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표의 근대를 걷는다]예천 삼강주막과 외상장부

입력 2016. 12. 1.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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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서울 도심의 한 분식집에서 외상장부를 보았다. 낙동강과 그 지류인 내성천, 금천의 세 줄기 강물이 모인다고 해서 삼강(三江)이란 이름이 붙었다. 1900년경 생긴 것으로 알려진 삼강주막이다. 낙동강을 배경으로 500년 된 회화나무가 삼강주막을 감싸 안고 그 옆으로 낙동강이 넉넉하게 휘감아 돈다. 열아홉 나이에 주모를 맡아 2006년 아흔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70여 년 동안 주막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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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예천 삼강주막과 부엌 흙벽에 표시한 외상장부(작은 사진).
 얼마 전 서울 도심의 한 분식집에서 외상장부를 보았다. 수첩 크기의 옛날 공책 스타일에, 모나미 볼펜이 연결되어 있었다. 신용카드가 보편화된 요즘에 아직도 외상장부라니, 의외였다.

 외상장부 하면 떠오르는 곳이 있다. 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의 옛 나루터. 낙동강과 그 지류인 내성천, 금천의 세 줄기 강물이 모인다고 해서 삼강(三江)이란 이름이 붙었다. 이곳에 100년 넘은 주막이 하나 있다. 1900년경 생긴 것으로 알려진 삼강주막이다. 낙동강을 배경으로 500년 된 회화나무가 삼강주막을 감싸 안고 그 옆으로 낙동강이 넉넉하게 휘감아 돈다. 낙동강을 따라가면 멀지 않은 곳에 그 유명한 회룡포가 나온다.

 삼강은 대구와 서울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다. 1900년대 초까지 장날이면 하루에 30회 이상 나룻배가 다녔다. 소금배가 들어왔고 농산물도 이곳을 통해 대구, 서울로 향했다. 상인, 부보상, 뱃사공들이 드나들었다. 경치가 좋다 보니 시인 묵객의 발길도 이어졌다. 자연스레 주막이 생겼고 부보상과 사공들의 숙소까지 만들어졌다.

 1960년대까지 삼강나루터와 주막은 사람들로 붐볐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 다리를 놓으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졌다.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널 일이 사라진 것이다. 주막을 찾는 사람도 줄어들었다.

 삼강주막은 조선의 마지막 주막으로 불렸다. 이 주막을 지킨 사람은 유옥련 할머니이다. 열아홉 나이에 주모를 맡아 2006년 아흔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70여 년 동안 주막을 지켰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한동안 방치되었으나 2007년 옛 모습으로 복원해 주막의 정취를 이어가고 있다.

 주막 곳곳에 남아 있는 그의 흔적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것은 외상장부다. 부엌의 안팎 흙벽을 유심히 보면 세로로 죽죽 그어놓은 선들이 있다. 부지깽이를 사용해 자신만이 알 수 있는 방식으로 만들어 놓은 외상장부다. 짧은 줄은 대포 한 잔, 긴 줄은 대포 한 주전자. 외상값을 모두 갚으면 가로로 길게 줄을 그어 외상을 지웠다.

 마지막 주모의 기발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오래되어 선명함이 떨어진 데다 투명 플라스틱으로 덮어 놓다 보니 먼지가 끼고 빛의 반사로 잘 보이지 않는다.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보면 볼수록 재미있다. 100년을 훌쩍 넘긴 삼강주막. 세월도 가고 주모도 갔지만, 외상장부가 남아 주막의 역사를 생생하게 전해 준다.

이광표 오피니언팀장·문화유산학 박사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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