런 글을 올렸던 것이고, 지금은 아주 잘 이해하고 있다. 시장의 경제 논리에 대해.”

 

한국으로 복귀해선 2010년 정규투어 시드 순위전에 출전했다. 당시 LPGA에서 활약한 선수가 한국의 시드 순위전에 출전한 부분이 화제가 되는 상황이었다.

“창피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내가 돌아오고 싶은 무대였고, 한국이기 때문에 당연히 감수해야만 했다. 당시 LPGA에서 뛰다가 국내 무대에 복귀한 선수는 내가 처음이었다. 이후 안시현이 있었고. 그러다 보니 사람들의 시선이 묘하긴 했다. 난 당당했다. 미국에서 실패했으니까 돌아온 거라고 솔직히 얘기했다. 미국에서 10년 이상 투어 생활을 하는 선수들에게 난 ‘존경한다’고 말한다. 내가 겪어봤기 때문에 그렇게 오랫동안 외국 생활을 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또 시즌마다 시드권을 유지한다는 것도 엄청난 일이다.”

 

흥미로운 건 국내 복귀한 그해 말 3년6개월 동안 연애했던 사람과 결혼식을 올렸다는 사실이다.

“지인을 통해 소개받은 남자였고, 3년 넘게 변함없는 모습으로 내 옆을 지켜줘서 결혼을 결심했다. 내 스타일이 계획적인 걸 좋아하지 않는다. 결혼 일정도 미리 계획을 세워둔 게 아니었다. 그냥 양가 부모님을 만나 인사드렸고, 그러다 보니 상견례를 하게 됐고, 자연스레 결혼 날짜가 잡혔고, 한 달 후에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사실 결혼하고 나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줄 알았다. 사람에 대한 그리움, 남편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같이 살면서 자연스레 풀릴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결혼은 하는 것보다 유지하는 게 세 배 이상 힘들다는 것을 절감했다. 연애를 오래 했어도 싸울 일은 줄어들지 않더라. 서로 포기하는 게 많아지면서 조금씩 감정들이 잠잠해졌다. 이해와 배려라는 말이 결혼생활에 가장 많이 필요한 단어들이었다.”

 

2006년 LPGA 대회에서 우승했을 땐 ‘신데렐라’로 불렸다. 아들을 낳은 이후론 ‘주부 골퍼’ ‘엄마 골퍼’란 수식어가 뒤따른다. 기분이 묘할 것 같다.

“지금은 신데렐라라는 말보다 엄마로 불리는 게 더 좋다. 내가 결혼 후 아이 낳기 전까지 자주 했던 얘기가 있었다. 대회에서 우승하고 난 후 내 아들과 함께 우승컵 들고 사진 찍고 싶다고. 그걸 이번에 이뤘다. 생애 처음으로 내 아들과 함께 말이다. 대회에서 우승을 많이 하진 못했지만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은 건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형성해 준다. 내가 지금까지 홀인원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는데 그것마저 이룰 수 있다면 여한이 없을 것 같다.”

 

골프선수들에게 결혼도 고민이겠지만 출산은 더더욱 어려운 문제다. 골프를 그만두지 않고선 육아에 전념할 수 없는 환경 때문이다.

“2012년부터 2년간 스폰서 없이 투어 생활을 이어 가다 2013년에 일본 투어로 진출했었다. 개인 돈으로 모든 경비를 지출하다 보니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러다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해 9월에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해서 만삭 때까지 골프를 쳤다. 지인들이랑 즐기면서 말이다. 그때 아니었다면 아기도 갖기 어려웠을 것이다. 가족의 도움 없인 절대 혼자서 해낼 수 없는 일들이다.”

11월6일 경기 용인시 88CC에서 열린 ‘2016 팬텀클래식 with YTN’에서 우승한 홍진주가 아들 은재군과 함게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뉴스1

출산 후 복귀하는 과정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처음 프로 데뷔할 때보다 더 긴장하고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아기 낳고 오히려 스폰서 문제가 쉽게 해결됐다. 모자에 로고를 달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존심을 되찾은 것 같아 진심으로 기뻤다. 우리 아들이 ‘복덩이’라는 생각도 들면서 말이다. 가장 어려울 때 손을 잡아준 회사에 고마움과 함께 뼈를 묻겠다는 얘기도 전했다. 액수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골퍼 홍진주를 인정해 줬다는 점에서 고마웠다. 이후 후원 문제로 고민하지 않고 골프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됐다.”

 

올 시즌 안시현 프로가 먼저 우승을 차지했었다. 당시 우승을 못한 이로서 같은 처지의 안시현 프로가 많이 부러웠을 것 같다.

“진짜 부러웠다. 그때 나도 대회에 나갔던 터라 시현이 우승이 확정된 후 포옹을 해 주는데 시현이를 축하해 주는 마음과 함께 ‘아, 나도 우승해서 이런 포옹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시현이도 결혼 후 일들이 많지 않았나. 어려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골프를 통해 자신을 다시 드러낸 부분이 대단해 보였다.”

 

현재 KLPGA 선수분과위원장을 맡고 있다. 한마디로 선수들의 권익을 위해 일하고 있는 건데 선수분과위원장은 투표로 뽑는 건가.

“선수들의 투표로 이뤄지는 것이다. 협회나 이사회에서 선수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역할이다. 어른들과 회의하며 기죽지 않고 일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운동하는 선수 입장에서 이 일을 맡는다는 게 쉽진 않다. 그래도 투어 환경이 좀 더 개선돼서 후배들이 편한 분위기에서 운동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 선수분과위원장이 된 이후부터 대부분의 후배들과 소통하며 지내는데 후배들의 고민을 듣는 시간들 또한 소중하다고 본다.”

 

선수분과위원장을 맡으면 시드권을 주는 걸로 알고 있다. 

“그렇게 해서 시드를 받고 싶진 않았다. 내 성적으로 시드권을 유지하려 했고, 지금까진 그렇게 해 왔다. 후배들 눈이 있는데 그렇게 해서 투어 생활을 한다면 그들이 날 어떻게 보겠나. 아직은 후배들과의 정정당당한 경쟁을 통해 평가받고 싶다. 아직은 그럴 실력이 된다고 믿는다.”

 

10년 만의 우승이 가져다준 생활의 변화가 있다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나.

“변화보다 오히려 헛헛함, 허무함이 더 커졌다. 목표가 사라진 것 같아 골프에 집중이 안 됐다. 누구보다 남편이 좋아했다. 남편 만나고 처음으로 우승했으니까 되게 신기했나 보다. 그리고 올 시즌을 끝으로 회사와 계약이 끝난다. 재계약을 앞두고 있는데 문자를 해도 회장님이 씹는다(웃음). 난 뼈를 묻을 각오인데 회사가 날 안 받아주면 어쩌나 싶고, 하하. 설마 우승까지 했는데 내 손을 놓진 않으실 것이다.”

 

홍진주는 돌아가고 싶은 시기가 있느냐는 질문에 ‘없다’고 대답했다. 물론 더 젊고 인기가 많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자신은 30대인 지금이 정말 행복하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그가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이 옆에 있기 때문이리라.

홍진주는 골프를 밥에 비유했다. 끼니 때마다 꼭 챙겨 먹어야 하는 밥처럼 골프도 매일 연습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세상의 모든 워킹맘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던 것처럼 그는 오랫동안 투어 생활을 영위해 나가면서 팬들에게 잊히지 않는 선수가 되려고 분투 중이다. 

이영미 스포츠 칼럼니스트 sisa@sisa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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